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주체성, 본성은 오직 하나, 한 얼, 주님만이 선언할 수 있는 용어이다.
” I AM(내가 있다, 현존)“이 없으면 ”내가 행위한다(에고)“가 나오고 ”내가 행위를 했다(경험)“은 성립될 수가 없다.
그래서 행위하는 나인 에고나 그 결과인 경험은 아버지인 현존, 즉 주님으로부터 태어난 자식들이다.
나라는 주체성 이외는 전부 소유격인 나의 행위, 나의 집, 나의 가족, 나의 나라, 나의 재산 등 일체가 ”나의(My)“이다.
그래서 개체로서의 행위와 결과가 서로 다른 일체가 전부 한 아버지, 한 주님의 자식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주체로서의 나를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인 본성, 자성이라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모두 주님이라 하고 ’당신(You), 그분‘이라 부른다.
’일체가 나‘이거나 ’모두가 당신,‘ 이거나 마찬가지이다.
바바는 프상에서 ”하늘도 땅도 당신 것, 우주도 당신 것, 나도 당신 것’이라고 하듯
주로 ’당신‘을 사용한다.
아마 자칫 ”나“라는 용어는 에고로서의 나와 혼용이 되어 사용되기 때문인 듯하다.
사실 물질계라는 형상 세계, 모두가 분리되어 보이는 현상계의 이원성에서는
개체로서의 에고를 갖지 않고는 살아나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대부분은 근원적 주체성인 ’나‘, 본성으로서의 나를 망각한 체 ’행위하는 나‘ 에고로서의 나로 한정되어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나"라는 표현은 쉽게 오해를 불러온다.
그러므로 ’모두가 당신‘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보다 방지할 수가 있는 것 같다.
에고가 강한 개인으로서 나도 이 방법이 조금이라도 유용한 듯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간혹 에고가 끼어들어서 마치 개체로서의 내가 무언가 통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간혹 이런 기도를 드린다.
”주님, 나는 사랑의 가슴도 빈약하고
행동하는 배도 빈약하옵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나은 것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능력밖에 없는지라
살아있는 날까지 이런 글이라도 다른 이들에게 보탬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이런 능력도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에고로서의 나‘를 주체성으로 가진 세월이 수억 만 년이라
이 질긴 업력이자 습관을 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렇게 개체로서 에고를 유지하고자 한 사건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원죄, 그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일지 모른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말은 개체로서는 자신의 원죄이자 업력에서 놓여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개체적 존재로서 인간이란 먼지와 같다.
오직 진정한 근원에서 나오는 힘, 은총만이 개체적 에고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 하나가 되어라“고 한 것이고
바바께서 ”모두가 하나, 모두가 주님, 바바남 께발라무“를 늘 노래하게 한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