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가슴으로
요사이 참 뒤숭숭하고 꿈자리가 몹시 어수선하다.
오늘 새벽만 해도 여럿이 어딘가 빠져나가야 하는데 승차 매표소같은 데서 티켓 구매비를 도저히 계산할 수가 없어서 좌절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나는 나름대로 꿈의 상징을 풀어보았다.
아, 어쩌면 나는 지성(?)에 의존하여 계산하여 예측하다가 인생을 다 낭비하고 만 것이 아닐까?
요새 유달리 추위를 타는 것도
춥고 배고픈 이들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에 내가 추운 경험을 해보아야만 하지 않았을까?
나는 잠시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나는 성향상 가슴의 사랑보다는 머리의 지성이 먼저 작용하곤 한다.
거품과 먼지 같은 나,
먼지의 지성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계산만 해왔을까?
어쩌면 꿈에서처럼 지성적 계산이 미치지 못한 곳, 사랑과 은총만이 작용하는 곳으로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한 것은 지성을 우선시하는 버릇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러다 나의 성향에 대해 잠시 연민이 왔다.
내가 자신의 생존에만 집착하고 주변에 무관심한 것은
유전적, 환경적 요소였다.
아마 아기 때, 지극히 약하고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던 경험으로
겨우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나라는 개체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던 셈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생존 방식을 갖는다.
이것은 정신적 성향에 의한 물질적 몸이라는 옷, 즉 삼스카라이다.
담쟁이 넝쿨은 큰 나무에 기대서 살아남고, 열대에서나 한대에서나 살아남는 동식물은 나름대로 각자 방식이 있는 법이다.
아마 이런 인류 진화의 여정에서 ‘나’라고 하는 몸과 마음은 이 방식으로
머리를 사용하여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
몸과 마음은 환영이라는 이 현상 세계를 유지하는 biological machine이라고
바바는 말씀하였다.
바쟌에서 “I am that I am, I neither body nor mind, Eternal Self I am”이라 노래한 것처럼 현상계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바로 “I AM(나는 존재한다(Cosmic Mind, 대우주심)”이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사랑 자체인 대우주심으로 마음을 확장해가는 여정을 힘겹게 가고 있는, 한 개체심,unit mind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지성적으로 끝없이 분별만 하는 듯하다.
‘모두가 사랑이고 하나이다’라는 키르탄만 하면 끝인 것을
아, 내게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은 가장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