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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발자취

梁氏개국신화

작성자양소유|작성시간07.08.11|조회수393 목록 댓글 0


제주양씨濟州梁氏의 기원

시조강생사적과 개국신화를 보면 제주양씨濟州梁氏의 기원은 단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군檀君은 4,339년전 평안북도 영변군 소재 태백산(묘향산) 박달나무 아래에서 탄생하여 평양에 개국하였고, 제주양씨의 시조인 양을나良乙那는 단군과 때를 같이 하여 제주도 한라산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에서 탄강하여 탁라국(탐라국)을 창건하였으며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서기 938년이 되는 고려 태조 21년에 이르기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

그러므로 양씨는 신라 6성 이전에 이 땅에 자리잡은 왕손이며 가장 역사를 길게 갖는 토족이다. 또한 양씨는 모두가 탐라국 삼성혈 신화의 양을나를 단일 시조로 하는 동계혈족이다.시조 양을나왕은 한라산 북녘 기슭에 있는 모흥혈에서 땅으로 부터 솟아 나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시조는 지신족地神族에 속한다고 한다.

이 때 모흥혈 세 구멍에서 차례로 각각 한 분씩 나오셨다고 하는데 그 맏이가 우리 양씨梁氏의 시조 양을나良乙那이시고 둘째가 고씨시조高氏始祖 고을나高乙那이시며 셋째가 부씨시조夫氏始祖 부을나夫乙那이시다. 그러므로 그 뒤로 부터 이 곳을 삼성혈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모흥혈이라는 모毛자도 셋 건너 긋고 새을乙자를 한 글자로서 삼을나三乙那라는 뜻으로 모毛자를 썼다고 하며 삼성三姓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모흥혈毛興穴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탐라지와 탐라기년에 기록되어 있다.

 

 

▲ 소유의 다섯 남매의 삼성혈 방문. 2005.10.09

삼성혈三姓穴 신화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地, 단종端宗 2년 1454년 간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탐라현耽羅縣은 제주도 남쪽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지금 진산鎭山 : 한라산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니, 이것이 그 땅이다) 맏이를 양을라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라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빛 진흙으로 봉인한 목함木函이 동해빈東海濱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쪽빛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해西海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계셔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으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가 사시복지射矢卜地하니, 양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했으며, 부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세종 32년(1450년)에 간행된 영주지瀛洲誌에 실린 삼성신화三姓神話가 있다. 실린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와 거의 같으나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① ‘탐라'를 ‘영주瀛洲’ 라 하였다.
② 세 처녀와 사자가 온 나라 ‘일본국’을 ‘동해(東海碧浪國)’ 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제주목건치연혁조濟州牧建置沿革條에 의하면 처음에 양을나良乙那 · 고을나高乙那 · 부을나夫乙那라 일컫는 세 사람이 그 당을 나누어 살았다고 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면서 살았는데 하루는 동쪽으로부터 이상한 상자가 바다 위로 떠내려와 이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세 미녀와 오곡의 씨앗 그리고 망아지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사람은 세 미녀를 각각 배필로 맞아 제주濟州 · 대정大靜 · 정의旌義 세 지역에서 목축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로부터 탐라는 날로 융성해졌다고 한다. 이것이 탐라의 개국신화로 전해 오는 이야기인데, 이들 심신인三神人, 즉 양을나는 양씨(良氏 : 뒤에 梁氏로 개성)의 시조, 고을나는 고씨의 시조, 부을나는 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섬성혈의 구멍 속에는 빗물이나 눈이 고이지 않는다고 하며, 주위에 수령 500여 년 이상의 노송들과 녹나무 · 조록나무 등 수십 종의 고목이 울창하게 서 있는데 나무들이 거의 이 구멍을 향하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良을 梁양으로 고친 역사적 배경

양을나를 유일시조로 하는 梁씨는 관향貫鄕이 70여본으로 되어 있으나 이 모두가 제주, 남원, 충주 삼관三貫의 지파支派이며 제주濟州에서 분적分籍되어 간 것이다. 梁씨는 크게 나누어 정통을 이어 온 제주(=제량濟梁)와 육지의 梁씨(=육량陸梁)로 대별된다. 육량계가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梁씨는 4만 138가구에 인구 22만 5772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 25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8만 1124가구에 인구 34만 3985명으로 성별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 25위였다.

모든 梁氏는 탐라의 양을나를 유일조唯一祖로 하는 동계혈족이며 본래는 良姓을 쓰다가 신라 때 梁으로 개성改姓,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良과 梁 두가지로 쓰여 왔으나 고향에 남아 있는 제량濟梁은 오래도록 良으로 칭한데 반해 일찍 육지로 이주한 육량陸梁이 먼저 梁으로 바뀌었다.

良씨가 처음으로 梁씨로 바뀌기는 신라 제17대 내물왕 때인 서기 374년의 일이었다. 당시 탐라의 양탕良宕이 신라에 들어가 광순사廣巡使가 되었고 뒤에 많은 작록을 받았는데 이때 개성改姓, 梁씨로 고쳤다고 한다.

또한 양순梁洵이 682년(신문왕 2년)에 신라에 들어가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이 본관을 제주로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년)에 양우량梁友諒이 남원부백南原府白에 봉해졌으므로 제주에서 갈라져 남원으로 한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시작되었다. 즉, 이때부터 제주와 남원의 두 본이 생겼고, 뒤에 충주가 분관되어 3적三籍으로 나누어졌다.

1985년 현재 梁씨의 인구수는 총 29개의 본관에 34만 3985명이고 그중 남원양씨가 21만 9911명이고, 남원양씨 중에서는 병부공파가 약 80%를 차지한다. 제주양씨는 11만 3419명이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소유가 속한 제주양씨濟州梁氏의 중시조中始祖는 양순梁洵이다. 제주양씨濟州梁氏의 인구수는 1985년 11만 3419명, 2000년 통계청 자료로는 13만 3355명이다.

차례 / 본관本貫 / 파派 / 파조派祖 / 관작官爵 / 집성지

(1) 제주 / 성주공파 / 양구미梁龜美 / 집성지는 제주도 지역이다

(2) 제주 / 유격공파 / 양보숭梁保崇 / 고려 명종조(1131~1202) 유격장군 / 집성지는 전라남도 지역이다 - 소유는 유격공파에 속한다

(3) 남원 / 병부공파 / 양능양梁能讓 / 976년 고려 경종 1년 봉사를 지낼 때 宋나라에 들어가 國子監에서 金行成과 같이 典禮와 經義를 講하고 賓貢科에 급제, 귀국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영재육성에 공헌하였으며, 성종때 中奉大夫에 책록되고 兵部 郞中을 거처 東宮 內 侍講學士 역임 / 집성지는 남원 진안 장수 서울 경기 지역이다

(4) 남원 / 용성군파 / 양주운梁朱雲 / 고려 원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중윤에 이르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정주의주를 갖고 와서 널리 포교하는데 공을 세움. 찬화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고 정당문학에 관직이 올랐으며 용성부원군에 봉해짐 / 집성지는 경남 함양 전라남북도 지역이다

(5) 남원 / 대방군파 / 양수정梁水精 / 고려때 공을 세워 대방 부원군帶方 府院君에 봉해짐 / 집성지는 진주 서부 남부지역 진주 창원 고성 남해 하동 산청 함양 남원

(6) 충주 / 예성군파 / 양능길梁能吉 / 고려 건국 때의 무인. 고려의 후삼국 통일시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대장군이 되어 국가의 대업을 이룩하여 그 공훈이 일세에 빛나므로 예성군에 봉하고 예성(충주)을 본관으로 삼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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