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에 명상하려고 앉아있는데 조금 잘 나간 듯 하다가 또
삼천포로 빠진다.
분명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와 해답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이서 세상 사는 일에 쫄고 있는 마음이 느껴진다.
“왜 그렇게 세상 눈치보며 두려워하는 거야? 너는 개체가 아니고 무한의식의 현현이잖아. 무한의식이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분리가 되었고 물질이라는 분리 속에 갇힌 것이 이 세상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야 ”하며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여전히 안도가 되지 않는다.
세상은 폭력과 죽음, 병, 고통, 파괴가 난무하고 미약한 나는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관성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또 다시 무시무시한 전쟁의 참화 속에 거의 버림받다시피한 ‘아기로서의 나’가 느껴진다.
그러다 생각이 엄마뱃속까지 미쳤다.
이 세상에 나올 때는 또 얼마나 힘들었던가?
누구나 엄마 자궁에서 이 세상으로 빠져나올 때 얼마나 힘들게 나오는가!
나오자마자 갓난 아기는 당연히 울음을 터뜨린다.
전쟁의 포화에서 대나무 숲 오두막에 숨어 나를 분만했던 엄마,
낳자마자 피묻은 대창으로 위협당했던 엄마
아, 낳은지 이레도 못가서 장성에서 광주까지 걸어서 나를 둘쳐업고 아버지한테 갔을 때
딸 낳았다고 외면당했다는 엄마
자라면서는 병약하고 나약하고 예민했던 나, 더구나 또 딸이었던 나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한 자식이었다.
생애내내 진정으로 행복했던 기억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굳이 찾자면 어렴픗하게나마 혼자 미나리밭을 지나 뒷산에 올랐던 기억이 나름 즐거웠던 일이었다고나 할까?
문득 프상 130번이 생각났다.
“내 인생의 황금빛 새벽이 다시 올까요?
무수한 아픔의 어둠을 뚫고
무수한 고통, 무수한 굴욕
수많은 황혼, 수많은 새벽
수많은 가을, 수많은 봄밤
수많은 소망과 열망....”
나는 그 프상을 생각하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지독한 아픔을 겪어내며 살아내는 모든 존재들에게 연민이 갔다. 아, 고아들, 병든 이들, 가난한 이들, 무지와 탐욕에 빠진 이들까지
힘든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남보기에 비교적 괜찮게 사는 것으로 보이는 나나 아들까지 인생은 쉽지 않은가 보다. 내가 아들에게 “너도 어린 시절 불행했다고 느껴지니?”하고 물으니 “뭘 불행까지! 그냥 불우했지”하며 짖굳게 웃는다.
그러다 오늘 아침 명상 때 일이다.
또 삼천포로 빠져서 무한의식이 경험을 하고자 이 세상이라는 환영을 창조했다는 철학을 곰곰 생각해본다.
그러자 성경에 나오는 착한 큰 아들과 탕아였던 작은 아들,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은 아들은 고통을 겪고 집으로 돌아온다.
타락했던 작은 아들을 반가히 맞아주었다는 아버지
아버지는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자식들을 만들었을까?
혹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에만 편하게 있는 것이 심심하여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기 위해 집을 나가지 않았을까?
우리 집도 그렇다. 모범생 큰 언니는 성실하고 착해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칭찬 받고 참 평이한 삶을 산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 변화와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사실 인간사에는 고통이 큰 만큼 즐거움도 큰 법이다.
어쩌면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도 그렇다.
언니는 천상 보수이고 나는 비교적 진보적 성향인 듯하다.
아버지에게는 어떤 자식이나 성향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 바다의 파도
나는 잔잔한 파도보다는 오르락 내리락하는 파도 노릇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니
어제의 울음이 오늘은 웃음을 준다.
울움도 웃음도, 즐거움도 괴로움도, 낮도 밤도, 차가운 겨울도 뜨거운 여름도
심지어 옳고 그름도 바다의 파도 노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