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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趙의 氣質>>
***대구화수회보 창간호에 실린 글이지만, 우리 동기들 중 함안조씨(안덕조가 물조가...)가 많아서 한번쯤 참고가 될 듯해서 소개합니다***
'함안 조씨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두뇌가 영민하지만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여러해 전 경북 안동에서 지역 유지들과 저녁 자리를 함께 했을 때의 일이다. 명문거족이 많은 안동지역답게 자연스레 문중과 혼반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때 선배 기자가 우스갯소리 삼아 내게 던진 말이다.
'남 앞에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는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필자는 종친 모임이나 문중 관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말이 떠올라 혼자 웃곤 한다. 곱씹을수록 우리 함조(咸趙)의 기질과 특성을 그런대로 함축성있게 표현한 것 같아서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말은 우리 선조들 가운데 문무(文武)를 겸비한 충신.열사가 많았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시조 정(鼎) 할아버지가 고려 원윤(元尹) 대장군이었으며, 그 아드님 간(幹)이 중랑장, 증손 시우(時雨)가 오위도영장을 지내는 등 고려시대 초기부터 무관을 지낸 조상이 적지 않았다.
조선 단종때 생육신인 정절공(貞節公) 여(旅)의 큰아드님인 동호(銅虎)는 진사시에 합격해 내외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무예에 능했으며, 손자인 내헌공(耐軒公) 연(淵)의 장손 (우)도 문무를 겸했다.
내헌공의 증손 형도(亨道)는 함안향시에 장원을 한 청년유생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 곽재우 장군 진영에서 왜군과 싸웠으며 무과에 다시 급제했다. 국난을 맞아서는 붓을 거두고 검을 들었던 것이다. 응도(凝道).계선(繼先).선도(善道)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무신이다.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는 표현은 고려 공민왕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열자 두문동에 기거하며 절개를 지킨 열(悅) 선조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한 생육신(生六臣) 여(旅) 중시조(中始祖) 이후 선조들의 행적을 빗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의 개국에 불사이군(不事二君)하여 이방원(태종)의 회유를 물리쳤으며 수양대군(세조)의 서슬푸른 권세에 항거했으니 일족의 처신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중용지도(中庸之道)를 몸소 실천했던 선조들의 행장을 돌이켜 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두뇌가 영민하다'는 것이야 새삼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동호(銅虎) 선조의 경우만 봐도 일곱 아드님 중 첫째 舜(순)과 셋째 參(삼).네째 績(적) 등 3형제분이 문과에 올랐고, 여섯째 騫(건)은 무과에, 막내 아드님 淵(연)은 정암(靜庵) 조광조와 동방진사(同榜進士.함께 급제해 방목에 같이 적힘)가 돼 가문의 명성을 조야(朝野)에 떨치지 않았던가.
함조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숭고한 가문의 혈통을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우리 함안 조문은 높은 벼슬을 많이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동조(同祖) 일문(一門)에 13충(忠)을 낳은 충효대절의 가문으로 타문.타족.타성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실록을 남기고 있다.
어계(漁溪) 여(旅) 선조이후 6대(代)에 걸쳐 수천(壽千)이 중종반정에 참여한 정국(靖國)공신이었으며, 익도(益道)는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다. 붕(鵬).종도(宗道).신도(信道).민도(敏道).준남(俊男).응도(凝道)는 임진.정유 양란에 왜군과 싸우거나 왕을 호위 종군하다 전사 또는 순절했고, 계선(繼先)은 호란때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탄(坦).방( ) 형제는 화왕산성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쳤으며, 선도(善道)도 안현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형도(亨道)는 병자호란때 칠순 고령으로 근왕(勤王)하다가 병사했다.
함안조씨십삼충록(咸安趙氏十三忠錄) 서문에서 당시 이조판서 홍양호(洪良浩)가 "한 문중에서 절의 교화가 이처럼 영화롭게 치우쳐 나타남은 참으로 놀랍고 감탄할 만한 일"이라며 "삼가 이들의 관직(官職)과 명자(名字).사적(事蹟) 등을 서술하고 책을 만들어 국사(國史)의 참고로 삼는다"고 했을 정도다. 왜란과 호란을 비롯한 국난의 고비마다 떨치고 일어나 견위치명(見危致命)했던 선조가 많았음은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불의와 외세에 굴하지 않고 학문을 숭상했던 가문의 혈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대만에서 일본 왕족(육군특명검열사)에게 폭탄을 던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립투사 명하(明河), 대한민국 임시정부의장을 지낸 선각자로 해방후에는 남북협상에 앞장섰던 소앙(素昻. 본명은 鏞殷.전 국회의원),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떨치다 애석하게도 요절한 영래(英來) 등....
명종때 의금부 경력을 지낸 내헌공 연(淵)은 전서.예서.잡체에 두루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일컬어졌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전원에 묻혀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몰두하던 임도(任道.인조반정후 공조좌랑)와 영조때 문과에 급제해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중회(重晦)는 성품이 강직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선비였다.
우리 국문학계의 큰 별이었던 국문학자 윤제(潤濟)와 문학평론가 연현(演鉉), 우리 근.현대사를 역동적으로 그린 불후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아리랑'.'한강' 등을 남긴 작가 정래(廷來)도 가문의 큰 자랑이다. 선조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웅숭깊은 문장을 이어받았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선조들은 '양반'으로서의 권세와 지위를 모색하기 보다는 '선비적인 삶'을 추구해 왔다. TV 사극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유명세를 가진 조상은 없지만, 이 나라 역사에 우리 함조(咸趙)가 남긴 자취가 결코 부끄럽지 않았음이 자랑스럽다.
대구화수회보 창간에 즈음하여 대대로 절의(節義)를 중하게 여겨온 우리 가문의 좌우명 '백세청풍'(百世淸風)을 되새기면서 그 후손된 도리와 삶을 함께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趙 珦 來(매일신문 기자.南浦公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