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20260607 가해 연중10주일 도봉교회 설교

작성자우공이산|작성시간26.06.07|조회수37 목록 댓글 0

20260607 가해 연중10주일 / 환경주일

호세 5:15-6:6 / 로마 4:13-25 / 마태 9:9-13, 18-26

 

나의 무가치함에서 빠져나오기

 

여러분은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만일 좋아하신다면 어떤 장르를 좋아하나요? 어떤 사람은 로맨스를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극(史劇)을, 아니면 어떤 사람은 이른바 막장드라마를 보며 욕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그 속에 내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생활에 자극도 받고, 긴장도 해소합니다.

최근에 저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제목이 제법 긴 드라마를 재밌게 봤습니다.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드라마는 황동만과 변은하라는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유무(成功有無)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처지는 다 다르지만, 모두들 각자의 무가치함, 달리 표현하면 불안, 무기력, 열등감 그리고 시기와 질투 등과 같은 내면의 상처들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훌륭하게 표현해 낸 연기자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그들의 감정과 내면의 상태를 맛깔 나게 묘사해 내는 대사들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이 뭔 지 알려주는 ‘감정 워치(watch)’라는 아이디어가 아주 기발하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살다 보면 다양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또한 설령 감정을 알아챘다 하더라도 그 감정이 어떤 건지 잘못 판단해서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극 중의 주인공들이 시계를 보고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아는 걸 보면서, 나도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의 실체를 바로바로 알려줄 수 있는 감정시계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여러 장면 중 하나를 언급하라면, 저는 변은하와 장미란이 포옹하는 장면입니다. 두 사람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거울과도 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은 오정희 배우를 어머니로 둔 깨어진 가정의 딸들이며, 사랑을 갈구하다 배신당한 상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장미란은 밝은 세상 하에서 감정을 밖으로 터뜨렸고, 변은아는 어둠 속에 웅크린 채 안으로 삭였습니다. 표현의 방향만 반대일 뿐, 변은아는 곧 장미란이고 장미란은 곧 변은아였습니다. 그래서 장미란이 변은아를 안고 변은아가 마주 안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그것이 타인을 향한 위로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닌가 느꼈습니다. 두 사람은 이것을 통해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치유 받고 빠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 등장한 세리 마태오, 하혈병을 앓던 여자 그리고 죽었던 소녀를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마태오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마태 9:9 참조) 여기서 우리는 마태오를 부르신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영주들이 다스리는 경계지역 도시마다 세관이 있었고, 그래서 갈릴래아, 사마리아, 유다 그리고 인근 지역으로 이동할 때 세관을 거쳐야 했습니다. 마태오는 여기서 근무하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관세와 통행세를 거두는 권한은 입찰제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금액으로 낙찰 받은 사람이 세금을 거두어 통치자에게 바치고, 그 책무를 이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위임받았습니다. 만일 세금이 잘 안 걷혀 부족하게 되면 개인재산으로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에, 보통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반사람들은 세리들이 정해진 세율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여 개인적으로 착복한다고 의심했고, 그들은 무역으로 오가는 다른 민족 사람들과 접촉했기 때문에 당시 유대교 율법에 따라 부정한 이방인들과 함께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감안하고 오늘 복음을 볼 때, 아마도 유대인 마태오는 돈을 벌기 위하여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유대교의 율법과 동족들로부터 존중은커녕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에겐 이러한 냉랭한 외부의 시선도 힘들었지만, 내적으로도 ‘자신이 정녕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하는 깊은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그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시고, 죄인의 집이라고 하는 그의 집에 기꺼이 오셔서 식사를 하시니, 어두웠던 그의 마음은 밝아지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유대교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자로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자, 주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는 격언과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구약의 호세아 예언서를 인용하시며 율법학자들의 단죄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마태오를 변호하십니다. (마태 9:12-13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마태오는 나를 세리라는 무가치한 놈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하혈병 앓던 여자입니다. 유대율법에는 피를 흘리는 행위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해서 일체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레위 15:25-28 참조) 그런 이유로 하혈병 앓던 여자는 너무도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내 병을 고쳐주세요!”라고 감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에 의해서 무가치한 존재로 규정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율법을 어겨서 비난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예수님 뒤로 다가가 옷자락을 살짝 붙잡으며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유 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아서시며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 9: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병이 나았습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무가치한 병자에서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에서 소생한 소녀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피리부는 사람과 곡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생명이 꺼져버렸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말의 가치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신을 무덤에 옮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려서 데리고 나오십니다. 이미 끝나서 처리해야 할 물질이 다시 숨 쉬는 생명으로 가치를 회복한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설교 서두에서 언급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습니다:

인간이 영어로 뭐야?”

휴먼”

뒤에 하나 더 붙잖아. 뒤에.”

휴먼 빙(human being). 휴먼 두잉(human doing)이 아니고 휴먼 빙. 그냥 존재하라고”

작가는 황동만의 형 황진만의 대사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가치는 doing이 아니라 being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내가 무슨 일을 했었고, 하고 있고, 그리고 그 성과는 어떻고, 그래서 나라는 가치는 이러이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숨 쉬고 살아가는 그 존재자체로서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하혈병 앓던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신 이야기는 그들이 어떤 직책에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doing이라는 잣대로 그 가치를 매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가치를 인정받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무가치하다고 평가절하되어 상처받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신이 무가치함으로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고, 그 무가치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싸웁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서로를 doing이란 잣대로 평가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있음(being) 자체’로 가치있다고 여기십니다. 그 있음 안에는 때론 ‘내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닐까’하는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혈병 앓던 여인처럼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 9:22)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을 다시 살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죽은 소녀가 다시 살아나듯이 새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고, 안아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