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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 사랑방

개인적 의지란?

작성자샨티|작성시간22.07.02|조회수21 목록 댓글 0

개인의 의지 같은 것이 있을까?

이것은 상당한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문제와 씨름해 보았다.

 

이 나이가 되어 삶을 돌아보면 부끄럽게도 나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목표로 열심히 노력해본 일이라고는 없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반응해서 성향에 따라 근근하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다 하게 무언가 이루어 논일도 없고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 즉 딸로서, 부모로서, 아내로서, 사회인으로서 어느 역할도 대충 아무렇게나 해온 것 같다.

아마 나는 아직 미성숙한 아이의 단계를 못 벗어난 모양이다.

내 감당도 못 하는 마당에 ’남을 사랑하라‘는 단계까지는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죽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게 ”내가 낳아서 너에게 준 소중한 삶에 무엇을 했느냐?“ 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어 쩔쩔맬 것 같다.

”아버지, 덤벙거리고 느려터진 난 맨날 물건(지갑, 핸드폰, 마스크, 안경 등) 찾느라 헤매고, 잠자고, 꿈꾸고, 밥 짓고, 식사하고 화장실 가고 친구와 수다 떨고... 간혹 깔깔거리고, 울고, 아프고, 걱정하고, 싸우고 그러다 왔어요.“

아이고, 그저 하느님이 안 계시거나 계시더라도 이런 고약한 질문은 안 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난 합리화나 변명에는 상당히 능통하다.

나도 이러는 나와 살기 힘들었는데 나를 낳아주었다는 하느님마저 나를 혼낸다면 다소 억울하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 자식들도 내가 어쩌다 뭐라 하면 간혹 이렇게 대든다.

”누가 이렇게 낳아주라고 했냐고요!“

나도 논리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가 있다면

”나“를 이 꼬락서니로 만들 것 같지는 않다.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게, 성실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꼭 그런 모습으로...

 

나도 하느님에게, 나의 자식들에게 변명하고 싶다.

그러다 나는 인도 철학의 무아설에 솔깃한다.

인도에서는 ”의지“란 말에 해당하는 용어 자체가 없다 하고

불교에서는 애초에 ”나“라고 할만한 ”나“가 없다(무)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노력‘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물론 바바는 왜 그렇게 수행, 노력(사다나)을 강조했다는 말인가?

노력이라는 말은 ’나라는 주체‘로서의 개인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무나 풀, 동물 등은 개체로서의 주체감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냥 본능적 욕구(nature)가 있을 뿐이다.

나도 그때그때의 욕구와 상황에 따른 반응을 했다.

그것은 동식물의 단계, 아직 아이의 단계에서의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좀 더 커가면서 ”나라는 행위의 주체감, 에고“

가 생기게 되면 또한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게 된다. 에고는 진화의 한 발달 단계이다. 동식물에서는 에고가 없으므로 진화가 더딜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에고가 생김으로써 진화에 박차가 가해진다.

 

그럼 바바는 왜 다르마, 법을 본성(Nature)이라 했을까?

인간이 본능적 욕망을 따르는 것과 원래의 근원, 참나를 돌아가는 것은 동일한 nature이다. 다만 본능을 따르는 것은 반응이므로 쉽다.

그러나 다르마, 원래의 근원(Home)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가듯 counter-nature, 진정한 Nature이므로 에고의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바로 수행이고 물질성을 거슬러 가야 하므로 어려운 일이다.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약간의 양자 역학의 상식으로 개인의 의지란

양자역학의 양면성인 파동성과 입자성에서 의식을 보내면 파동이 입자로 바뀌는 현상처럼 계속된 의식의 집중으로 의도, 즉 생각을 보낸다는 것이 의지의 역할이 아닐는지?

그럼으로써 마침내 에고의 역할이 끝나고 다음 단계의 초월적 변형(진인사대천명)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휴우! 노력은 하지 않고 이렇게 해석과 분석만 하는 나의 에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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