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악기는 텅 비어 있다.
목관 악기나 금관악기는 숨으로 조절하며 구멍을 통과한다.
바이얼린 같은 현악기는 텅 빔을 얇은 나무 판으로 막아놓고 있다.
뚫린 구멍을 줄이 지나가고 활이 줄을 마찰함으로써 연주를 한다.
건반악기는 손으로 두들겨서 텅 빔을 진동시킨다.
북 같은 둔탁한 타악기는 큰 구멍이 없어 정묘한 멜로디를 연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미세한 구멍을 통해 진동한다.
인간이라는 악기도 전부 구멍이다.
눈, 귀, 코, 입, 피부, 항문 그 모든 구멍을 통해 삶을 연주한다.
궁극적으로 무한의식이라는 텅빔이자 가득찬 공이 구멍을 통해 춤추는 것이
삶이라는 노래이다.
육체는 바로 외부와 내면의식과의 교환의 도구이며 그 역동성이 삶이라는 연주의 악기이다.
가득찬 텅빔이 알 수 없는 주님(?)의 마법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형상의 세상이 라는 시물레이션이 만들어지고 그 연주가 바로 삶이 아닐까?
우리는 본래 무한의식(공)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형상의 세상에서 그만 길을 잃고 개체로서의 에고가 바로 나라는 착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개체로서의 에고는 자신만의 성향에 의한 욕구(삼스카라)을 갖게 되고
그 욕구의 춤이 이렇게 다채로운 색깔의 세상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욕망과 두려움은 언제나 같이 있다.
욕망이 큰 만큼 두려움도 크다.
욕망과 두려움은 하나이므로
욕망이 사라지면 두려움도 사라질 것인가?
불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시간, 공간, 인간에 갇힌 이 현상 세계는 생노병사, 관계,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두려움으로 인해 고통을 피하고 자신의 존재를 편안하게 유지하려는 욕망과 집착이 생긴다.
그 집착은 반작용으로 두려움을 숨기고 있다.
적자생존으로 물질을 위주로 하는 세상에서는 주로 두려움을 먹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자칫 종교나 정치, 사회는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유지해 나간다.
사실 가장 긍극적인 두려움으로는 개체로서 존재가 사라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뿌리깊을 것이다.
자신이 물질적 몸과 마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개체가 사라지는 것(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형상의 세상에서는 형상의 사라짐, 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자신의 존재가 형상 너머에 있는 무한의식, 즉 텅 비고 가득 찬 공이 자신의 근원이자 본성이라는 자각이 분명해질 때라야만
우리의 삶은 두려움이 아니라 환희의 춤이 된다.
말하자면 몸은 악기이고 마음은 연주자이지만 악기 속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삶의 멋진 연주자가 되지 않을까?
그럴 때는 사실 욕망은 삶의 필수적인 연주자이므로
굳이 욕망을 놓고자 애쓸 것도 없다.
욕망 또한 주님의 마음이자 몸, 악기이자 연주자가 되므로 삶이라는 멋진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