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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임자도의 옛이름

작성자canada|작성시간08.10.16|조회수16 목록 댓글 0

임자도는 현재까지 세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개요지도,임치도,임자도가 그것이다.
  백제시대에는  개요지도(開要只島)라고 불렸다. 이후 고려 중기까지 개야소도(開也召島) 또는 가야소도(伽倻召島)라고도 불리고 있다가 고려 후기들어 임치도로 바뀌었으며 조선 숙종때 이르러서야  오늘의 이름인 임자도가 되었다.
 임자면은 백제시대에는 고록지현이라 불렸다. 한편으로는 개요현이라고도 불렸다. '고록지'는 오늘날의 가락지라는 말이다. 낙월도,안마도,송이도,임자도,재원도,노리기 섬이 가락지 모양처럼 둥글게 늘어서 있어 가락지현이라 불리게 된것이다. 고록지현은 신라시대에는 염해현으로 개정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치현으로 불렸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야 임자면이 된다.       

 삼국사기 권 제 37지리 4 백제조에는  [古祿只縣(一云 開要)]라고 하여 고록지현이 개요현으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임치현에는 북사자도(北師子島),남사자도(南師子島),개요지도(開要只島),마지도( 知島)가 소속되어 있었다.
  -출전: 섬으로 흐르는 역사

 


2. 임치현의 현청소재지


  임치현의 현청 소재지는 임자면 장동 일대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해준 전목포대교수는 각종 그의 논저에서 장동(長洞) 일대에 임치현의 치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곳에 고읍지가 있었다는 구전내용,장동 앞의 넓은 들판이 생산력을 뒷받침하였을 것이라는 점,대둔산 성지(大屯山 城址)도 임치현지와 관련된 유적일 수 있다는 점 등을  논거로 하고 있다.그러나 이 중 장동앞 들판 문제는 배제해야 한다.장동앞의 들판은 조선 중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해지(海地)였으나 그 후 주민들이 간척 사업을 벌여 만든 농토이기 때문이다.
  위의 논지에 다른 몇가지를 추가한다.
  첫째 장동은 지리적으로 임치도와 장포만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장포만의 지형은 말굽자석과 같이 생겼으며 말굽자석의 가장 오목한 곳에  장동이 소재하고 있다.만의 좌우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장동을 거쳐야 했다.이는 장동이 지형적 정중앙일 뿐만아니라 통행상의 필수지점이라는 말이다.장동은 통치의 맥점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 장동 뒤 불갑산 계곡(주1)에 고려시대의 사찰 유지와 회산 뒷산 밭(주2)에서 고려시대  민간 가옥 유지가 있고 기와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정유재란 이후 형성된 장동과 회산부락민들이 대대로 "이들이 어떤 집터였는가 ?"하고 궁금해왔다.이는 그 유지가  장동 회산의 최초 거주자들도 알 수 없는 시점에 있던 건물터라는 것을 의미한다.즉 정유재란 피난민들이 수백년간 무인도였던 섬에 들어와 보니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절과 기와집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이스터 섬의 석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였을 것이다.이는 이곳에 집단으로 모여 살던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 의해서인지  모두 한꺼번에 떠나가버려 역사적 공백 현상이 생겼다는 말이다.
  장동 뒤 불갑산 기와집 유지는 사찰터가 될 수 밖에 없고 회산뒤 집터는 민간용 가옥 터일 수 밖에 없다.그다지 크지 않은 섬 통행의 요지에 있는 사찰과 민간용 기와집은 그 일대가 주민 밀집지임과 종교 중심지였음을 말한다.장동 일대가 임치현의 치소이고 기와집 터자리가 바로 현청사 건물 자리로 추정되는 것이다.

임치현청사와 사찰은 고려말 삼별초의 난 당시 주민들이 영광 내륙으로 강제 이주됨에 따라 폐허가 되었다. 임자도는 조선조 주민 재입도 시기까지 170여 년 간의 무인도 시절 풍우에 시달리다 퇴락하여 기와 조각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정유재란 이후 장동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들은 이 기와집 터가 어떠한 곳인지 알지 못한 채 널려있는 기와 조각을 절구로 가루 내어 놋그릇 닦는 세제로나 썼다.
  현청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임치현 사람들은 김,황,박,양,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주3)이었다.그들은 불갑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을 중심으로 부처님을 모시며 농경과 어로,제염업을 주업으로 하여 생활을 해 나갔다.당시 임치현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사찰은 어떠한 절이었을까 ? 당시 임자도 주변의 주민들은 매향(埋香)이라는 풍습(주4)을 갖고 있었다.매향이란 향을 땅에 묻는 불교 의식이다.그들은 향을 땅에 묻으며 그를 매개체로 하여 자신들의 소망이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였다.이로 볼 때 당시의 임치현민들 역시 구복적 성격이 강한 미륵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전 : 섬으로 흐르는 역사

 

주1 장동 뒤 불갑산 큰골 곽씨 선산 아래.유지의 면적은 300-400평 정도.
주2 회산 뒤 김해 허씨 선산옆 서쪽
주3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따르면 임치현의 토성은 李,金,黃,朴,陳씨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영광군 고적 임치폐현 조에 따르면 임치폐현의
    토성은 金,黃,朴,楊,李씨이다.
주4 임자도 부근 매향지로 영광군 법성면 입암리 고법성 마을과 장산도에서 埋香
    遺地가 발견되었다.불교에서 구전되는 바로는 매향의 최적지는 산곡수와 해수
    가 만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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