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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의 文化와 歷史

안동의 대가세족 : 문화귀족의 정립을 중심으로

작성자고향생각|작성시간11.10.16|조회수166 목록 댓글 0

안동학연구 1집
안동의 대가세족 : 문화귀족의 정립을 중심으로


川島藤也
조선시대에 있어 국가와 사회의 관계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종속적인 지역사회를 중앙정부가 행정적으로 통제한다는 교과서적인 서술 자체만으로는 조선시대의 지역사회를 유교사회 공동체로 변환시킨 대가와 세족들의 역할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숙한 유교사회 속에서 어떻게 대가세족들이 발전되었으며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또한 지방에 사는 그들이 어떻게 관료적 국가권력과 권위에 대처했을까? 여기에 대하여 본고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주장할 것인데, 첫째는 그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공동체 윤리를 통하여 문화귀족이 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유교적 문화공동체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안동의 역사는 문화귀족과(또는) 관료적 귀족계층의 역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지금까지 유교국가와 지역사회의 관계에 대한 몇몇 패러다임이 제시되었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유교국가 모델인데, 이것은 유교율법적 전제주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동양적 전제정치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모델은 군주와 그의 신하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중앙 집권화된 정부와 관료적 위계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모델에서는 국가의 관료적 위계질서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지역사회의 정치 사회적 위계질서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주된 관심은 국가제도에 맞추어져 있으며 지역사회는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주변적 위치로서 인식된다. 오늘날 많은 한국학자들은 지역사회보다 국가를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역의 다양성보다는 국가적 통합을 더 중요시한다. 그들은 다양한 지역적 이해보다는 국가의 존속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근대국가의 이념에서는 국가의 권위를 지역사회와 그 주민에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1)
하지만 유교주의적 국가모델로는 관료적 위계질서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그것과 얽혀서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는 문화귀족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향안 연구를 통하여 공식적인 유교질서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비공식적인 귀족질서 사이에 어느 정도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2) 공식적인 유교질서는 성취지향 속성에 의한 사회 정치적 위계질서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학문, 공적, 도덕적 품행 등이 포함된다. 반면 비공식적인 귀족질서란 귀속적 속성에 의한 사회-정치적 위계질서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출생, 결혼, 그리고 출신지역이 포함된다. 두 가지 질서는 항상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군주제 하에서 서로 중복되는 면도 없지 않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두 질서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독특한 조선시대의 국가-사회 관계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황제가 절대적인 존재였으므로 귀족적인 “대가”는 소멸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관료들과 벼슬을 받은 학자들로 대체되게 된다. 한국에서는 왕이라도 중국에 대해서는 신하의 한 사람에 불과했으며, 귀족출신의 대신들에게 있어서 왕은 본질적으로 동등한 자격의 사람들 중 가장 윗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 불과한 존재였다. 따라서 조선조 때에는 대가들이 계속해서 중앙관료조직의 공식적인 조직과 비공식적인 조직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필자는 먼저 대가와 세족들을 정의해 보려고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가는 특정지역의 세족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고, 본 논문에서 필자는 그들을 상호 교체하여 사용할 수 있는, 즉 하이펀을 사용하는 용어로써 사용할 것이다. 그들은 세가지 속성을 공유한다. 첫째, 그들은 그들의 시조를 신라나 고려시대의 귀족이나 공신으로 삼고 있고, 조선초나 중기에 높은 관직을 역임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 높은 관직은 종종 경제적 부와 번영을 뜻하며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부와 권력은 성숙한 유교사회인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지위를 결정지워주는 궁극적 요인은 되지 못하
였다. 둘째, 그들은 그들 지역사회 안팎에서 명문 양반가를 연결하는 광범위한 혼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그들은 그들 가문에서 학자들을 배출하여 가족내의 공동체적 질서와 가문 및 지역사회를 이끌었으며 유교윤리에 바탕을 둔 도덕적이고 위계질서가 잡힌 지역사회를 창출하였다. 지역주민들에게 그들을 내앞 김씨, 하회 유씨등 그들의 성과 함께 그들이 거주하는 마을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역사회 밖에서는 성과 본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가는 반드시 권세가 있거나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특정지역에서 학자-관리의 생활양식을 여러 대에 걸쳐서 지켜온 몇몇 집안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안동지역에서는 누가 대가이고 세족일까? 우리가 그들을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필자는 향안이라 불리는 지방 양반들의 기록이 그들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은 믿을만한 문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향안의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속성상 모든 양반들을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니고 기록의 원본이 항상 현존해 있는 것도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안동에서는 16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세 개의 향안이 현존하는데 다음과 같다:1589년의 향안은 기축 좌목(선조 22년)이란 제목이 붙어있고, 1615년의 것은 향록 초안(광해군 7년), 그리고 1647년의 것은 향록(인조 25년)이란 제목이 각각 붙어 있다. 이 기록들은 조선중기와 후기의 안동지역 양반들과 그 가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기록된 사람들의 족보는 그들의 기원, 발달과 함께 안동의 대가세족들의 구성에 관한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그밖에 지방관보, 문학작품, 왕조실록 등의 추가자료들을 참고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안동의 향안에 등록되어 있을까? 그들은 안동지역의 주요 명문가문출신들이다. 부록 1에 있는 바와 같이 34개의 성씨와 51개의 가문이 보인다.
3) 가장 두드러진 가문으로는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의성 김씨, 풍산 김씨, 순천 김씨, 광산 김씨, 예안 이씨, 전주 이씨, 진성 이씨, 고성 이씨, 풍산 유씨, 전주 유씨, 청주 정씨, 동래 정씨, 영양 남씨, 흥해 배씨, 반남 박씨, 영해 박씨, 순흥 안씨, 광주 안씨, 아주 신씨, 봉화 금씨, 원주 변씨 등이 있다. 이러한 가문에 속한 집안들은 안동 거주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혼처로서 적합한 가문으로 여겨졌다.
안동 권씨와 안동 김씨는 고려초에 활동하였던 걸출한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권행과 김선평이 그들인데, 그들은 후백제의 견훤과의 전쟁에서 고려 태조를 도와 태조가 안동지역에서 승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4) 안동 및 그 주변지역에 근거를 둔 다른 명문가문으로는 풍산 유씨, 풍산 김씨, 의성 김씨, 예안 이씨, 진성 이씨, 고성 이씨, 일직 손씨, 영양 남씨, 영해 박씨가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고려조의 호장(촌장)출신이었는데, 풍산 유씨, 예안 김씨가 여기에 속하고, 그 밖에 고려의 관리출신으로서 1398년의 이방원(조선 태종)의 난과 같은 중앙의 정쟁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신한 사람들과, 관직에서 은퇴하여 친척들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 안동으로 온 사람들이 있었다.
5) 하지만 이 가문들은 훗날 모두 새로운
조선왕조에서 관리들을 배출하게 된다. 외지로부터 안동에 들어오는 세족들의 경우에는 잘 알려져 있는 안동지방의 세족들과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는 등 순수한 양반가문으로 확인되는 경우에만 지방 향안에 등록할 수 있었다.
이 가문들은 그들의 지방에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생활양식을 보존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광범위한 혼인맥인 과갈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종의 제도적인 반응이었다. 과갈은 그들 가문의 재산과 학자-관리의 전통을 보존함으로써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조상숭배를 계속하면서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수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었다. 과갈은 또한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훌륭한 부계, 모계 및 배우자 가문의 혈통을 중시하는 사상에서 발생하였다. 그들은 순수하고 훌륭한 친인척 관계를 보존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집안과 대등한 가문들과만 혼인을 하였다. 안동의 명문가들이 현재가 아니라면 과거에라도 친인척 관계로서 서로 맺어져 있다는 것이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마을을 지배하는 세족은 그 마을 밖의 다른 세족과 혼인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마을이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거나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는 경우라도 그러하였다.
일직 마을의 영양 남씨를 예로 들어보자. 이 세족은 중국 당나라로부터 일본으로 가던 사신인 김충(金忠)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755년 영해의 한 해안에 난파하여 영양지방에 살게 되었는데, 후에 신라 경덕왕(742-764)으로부터 남씨성(남쪽에서 온 사람이란 뜻)을 하사 받게 된다. 14세기에 이르러, 후에 전리의 벼슬에 오르는 무신출신의 남휘주(1326-73)는 안동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의 아들 민생은 무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민생에게는 다섯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그의 아들들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군대와 지방행정조직에서 중급관료직을 수행하였다.
6) 그의 아들중의 하나인 의량은 안동 동문 옆의 집을 상속받았는데, 그 집은 오늘날에도 철길 옆에 남아 있다. 그는 그 집을 자신의 세 번째 아들인 지정(1427-82)에게 물려주었다. 지정에게는 하급 무반 벼슬과 외관직에서 일을 하던 세 아들과 딸이 하나 있었다. 그는 다시 그 집을 한양 본관의 조순과 결혼한 하나 뿐인 딸에게 물려주었다. 부유하였던 조순은 그 집을 그와 인척관계에 있던 의성김씨 김용에게 주었다.
7) 조순은 그가 가지고 있던 다른 집 한 채를 청풍현감이었던 고성이씨 이고와 혼인한 그의 손녀딸에게 물려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고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집을 대구서씨 서해와 결혼한 그의 딸에게 물려주었다. 이 집은 소호헌이라 불리는데 국가 문화재로서 일직지방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
8) 김용과 이고는 1589년 안동 향안에 등재되어 있다. 안동 향안에 올라있는 영양 남씨는 안동의 많은 주요 세족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흥해 배씨, 진성 이씨, 안동 권씨, 의성 김씨, 전주 유씨, 동래 정씨, 단양 유씨, 진주 하씨, 순천 장씨, 아주 신씨, 순천 김씨, 한산 이씨 등이 그들이다.
9)
1765년에 발간된 영양 남씨 족보는 이 가문이 어떻게 안동의 다른 명문가문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일례로 15세기 중엽에 하급 무관직에 있던 남정귀의 계보를 조사해 보자.
정귀의 딸은 영해 신씨 신명창과 혼인을 하였고 명창의 딸은 의성 김씨 김예범과 혼인했는데 모두 안동지방의 유명한 양반가문들이었다. 족보는 계속해서 김예범의 부계 쪽 뿐만 아니라 비 부계 쪽의 후손들에 관해서도 자세히 보여주는데, 안동출신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진성 이씨 이봉춘, 의성 김씨 김성일, 풍산 김씨 김응조 등이 그들이며 이들은 1589년과 1615년의 향안에 각각 등재되어 있다.
10)
특정한 마을에 정착하여 대가가 된 양반들은 인근마을의 비슷한 배경을 가진 가문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알만실에 처음으로 정착한 영양 남씨는 남처곤(1462-1520)이었는데 그는 하급 무관직 출신이었다. 그의 손자인 응원은 1589년에 향안에 등재되어 있다. 그의 두 아들인 흥달과 융달은 그의 아버지와 같은 해에 등재되어 있다. 흥달의 네 아들은 1615년과 1647년 두 번에 걸쳐 등재되어 있으며, 그들 중 두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였다. 반면 융달은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들도 또한 1615년과 1647년에 등재되었다. 그중 장남인 섭은 과거 문과에 급제한 두 아들이 있었다. 그들 중 장남은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게 된다. 섭의 아들들은 알만실에서 풍산지방의 세터(신안동), 즉 “신 알만실”로 이사하게 된다.
11) 지역주민들은 이 남씨 가문을 알만실 남씨나 세터 남씨라고 부른다. 흥달과 융달 가문은 17세기 초에는 명문가로 부상했다. 알만실의 언덕에는 입향조인 처곤(1520년 사망)과 그의 후손들의 무덤이 있어 그들의 업적을 보여주고 있다.
12)
임하면 내앞고을(천전 또는 천상)의 의성 김씨 입향조는 1477년에 과거에 급제한 김만근이었다. 그는 내앞에 살고있던 부유한 양반가문인 해주 오씨 오계동의 딸과 결혼하면서, 그의 집안이 4대째 살고 있었던 부내를 떠나 내앞으로 이사오게 된다.
13) 15세기 말과 16세기에 걸쳐 내앞 김씨는 안동의 명문 집안들과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만근의 손자대인 진에 이르러, 이 가문은 안동지역에서 훌륭한 학자-관료 집안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내앞에서 태어난 김진은 16세 되던 해에 그의 고모부인 권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재능은 곧 권간의 친척이자 태조의 후손인 민세경의 눈에 띄게 된다. 김진은 민세경의 딸과 혼인하게 되고, 그 당시의 대학자인 민세경의 처삼촌인 민세정에게 소개된다. 그후 그는 152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서울의 학자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하지만 그는 최고단계의 과거시험인 문과시험 응시를 단념하고 고향인 내앞으로 돌아와 그의 다섯 아들인 극일, 수일, 명일, 성일, 복일을 교육하는 데 전념하게 된다.
14)
김진이 안동에 돌아와 그의 아들들을 교육시킨 것은 후에 결실을 보게 되어 세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게 된다. 1546년에 극일, 1568년에 성일, 1570년에 복일이 각각 급제하였다. 나머지 아들들도 1555년에는 수일이 1564년에는 명일이 각각 소과에 급제하였다.
15) 김진은 그의 아들들과 친척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당을 열었다. 그는 또한 그의 고향 내앞의 낙동강이 굽어보이는 곳에 백운정이란 정자를 짓고 여름철 동안 그곳에서 아들들을 가르쳤다.
16) 그의 아들들은 조선시대 유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성일은 벼슬이 당상관에 이르러 조선에서 일본의 히데요시에게 사신을 파견할 때 부사로서 수행하였다. 김진은 그의 아들들에게 서로 다른 마을에서 살도록 유언했다. 장남은 내앞에서 그대로 살았고, 차남은 일직의 구미(서호) 마을에, 삼남은 임하의 신덕 마을에, 사남은 서후의 금계 마을에, 오남은 예천의 초곡 마을에 각각 정착하였다. 김진 자신은 말년에 영양의 청기에서 살았으나 임종은 그의 나이 80세 되던 해에 그의 고향인 내앞에서 맞았다. 그는 그의 유언을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하게 했으나 그 자신은 명문가의 시조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들은 안동의 대가댁에서 혼처를 구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명문가들과 관계하고 있었는데, 하회의 풍산 유씨, 영양 남씨, 예안 이씨, 전주 유씨, 전주 이씨, 진성 이씨, 흥해 배씨, 안동 권씨, 흥덕 장씨, 원주 변씨, 동래 정씨, 순흥 안씨, 부림 홍씨등이 그들이다. 김진의 둘째 아들 수일(1528-83)은 당시 부자였던 조당의 아들인 한양 조씨 조효분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결혼 후에는 처가가 있던 일직의 구미 마을로 가서 살게 된다. 김진의 손자중의 하나인 영은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자학의 대가인 퇴계의 손녀와 결혼하게 되는데, 상속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처가로부터 얼마만큼이나 대단한 상속을 받았던가를 잘 보여준다.
17)
내앞 김씨와 관련된 대가중의 하나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무실마을의 유씨 가문이었다. 16세기초에 이 가문은 무실(수곡동)에 정착했는데, 이곳은 아기산으로부터 발원한 냇물이 마을의 논밭을 지나가는 풍광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1991년 임하댐의 건설로 전체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된다.) 경상도에서 전주 유씨의 역사는 유빈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태종이 왕이 되기 전에 함께 공부하여 같이 소과에 급제하였으며, 왕의 고향인 영흥에서 부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8) 이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의 동창생인 태종을 위해서 관직에 있었으나, 후에 관직에서 물러 나와 영천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그는 왕에게 그의 무덤을 웅장하게 만들 수 있도록 청하였고 왕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정릉으로 불리며 방문객들은 그의 무덤의 크기와 구조를 보고서 왕릉을 떠올리기도 한다.
19) 그의 유언으로 보아 그는 부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375명의 노비가 있었는데, 여섯 명은 자신의 부모의 묘를 관리하게 했고, 11명은 손자들에게 주었으며, 또 다른 11명은 그의 형제자매와 사촌 등의 친척들에게 주었으며, 나머지 노비들은 그의 네 아들들에게 81명부터 92명까지 각각 나누어 주었다.
20) 15세기에 이르러서는 그의 후손들이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에서 일하게 된다. 그의 증손자인 유윤선은 서울에서 영천으로 아주 이사를 오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16세기초에 조정에서 일하면서 만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아들인 송(1533년 출생)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김진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장인이 땅을 가지고 있던 무실로 이사하였다. 송은 젊은 나이인 25세의 나이에 두 아들과 젊은 부인을 남기고 요절했는데, 부인 또한 남편을 잃은 것을 상심하여 음식을 거부하다가 27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21)
송의 장남인 복기(1555년 출생)는 무실의 유씨 집안의 발전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1589년에 향안에 등재되어 있으며 그의 외삼촌인 김성일과 함께 1592-3년 사이에 침략한 왜군에 맞서 싸우면서 의병장으로서의 지도력을 잘 보여주었다.
22) 복기는 후에 서울에서 중급 계급의 관리로써 일을 했으며, 그의 네 아들과 열 명의 손자들은 1615년과 1647년의 향안에 각각 등재되어 있다. 그의 둘째 아들인 득잠은 진보의 이성춘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는 하급 관료로서 일했으며 1589년에 향안에 올라있다. 한편 그의 딸은 전의 이씨 이명원과 결혼했는데 그는 1647년에 향안에 올랐으며 과거의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분재기에 따르면 복기는 98명의 노비와 논 168두락지(4.2헥타 또는 10.4에이커), 밭 65두락지(4.2헥타 또는 10.4에이커), 집 3채를 그의 여섯 아들과 세 명의 사위에게 남겼다.
23) 복기는 또한 그의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1615년에 기양서당을 열었다. 그는 죽은 후 조선초의 그의 조상인 의손과 함께 그곳에 있는 사당에 모셔졌다. 기양 서당은 18세기 중엽에 그의 손자이며 당시의 학자-관료인 유원현이 왕에게 청하여 기양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이후 1871년 대원군 때에 이르러 서당으로 다시 격하되었다.
24) 17세기 중엽에 복기의 손자들과 증손자들은 안동 권씨, 영양 남씨, 단양 우씨, 순흥 안씨, 의성 김씨, 진성 이씨와 같은 안동의 세족들과 인척관계로써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영양 남씨, 의성 김씨, 전주 유씨등 상대적으로 후손이 많은 대가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하지만 대가들은 지역적으로 꼭 규모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성씨로는 대구 서씨가 있는데, 이 가문은 시조를 고려 중기의 서한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말선초에 이르기까지 이 가문에 관한 일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안동의 양반들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대구 서씨 가문의 사람은 해(1537-57)였는데,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서울에 거주하며 벼슬이 판서에까지 올랐던 고의 아들이었다. 그는 안동의 명문가인 고성이 본관인 이고의 딸과 결혼하였다. 해는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기 위하여 충주에서 아내의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오지만 23살의 나이에 요절하게 된다. 그의 아들 성(약봉)(1558-1631)은 일직의 소호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난 집은 외할아버지 이곤이 아버지에게 준 것으로, 이곤은 앞서 언급한 바과 같이 자식이 없었다. 성은 1586년과 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당상관에 올랐으며 충주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경빈(1576년 출생)도 진사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일생을 서울에서 보냈으며 말년에는 안동으로 돌아와서 71세의 나이에 향안에 등록하였다. 그는 그가 머물렀던 소호에서 재산도 물려받았으나, 사후에는 충주에 묻히게 된다. 그의 아들 준리(1604-70)는 지체높은 안동 양반 가문인 풍산 김씨 김영조의 딸과 결혼하지만, 서울에서 살게 된다.
25) 서씨 가문은 안동의 명문 가문들과 밀접한 인척관계를 유지하지만, 18세기 이후에야 안동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 양반들은 소호의 서씨 가문을 지역 유지로써 대우하는데, 이것은 서씨 가문이 안동의 대가댁들과 맺은 인척관계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리고 왜 대가들은 문화귀족을 형성하였으며 안동에 유교문화를 뿌리내리게 만들 수 있었을까? 문화와 권력은 유교사회에 있어서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다. Duara는 문화를 “조직에 스며있는 상징과 규범”으로 정의했으며, 권력의 문화적 관계를 “위계조직과 비공식 관계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권력의 형태학”이라고 규정했었다.
26) 대가와 세족들은 안동지역에서 위계적 행정관료체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었다. 향안과 서원은 지방권력의 상징이자 규범이었다. 마찬가지로 Micho Tanigawa (谷川道雄)는 중국에 있어 지방의 유교 지도자들이 행정관료조직의 지도자와 문화 귀족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방의 지배구조는 도덕적 지식계급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결속을 이루고, 세속적 욕망에 대하여는 자기반성적 지식계급의 윤리를 실행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7)
필자는 Duara의 권력의 문화적 관계와 Tanigawa의 귀족사회와 지식계급의 세계라는 개념이 안동의 대가 세족의 연구에 있어 유용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안동 대가들의 소위 계급의 기초는 관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긴 하였지만 정치, 경제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면이 강했다. 그것은 도덕에 기반한 사회를 함께 묶어주는 실제적인 인간관계와 가족, 친척, 마을, 지식계급내의 사회적 접촉으로 만들어지는 Tanigawa의 지식계급세계와 좀더 유사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
문화귀족은 지방의 문화적 정신적 세계를 이끄는데, 그것은 유교적 행정구조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가들은 친인척 관계나 문화적 교육적인 관계로 관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보호자적 중개인”들로서 그들 스스로의 보호를 위하여, “수수료를 받는 중개인”인 지방수령으로 대표되는 “국가적이나 기업적인 중개인”들에 대항하여 국가에 대하여 자발적이고 집합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게 되는데, 어떻게 대가와 세족들이 귀족적인 문화와 정신적 질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안동지방에 지속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대가와 세족들은 유교이념이 충만한 자급 자족적이고, 질서 있고, 의리있는 마을 분위기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임금에 대한 충성,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공경, 친인척간의 상부상조가 그것이다. 그들은 사노비와 상인농민들과 함께 시골에 살면서 비록 그들 자신이 아무런 관직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자기 조상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자신의 집안과 고위관리들과의 친인척관계를 자랑하고 자신들을 충성스런 유생이라고 칭하며 지방관료들과 교제하였다.
조선초기의 안동은 1441년에 향사당이 건립된 남부지방 최초의 마을로써 지방의 강력한 양반 지도층의 존재로 잘 알려져 있었다.
30) 양반 집안들은 돈을 모금하여 목재와 기와, 그리고 읍성 2리밖에 있는 법상사 절터의 경치 좋은 땅을 구입하였다. 유학교수였던 권시는 1442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의 고향인 영가에는 좋은 풍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근면과 검소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성군이었던 요, 순 임금의 유산을 소중히 하여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그들의 방식대로 혼인과 장례의식을 실천한다… 우리는 이것을 향사당이라고 이름 지었다…”
31)

양반 가문들은 향사당을 건립하여 혼인과 장례, 손님 접대 등의 의식을 행하였으며, 서로간에 술을 주고받으며 덕을 장려하고, 신의를 나누고, 연장자를 존경하고, 연장자와 연소자를 구분하며, 손님들을 그들의 지혜에 따라서 순서를 정하였다. 그것은 초기 안동 양반들이 고래의 유교생활습관을 지키면서 그들 자신들을 문화귀족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32)

안동은 자체규약(留鄕所立議)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조항들은 1475년에 기록된 것 같다.
33) 향규 구조라고 불리는 초기의 이 규약은 유교 윤리나 지방 관습을 어기거나 양반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한 양반들에게 주의를 주고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초기 규약은 부모, 형제, 처, 친척들과의 관계 및 선출된 대표와 지방 수령과의 관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자세하게 말한다면 규약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형제간의 우애가 없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양반으로서 대접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좋은 남편이나 좋은 친척 그리고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특권과 권리를 상실하게 됨을 명시하고 있다.
34)

15세기 안동 양반가문들의 문화적 활동은 우향계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1478년(성종 9년)에 13명의 은퇴한 관료들이 시작한 친목회였다. 구성원은 네 명의 영양 남씨, 네 명의 흥해 배씨, 세 명의 안동 권씨, 한 명의 안강 노씨, 한 명의 고성 이씨로 구성되어 있었다.
35) 위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중‧후기에 안동 대가댁들의 중요한 조상들이 된다. 이 친목회는 그들사이에 시와 여타 문화활동을 교류하면서 친목을 도모하였다. 이 친목회는 그들 자손들에 의하여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는데, 1505년의 진솔회, 1702년의 세호계안, 1865년의 수호계가 각각 그것이다. 1970년대 이래로 한시 짓기 대회는 열리지 않지만 오늘날에도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18일에 모임을 갖고 있다.
36) 16세기 중엽의 안동 양반들은 유교 공동체적 윤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연산군, 중종, 인종 즉위시에는 조정에서 여러번의 사화와 급진적인 주자학의 발호가 있었다. 이 시기에 많은 관료들이 목숨을 위협하는 당파싸움을 피하여 자신 또는 처의 고향 마을로 은퇴하였다. 이러한 은퇴한 관료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문화귀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옹호했고 땅과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1589년 향안의 회원인 청주본관의 정사성(1545-1607)은 구약에 대한 보완이 필요함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주역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서 본분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하를 구분해야 한다. 이 구분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서 본분을 다하게 하는 데 기본이 된다. 4계층의 사람들이란 사농공상을 일컫는다. 중국에서는 현자를 등용하는 데 차별이 없으므로 누가 어느 집단에 속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엄격한 신분구별이 있었다. 1475년 이전에 안동의 명문 양반가들은(淸門士族), 가문의 배경이나 이룩한 업적보다는 땅, 노비, 부를 많이 소유한 혼처를 선호하였다. 하지만 1475년 이래로 근 백여년간, 우리들은 가문의 배경에 대하여 중요하게 논의하여 왔다. 국가의 관습은 중국의 것과 같지 않고, 또한 하룻밤 사이에 바뀔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그리고 우리모임의 대표자인 향선생의 권고에 의하여 다음의 규약들을 채택하게 되었다.

(1) 서출의 아들들은, 비록 중국에서는 차별을 받지 않지만, 다르게 취급되어져야 한다. 비록 그들이 피가 깨끗해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4-5대에 걸쳐서 계속하여 향안에 등재되어 있는 유력한 명문가와 혼인하였을 경우에만 그들의 자손을 향안에 등재시킬 수 있다.
(2) 부계와 모계쪽의 배경에 결점은 없지만 본인이 사소한 실수를 범한 사람은 회원들의 보증에 의하여 가입이 허락될 수도 있다.
(3) 사회규범을 어기거나 범죄를 범한 사람들의 아들이나 손자들은 향안에 등재될 수 없다. 다만 공적이 있거나 순수 명문가 출신들은 등재될 수 있다.
(4) 향리집안 출신의 사람은 4-5대내의 조상들이 순수한 혈통의 집안(淸族)과 혼인한 경우에만 향안에 등재될 수 있다. 직파(直派)(예를 들면 三丁居館)의 사람은 반드시 그들의 혈통이 깨끗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후손들이 4-5대에 걸쳐 순수혈통을 가진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5)원래 양반은 지방관리들과는 많이 다르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이지만 양반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일부 양반들은 군인출신이거나 농민출신인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상인이나 미천한 신분으로 몰락한 양반들은 그들 조상이 4-5대게 걸쳐 양반가문과 혼인을 하였을 경우에만 가입이 허락될 수 있다. 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원들의 회의와 보증에 의하여 가입을 할 수 있다.
(6)외지에서 안동으로 이사하여 안동사람과 결혼한 사람이나 안동사람으로서 외지인과 결혼한 사람은 문제의 집안이 명문가문으로 밝혀진 연후에야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37)

위의 보충규약들은 1570년과 1590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안동의 대가세족들이 그들 계층이 되기 위한 조건을 주로 가문의 배경에 한정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양반가문들을 위한 이러한 규약을 초안한 사람은 이황의 수제자였으며, 임진왜란시에는 영의정이었던 유성룡(1542-1607)이었다. 신규약(新定十條)
38) 중 17개항은 구조약에서 따왔으며, 24개의 새로운 항목들은 퇴계의 예안 향약에서 따왔다. 그것을 모두 합치면 10개조 53개항으로 구성되어있다. 첫 4개조는 임원의 선출, 회원의 자격 및 회의 진행에 관한 것이다. 다음 3개조는 지역사회에서 양반의 사회적 정치적 행동에 관한 것이고, 마지막 3개조는 하급관리, 공정한 세금과 부역을 위한 호적, 그리고 평민자제들의 교육에 대한 그들의 행정적 책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지방유교집단으로서 그들의 공식적 목표는 기존질서를 유지하고 가족, 마을, 지역에서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등의 덕목을 강조하였다. 만일 이러한 덕목들이 가족 내에서 지켜진다면,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여 사회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알게 될 것이므로, 사회내에서 무질서가 사라질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의 부모를 대하는 것처럼 왕과 대신들에게 충성을 한다면 국가에는 평화, 질서, 조화만이 있을 것이다. 대가들은 이러한 유교교리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지지하였으며 이것을 위반한 사람들에게는 제제를 가하였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고 형제간에 싸움을 한 사람과는 그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때까지 교류를 끊었으며, 그가 스스로를 바꾸지 않는다면 관청에 고발하여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
39)
대가들은 조선왕조가 선량하고 현명한 관료들이 이끄는 도덕적인 국가라고 생각하였다. 일례를 들면 그들은 퇴계의 조언에 따라서 지방수령들의 선정을 기념하는 송덕비를 세우지 않기로 하였다. 임내신이 1543-1549년 사이에 예안의 수령으로써 선정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선정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우고자 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퇴계는 모든 수령들이 선정을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므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불필요하고 낭비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0)
윤리적인 정부와 윤리적인 지역사회에 대한 퇴계의 유교사상에 따라서 안동의 대가들은 자신의 마을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안동지역에서 가장 번화하고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부내에 있는 수령의 아문(衙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다. 마을에서는 대가들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질서있고 조화로운 관계에 근거하여 도덕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지역사회규범인 향약을 제정했으며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향규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을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양반, 서얼, 향리, 상인, 천민, 노비 등)이 유교윤리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위계적 사회질서를 권장하려는 것이었다. 일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마을에는 규약이 있는데 이에 의해서 두명의 대표를 선출한다: 그중 한명은 양반 중에서 정직하고 유덕한 사람으로 선출하고, 다른 한 사람은 평민 중에서 나이가 많고 행실이 바른 사람으로 선출한다. 마을사람들은 어떤 문제나 선행과 악행들을 빠짐없이 두 대표에게 알려야 한다. 매월 1일 아침에 두 대표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공터에 모은다. 연장자들, 덕이 있는 사람, 관청의 관리들은 자리를 함께하고, 양반의 서출들은 따로 모여 앉는다. 평민과 일반대중 및 사노비들은 또한 같이 무리지어 앉는다. 모든 사람들이 앉으면 대표의 보좌관이 규약을 읽고 그 뜻을 설명한 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한다. 선행을 한 사람들은 칭찬을 받고, 잘못을 범한 사람들은 문책을 받았는데 이 모든 것은 기록을 해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글을 읽지 못하는 평민들을 위해서 대표는 한글로 된 번역을 제공해 주고, 다시 한글을 조금이라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 주도록 하였다.”
41)

대가들은 또한 다양한 종류의 문화행사를 통하여 유교적 질서를 권장하고 보전하였다. 유교의 스승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은 서원을 건립하였고, 그곳에서 그들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그들 조상들의 정신적 지도아래 공부를 하였다.
김진을 추모하여 사당과 학교를 건립한 의성 김씨들의 노력을 예로 들어보도록 하자. 1675년에 김진의 자손 54명은 그를 기념하여 경출산 자락에 그의 영당을 짓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모든 종친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 계획에 대한 성원을 부탁했다. 그후 영당은 1680년에 완공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27명의 후손들이 만나서 김진을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그의 다섯 아들들을 배향(配享)으로 모시는 일을 논의하였다. 뒤이어 1685년에 100명이 넘는 후손들이 함께 모여서 사당을 짓는 일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목수들을 고용하고 관리들과 마을주민들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건물은 3개월 동안에 완성되었으며 그들의 조상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경덕사라고 명명되었다.
1709년에 김진의 후손들은 경덕사가 강가의 좀더 좋은 장소로 이전되어 사빈서원으로 재건축 되도록 하였다. 이 계획은 안동의 대가댁들에 의하여 계획된 가장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계획이었는데 2년간 공사를 하였고 수천 명의 천전군과 도림군 등의 마을주민들의 부역과, 목수, 노비, 승려 및 중인들을 동원하였다. 또한 이 공사는 향교와 서원에서도 금전적으로 지원을 하였다. 이들 자원자들은 나무를 잘라 목재를 만들고, 바위와 기와를 옮기고, 학교를 건설하였다.
42) 이 대규모의 공사는 18세기초에 내앞 김씨가 얼마나 영향력있고 존경을 받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1717년 영조 즉위시 중앙정부는 당쟁에서의 책임을 물어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다. 암행어사 이명언은 사빈서원을 철폐대상으로 왕에게 보고하였다. 지역유지들은 이 사태에 대해서 토의하고 당시 최고의결기관이었던 서울의 비변사에 대표를 상소문과 더불어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717년 12월에 약 100명의 안동유지들이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서, 1718년 2월까지 머물면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담당관리들을 그들의 관청 및 사저에서 만나고자 하였다. 그들의 논지는 사빈서원은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들을 추모하는 개인적인 사당으로서 조정에서는 그것을 사빈영당으로 존속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단합된 행동은 성공적이어서, 조정에서는 마침내 서원의 현판을 부수고 1680년의 애초 계획대로 김진의 후손들이 그 건물을 사당으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청을 들어 주었다.
43) 이 건물은 그후 거의 2세기 후인 1868년에 대원군의 명에 의해 전체 건물이 헐리게 되는데, 대원군은 지방에서의 그의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제거함으로써 그의 지배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 후에 이 건물은 1882년에 부분적으로 복원된 후 1988년 안동댐의 건설로 다시 철거되었다. 이 건물은 조상숭배, 학문, 충성 등의 조상들의 가치를 보존하고자 했던 내앞 김씨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물중의 하나였다.
내앞은 전국적으로 많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도덕적 공동체가 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냈을 때, 안동의 지도자들 특히 내앞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여기에 대처한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실제로 1905년 이후에 유격전에 가담하게 되고, 일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신식 학교를 건립하는 데 힘썼으며, 일부는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후에 만주에서 계속해서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유교적 세계질서를 버리고 소위 신학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조상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김극일의 13대손이고 유인식과 하중환과 더불어 개혁의지를 갖고 있던 김후병(1874년 출생)은 협동학교란 신식학교를 1907년에 설립하였다. 이때 종손이었던 김병식(1856-)은 1918년 이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44) 그들의 조상들은 침략자들과 반란군들에 대항하여 싸웠던 많은 전례들을 가지고 있었다. 병식의 12대조인 철은 1592년에 일본의 히데요시군과 맞서 싸웠으며, 7대조인 민행은 1728년에 반란군 이인좌의 군과 싸웠었다. 유인식의 아버지 필영은 1895년 당시 의병지도자였다.
45)
1589년 향안에 등재된 권기는 1608년에 그의 스승 유성룡과 안동지역의 유지인 광산 김씨 김득연, 전주 유씨 유의잠, 진성 이씨 이의준, 안동 권씨 권극명, 의성 김씨 김근의 도움을 받아 안동지방의 최초의 읍지인 영가지를 편찬하였다.
46) 영가지는 22개의 서당과 43개의 사원(亭, 樓, 閣, 堂)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대가와 세족들이 그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이거나 개인적인 의지에 따라서 또는 학문적인 추구를 위해 세운 것들이다. 서당중 일부는 17, 18세기에 그들 후손들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47) 예를 들면 풍산의 풍악서당이 왕실이 하사한 토지와 서책으로 1563년에 설립되었다. 1607년 유성룡은 하회 유씨 가문의 지도자들에게 서당이 길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병산에 있는 한적하고 경치가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조언을 하였고,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1607년 유성룡이 죽자, 그는 병산서원으로 개칭된 그 서당에 모셔지게 된다.
이러한 서원, 서당, 전각들은 안동의 마을들을 “유교적 문화공동체”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학생들은 중국고전 뿐만 아니라, 입고, 먹고, 말하고, 인사하는 예절까지도 동자례 같은 책으로부터 배웠는데, 이 책은 김성일이 중국 명나라로부터 들여온 책이다. 후에 그의 후손들이 그 책을 다시 인쇄하게 된다.
48)
1592년과 1900년대에 일본이 안동을 침략하였을 때 전쟁을 수행한 것은 정규군이 아니라 유학자들이 이끄는 의병들이었다. 선비출신의 의병장들은 왕조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백성들을 조직하여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마을을 수호하였다. 1627년과 1636년의 만주족의 침략은 안동지역에 실질적인 피해는 주지 않았으나, 일본에 대한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안동의 대가들은 마을을 수호하기 위하여 만주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싸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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