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라는 것이 세상의 온갖 정보를 다 갖고 있다.
어쩌다 내가 궁금한 정보가 있어서 들여다보면 그에 따라 수많은 정보가 따라 나오니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나같이 할 일 없는 독거노인에게 유튜브는 상당한 위안꺼리이다.
그러다 보니 딸에게는 내가 중독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 본듯 느껴졌나보다.
이제 몸도 여기 저기 고장 나는 터라 의학상식에 솔깃해진다.
어제 딸이 나를 나무란다.
“쓰레기같은 유튜브 정보가 넘쳐나는데 무분별하게 맹신적으로, 중독적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삐졌다.
자식에게는 나이 든 엄마가 철부지 아기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딸은 시원찮고 모자란 내게 항상 지나친(?) 보호자 의식을 갖고 있다.
“야! 엄마가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 다 엄마에게 꼭 필요한 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제는 눈도 잘 안 보이고 집중이 안 되어서 독서도 못 하겠고
워낙 몸을 잘 안 쓰는 게으른 사람이라 일도, 운동도, 취미생활도 잘 못하니
이제는 천상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일이 내게 제일 편하다.
그러다 보니 늙어가는 일이 참 초라해진다.
그러다 문득, 늙어가는 경험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무력해지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큰 이해를 놓치는 일이 아닐까.
시어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던 생각이 났다.
너무 활동적이어서 귀찮았던 시어머니는 나이 드니 거실 소파에 딱 붙어서 꿈적도 안 하고 TV만 보았다.
잠이 안 오니 야동프로그램까지 거의 밤 2, 3시까지 TV만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게 성가시어 맨날 들어가 주무시라고 소리쳤지만 막무가내였다.
그 당시 나는 절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러고 있는 시어머니가 불편했다.
지금 생각하니 시어머니가 TV라도 보지 않으면 무얼 하셨겠나 싶다.
또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성당 형님이 있다.
다리 허리가 불편하고 혼자 사는 그 형님도 우리집에 와서까지도 유튜브 건강 상식만 보고 내게 진리인양 말하고 때로는 광고만 요란한 병원을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내게도 그것이 어리석어 보여서 뭐라고 잔소리하면 지금 나처럼 곧잘 삐진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똑같은 짓을 벌써 내가 하고 있다.
그러나 한 깨달음이 왔다.
그 일이 어떻게 보이든, 모든 존재가 그 조건과 인연 속에서는 최선의 삶이라는 것이다.
나도 남을 많이 판단하며 살아왔다.
아, 잘난 체 꽤나 했구나
그러나 어떤 누구나 각자의 존재 방식은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깊이 다가왔다.
다만 같이 사는 옆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이 힘들 수가 있다.
그럴 때 이렇게 표현해주면 어떨까?
“당신이 사는 방식은 나빠요”가 아니라 “당신의 사는 방식이 내게 이러저러하게 불편하니까 조심해 달라”고
물론 나이 들어 굳어진 방식, 즉 유전적(inborn), 환경적(acquired). 주입된(imposed) 업장이
바뀌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더라도 최소한 더 행복하여질 수는 있다.
또 싸워도 좋다.
서로 불편함이 이렇게 자신을 알아채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