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나도 제목이 그럴듯해서 시청하였다.
우리 모두 자유와 해방을 염원한다.
인도 철학에서는 해방을 ’묵티‘라 한다.
해방된다는 것은 묶여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묶여 있음‘은 갇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나 모든 생물체는 무엇보다도 생존에 묶여있다.
우리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뼈속깊이 각인되어있다.
생존은 의식주 말고도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속한 집단 즉 가족, 나라, 이웃, 직장 등에서 버림받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된다는 근원적 본능을 이어받고 있다.
살아남아야만 되는 삶은 엄숙한 지상과제이고 죽음은 필연코 피해야만 하는 두려움의 정점이다.
그런 존재인 인간이 진정 해방될 수가 있을 것인가?
불교에서는 삶 자체가 허망한 것이니 다 놓으라 한다.
나도 일찍 부모님의 죽음을 겪고 삶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는 통감하였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어서도 삶으로서 나를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실 ’몸과 마음‘이 나라는 ’에고로서의 주체감인 나‘가 어떻게 에고의 나를 버리고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는 내게 해방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오래 몸담아온 탄트라의 길에서 희망을 엿본다.
탄트라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이다. ’긍정의 길‘이다.
왜냐면 생존을 위해서 욕구하고, 생각을 이용하고, 몸부림을 치는 우리 모두가 지고 주체자, 무한의식의 현현이자
삶이라는 색깔의 춤을 추는 지고 주체,Supreme Subject 자신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한 아버지, 지고 주체의 자식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나와 대상은 하나이기 때문에 나를 부정한다는 것은 대상 역시 부정하는 일이므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먼저인 것 같다.
나의 에고는 못나고 실수하고 욕망하는 나를 자책하고 미워했다.
몸과 마음을 나라고 착각하는 에고마저 어쩌면 주체자 그분의 일일지 모른다.
온전한 받아들임은 바로 사랑이다.
요새 ’자신을 사랑하라‘는 방탄소년단의 메시지가 그렇게 놀라운 호응을 일으키고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묘한 공명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서로 생존하기 위해서 남을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데 우리는 지쳐있다.
외형적인 사람은 타인을 공격하고 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방어하고 공격한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일상의 약육강생의 생존게임에서 자신을 학대하고 지쳐있는 두 남녀가 상대를 불신하는 대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추앙‘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충만하게 됨으로써 점차 해방되는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본질이 지고 주체자, 아버지라는 것을 언제나 상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