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마음에 불을 당기리. (7/26)
마태복음 9장에 보면 12년 동안 하혈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자 병이 난 장면이 나옵니다.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제도와 위력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지금도 나아지지 않은 현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에는 여성의 하혈은 7일 동안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 여성을 만지는 것도 부정했고요.
여인이 깨끗해지려면 하혈은 멈춘 후 다시 7일이 지나야 했고,
8일째 되는 날 제사장에게 비둘기를 가져가
번제와 속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12년간 하혈을 한 그 여인은 유대 사회에서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물건에 손을 댄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고요,
철저히 고통받고 소외된 이중의 차별을 견뎌야 했을 것입니다.
잠시 이 장면을 떠올리며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여인에게서 ‘나’를 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으로 잠 못 이룬 적도 있을 것입니다.
이중 삼중의 아픔과 다른 이들의 질시 어린 눈빛을 받던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못 느끼던 경험도 있으셨겠지요.
이런 일에 정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단, 이런 확신은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믿은 대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고요.
물론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가지 못하니 용기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생각이 너무 많기에 그렇습니다.
무조건 덮어놓고 믿으라는 구시대적 강요를 늘 경계하지만,
이성적이라는 말에 붙들려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를 소홀히 해도 안 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조금만 버려봅니다.
오늘 하혈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
그 많은 기다림 가운데 용기를 내어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진정으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손을 댄다는 것(touch)은 단순히 옷자락에 손을 댄다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손을 댄다는 것을 합소마이(ἅπτομαι)라고 합니다.
‘불을 밝히다(light)’ 혹은 ‘가슴에 불을 붙이다(kindle)’라는 뜻인데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이 어두웠던 그녀의 삶에
‘불을 밝히는’ 일이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대는 행동이 예수님 가슴에
‘불을 붙이는’일이 된 것이라는 말이고요.
놀랍습니다.
조금 고통스럽고 힘겨울 때, 노력해도 별반 나아지지 않는 일들을 경험할 때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함께 기도합니다.
여인의 삶에 빛이 켜지고, 여인의 용기 있는 행동이 예수님 가슴에 불을 당겼듯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가슴에도 불이 당겨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동과 용기의 생활이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