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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

[주임사제 설교]연중 10주일. 환경 주일 2026. 6. 7. 설교

작성자stephano|작성시간26.06.07|조회수36 목록 댓글 0

연중 10주일. 환경 주일 2026. 6. 7. 설교
마태 9:18-26. 창세 12:1-9.
떠남으로 회복을

 

보통 창세기 11장까지를 원역사라 부릅니다. 역사 이전의 이야기라는 말인데요. 오늘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로 인해 비로소 성서의 역사는 물론 인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는 일입니다. 인류의 역사 안에 떠남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민족의 대이동으로 문명이 발생하였고, 때론 힘에서 밀린 이들이 주거지를 옮김으로 새로운 문명과 문화가 생기게 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 환경주일을 맞이하며 떠남과 회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떠남은 먼저 숙고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무턱대고 자기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떠남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의 무수한 고뇌와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헤아리고 분별하며 경거망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떠남에는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떠날 이유가 분명해지고 결심이 서면 뒤돌아보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실행해야 합니다. 떠남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성서에서는 숙고하고 행동하는 바탕에 아브라함이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순종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익숙함을 과감히 버리고 길을 나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확신과 결단을 자꾸 미루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이 편안함과 자족함일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삶에 만족한데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력한 족장의 신분으로 누릴 것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순종하는 용기로 성서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분별하는 지혜만큼 중요한 것이 머뭇거리지 않는 용기입니다. 아브라함 앞에 놓인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보면 그 일은 매우 고난의 찬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용기를 내어 하느님 진리에 순종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시대의 요구와 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이 순종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망설임이 있었을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본거지를 떠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 즉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떠남은 곧 본래 자리로 돌아옴 즉 회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시대의 징조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와 용기를 구합니다.

 

오늘 복음에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매일 묵상에서 보았듯 기적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당시 회당장은 매우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위치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간절한 마음을 읽으셨을 겁니다. 주님의 연민, 공감과 부모의 간절함과 믿음이 만납니다.
이제 이야기는 성인 여성의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당시 율법에서 그녀는 불결한 존재였습니다.
사막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청결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조심한 것이 시체와 피였습니다. 하혈이 멈추지 않는 병은 부정한 것이었기에, 그런 사람을 접촉해서도 안 되고, 그 사람이 남긴 흔적에 몸이 닿기만 해도 부정을 타게 됩니다. (레위 15:25-30) 회당에서 예배에 참석도 불가하고 가족과 친구와도 멀리해야 했습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뒤틀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그녀가 먼저 예수님께 손을 댑니다. 당시로서는 불가능이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치유하시며 안심하라고 위로하십니다.

 

두 이야기 모두 변화의 근원에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치유와 다시 살아남도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병이 낫다는 표현 즉 치유하다라는 말은 구원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치유는 다시 원래 상태로의 회복입니다. 치유는 곧 구원입니다.
자녀를 살려 달라고 엎드리며 간구하는 용기, 다가가 옷자락에 손을 댈 용기가 믿음입니다.
주저하거나 생각만 하다 마는 게 아니라 실제로 다가감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됩니다.
그러니 그 다가섬의 용기는 아브라함이 지녔던 떠남의 용기와 매우 닮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살리십니다. 여기서 다시 산다는 표현은 곧 부활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인의 치유가 자기 자신은 물론 함께 고통받고 아파하던 가족과 이웃에게도 다시 삶의 회복이 되었듯, 그 아이의 다시 살아남이 아버지는 물론 함께 슬퍼하며 곡하던 이들에게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아픈 곳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팎에 있는 단절되었던 모든 것이 다시 원래 자리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숙고하며 분별하는 지혜와 결심이 서면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를 달라고 힘껏 기도합니다.
지금이 깨어 기도하는 많은 이들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시기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결국 그 사람의 본래 자리로 그리고 본래의 모습으로의 회복이듯이, 떠남 즉 기도와 실천을 이루는 간절함은 우리 각자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환경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 만드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안락함에서 용기를 내어 떠남으로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역사가 시작이 되었듯이, 우리의 용기 있는 떠남과 다가섬으로 회복의 역사는 시작될 것입니다. 불치병이던 여인에게서 신음하는 생태계와 우리를 생각합니다. 죽었던 아이에게서 너무 늦어버린 회복 가능성에 대한 절망을 생각해 봅니다. 떠남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더 늦기 전에 결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시대의 아픔과 징조를 읽는 지혜를 구합니다. 우리에게도 버림과 비움 즉 떠남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절박한 기후 위기 앞에서 생명과 생태를 기억하며 실천할 유일한 공동체가 교회일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과 결단이 하느님 창조의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은 낡은 모든 것으로부터 과감히 떠남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의 진정한 회복을 얻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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