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가이
신약 시대 유다교에는 바리사이, 에쎄네파, 열혈당, 사두가이 등의 분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가이라는 말은 솔로몬 시대 대사제였던 사독(1열왕 1:34, 2:35 참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강합니다. 그 어원은 ‘의로운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형성되었고 규모가 얼마 정도였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신약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영향력 있는 사제나 상인 등 대개 부유하고 귀족적인 지도층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대사제들이나 가장 세력 있는 사제들은 주로 사두가이였습니다.(사도 5:17 참조)
사두가이들은 성전을 책임 맡아 그곳에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성전 의식을 잘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성전 관리와 제사 의식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 당시 바리사이가 평신도와 회당을 대표했다면 사두가이는 성직자와 성전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유다교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에서도 상당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헤레니즘 문화에 정통하고 정치 지향적인 성격이 강한 사람들로서 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일정한 특권을 누렸지만 이스라엘 동족들에게는 미움을 받는 부류였고 바리사이만큼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만을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였고, 물질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부활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고, 영혼불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마태 22:23과 병행구절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며 따지는 모습, 사도 23:8 참조)
구약의 율법을 보수적으로 또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는 율법 해석과 대응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이 분명하였고 사도들을 체포해 가두는데도 일조하였습니다.(사도 4:1-3, 18:33 참조)
사두가이는 기원후 70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게 이루어진 유다교의 완전 몰락과 함께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집니다.
자료제공: 성공회 영성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