아난다 수트람에 의하면
죽음은 정신적 파장과 육체적 파장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한쪽이 깨지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였다.
남편이 암 말기에 뇌경색까지 와서 의식이 간혹 오락가락하고 종종 멀리 떠나있는 듯할 때가 있었다.
그런 중 어느 땐가 내가 부탁했다.
“이 몸 잘 고쳐서 오래 오래 쓰게요.”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희미하게 말했다.
“너무 낡았어”
올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러 유난히 세상 떠난 남편을 꿈에 자주 만난다.
오늘만 해도 꿈속에서 남편을 만났다.
이상한 모습이었으므로 많이 찜찜했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거울 기구‘에 그토록 오랜 세월 찍혀 있는 영상일 터이니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 하면서 굳이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몸이 추워서 보일러를 높이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꿈에서 최근에 죽은 가까운 지인을 만난다.
아마 장소는 뭔가 부산해 보이는 성당인 듯
그녀가 아픈 듯해서 편하게 자리를 내주다가
나도 영성체를 받아 모시러 나가니
신부님이 무언가 해오지 않았다고 영성체를 거절하였다.
꿈에서도 내가 사이비 신자였던가 보다.
윤회할 때는 삼스까라를 태울 수 있는 몸, 유전자적 기구(환경과 부모)가 선택된다고 한다.
상당한 지식인 성향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내 경우를 보아도 그런 것 같다.
다다, 디디들을 보면 많은 경우
아주 종교적인 집안에서 성장한다.
그러면 정신적 삼스까라와 그 업을 태울 기구인 몸에 균형이 생긴다.
그러다 주요 업장은 어느 정도 소멸하고
다른 단계의 업장을 찾아가는 몸이 필요해져서 죽음이 발생하는 것일까?
나이 들면 몸이 굳어져서
진보하는 마음에 따른 구조를 뒷받침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바바는 젊어서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던가 보다.
나만해도 이제는 몸이 힘들어 수행이고 독서고 모든 것이 다 귀찮기만하다.
내가 이렇게라도 글을 써대는 것은
아직 글이라도 쓸 수 있을 때
지식 봉사라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식 삼스까라(못채운 욕구)덕분에 이번 생애에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지식의 끝까지 가본 것 같다.
다음 단계는 무엇일지 모르지만 아무렇게나 상관없다.
바로 지식의 끝자락은 ’나라는 개체성‘의 개념적 소멸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