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는 의식은 삶이라는 연극 무대를 비추는 조명등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뿌류샤, 의식은 그저 환하게 비추면서 방향을 보여준다.
의식(뿌류샤)과 에너지(쁘라끄르띠)는 하나이지만 의식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않고 삶이라는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역할을 수행하는 에너지는 의식이 없으면 발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의식은 에너지를 일어나게 하는 동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의식이 바로 모든 사건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오감이 작동할 수 있는 근원도 의식이고
생각, 감정, 행위, 망상조차 의식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래서 바바는 역할을 수행하는 에너지는 삶이라는 연극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고 말한다.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잠든 상태라는 세 가지 상태가 있다.
이 상태에서 작용 반작용, 인과를 짊어지게 된다.
의식이 깨어있으면 에너지가 방향을 확실하게 안다.
그래서 깨어있는 의식 상태를 우리는 양심이라고 부른다.
한편 의식이 잠들어 있으면 어떤 행위도 일어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는 깨어있을 때와 같이 순수하다.
그러나 의식이 꿈꾸고 있으면 에너지는 방향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좌충우돌하고 습관, 무지에 빠져있다.
성경에 예수님이 잡혀가서 십자가를 질 때 베드로는 같이 잡혀갈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한다. 그것은 생존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에 이끌려가는 꿈꾸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알고 풀어주고자 하는데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치는 유대인들을 보고 “하느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옵나이다.” 고 하는 것은 바로 꿈꾸는 의식 상태, 바로 무지, 탐욕, 분노에 휩싸인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주 “깨어나라”고 말씀하시고 붓다도 깨어남, 바라봄, 통찰을 강조하고 있다.
바바의 프상에서는 1번부터 “더는 아픔을 참을 수 없어요. 빠라마 뿌류샤여, 나를 잠에서 깨워주세요.”라고 노래하고 있다.
프상의 많은 노래 중에는 깊이 잠든 나, 졸고 있는 나를 깨워주라는 하소연이많다. 그리고 ’프라밧 상기타, 새벽의 노래‘라는 제목은 ’새벽이 왔으니 깊은 잠에서 일어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완전한 깨어남이란 ’깨어있는 의식‘, 즉 양심이 살아나서 마찰과 투쟁을 통해 잠들어 있는 습관과 관성(삼스카라), 욕구를 소멸하는 해방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