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성과 영성은 순수하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기와 지혜로운 성인은 둘 다 순수하다.
시아버지를 사랑한 두 여인이 있었다.
시어머니와 수녀원으로 도망간 수녀님
둘 다 순수했다.
시어머니는 동물처럼 욕심많고 때론 사나웠다. 반면 수녀님은 예수님처럼 순수한 사랑만 지니고 있었다.
예수님이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 말은 어린 아이와 성인은 비슷하다는 말과 같다.
단 어린 아기는 자의식의 과정을 거쳐 분리를 경험하고 다시 에고를 반납하는 사랑으로 돌아와야만 참다운 자신이자 본향인 순수의식의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늙은 성인이 천국을 들어가려고 하자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노인은 아이처럼 순수하지 않다고해서 그런 것같다.
그러자 시바신이 문지기에게 벌을 내렸다.
문지기에게 물었다.
“네가 지상에 9번을 악인으로 태어났다가 돌아오겠느냐? 아니면 70번을 선인으로 태어나 내게로 오겠느냐?”
그는 대답했다.
“나는 9번을 악인으로 태어나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생애는 주님의 자식들은 죽이고, 심지어 부인과 자식까지 몹시 괴롭히다 죽어간 유명한 왕이 되었다.
그 왕은 주님을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오로지 머리속에 주님만 맴돌았다.
왕은 “ 생각하는대로 네 자신이 된다(As you think, you become) ”는 법칙대로 미워서 주님만 생각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순수하다는 의미에서 물질과 영성은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성은 에고라는 ‘가짜 나’의 단계를 거치고
그 에고에서 해방되는 과정까지 지나 순수한 사랑만 남는 성인의 단계에 가야 비로소 순수의식과 하나가 된다.
사실 우리 생애에서도 자의식이 강한 사춘기, 청년의 단계가 가장 괴로움도 많고 힘들다.
그와 같이 예술가, 지식인 단계가 마음이 정묘해서 진선미를 추구하는 만큼 아직 개성과 자의식이 강해서 갈등과 괴로움이 크다.
아직 사춘기 단계인 나만 해도 나의 의견, 신념, 성향에 대한 집착과 자의식이 강해서 갈등과 주변과의 마찰도 크다.
아마 대부분의 예술가 성향들이 그런 경향성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고통과 마찰이 큰 만큼 진보도 빨라서 진정한 영성에 큰 진전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단계에 있든지 우리는 순수의식의 자녀들
아직 기저귀에 똥 싸는 아기 단계이든
지독하게 부모 말 안 듣는 사춘기 단계이든
에고를 다 소진해버린 노년 단계이든
우리는 지고의식의 현현이다.
착한 조띠가 요새 학교에서 인간관계로 힘들어한다.
심지어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등, 금년에 사주가 나빠서라는 등 조띠답지 않은 소리까지 한다.
내가 그랬다.
“바바의 뜻이다. 예쁘고 착하기만 한 너, 아난다 수트람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마음이 크게 확장되어야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어떤 단계이든 그분의 현현임을 알아채리게 하기 위해서 바바가 마찰과 갈등을 부추기는 모양, 싸움꾼 조띠노릇, 어때? 쉽지 않지?”
우리는 모두 서로의 진보를 위해서, 괴롭히기도 하고 얼르기도 하는 스승의 대리자 노릇을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