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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4 가해 연중11주일 도봉교회 설교

작성자우공이산|작성시간26.06.14|조회수37 목록 댓글 0

 

20260614 가해 연중11주일

출애 19:2-8 / 로마 5:1-8 / 마태 9:35-10:23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아시다시피, 저는 중국 남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다시 중국 천진으로 가서 몇 년간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제 딸은 거기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제 딸이 중학생이었을 때, 저는 우연히 딸의 책장에서 제 눈길을 사로잡은 한 권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중국어로 钢铁是怎么炼成的』라는 책인데, 우리나라에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입니다. 1936년 출판된 이 책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1904~1936)가 쓴 자전적 소설로서 1919년 러시아 혁명, 적군과 백군 간의 내전, 레닌의 신경제 정책 등 20세기 초 격동의 러시아 상황을 배경으로 한, 현대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과거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에선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문학작품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중국 교육당국에선 이 책을 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정했을 것이고, 그래서 제 딸의 책장에도 이 책이 꽂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분들 중에 아마 이 책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책뿐만 아니라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어머니』 등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작품을 읽으며, 적지 않은 자극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딸의 책장에서 이 책을 봤을 때, 그 책을 읽으며 고뇌했던 저의 20대 시절이 회상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함께 할 사도들을 선발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기 전에 해야 할 행동지침을 가르쳐 주신 대목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그저 예수님을 따라만 다녔던 ‘제자들(disciples)’이 스승의 뜻을 전하고 실천할 ‘사도들(apostles)’로 변하는 과정이 마친 제가 젊었을 때 접했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라는 책과 오버랩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을 당신의 사명(mission)을 감당할 강철 같은 사도들로 어떻게 단련시키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세상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태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NIV, 마태 9:36)”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총독 빌라도와 헤로데 왕이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각 지역회당 마다 회당장들이 백성의 목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참된 목자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양들을 잡아먹거나 사고파는 도축업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푸른 풀밭에서 즐겁게 풀을 뜯어먹고, 밤에는 안전하게 쉬어야 할 양들이 잡아 먹힐 위험에 늘 불안에 떨면서 기가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참한 현실에 깊이 마음 아파하셨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당신과 뜻을 함께 하면서 이 일을 수행할 동역자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들로 선발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0장 1절과 2절을 자세히 보면,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선 예수께서 12 제자를 불러”로 시작했다가, 2절에 가서는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12명인데 앞에서는 제자라고 했다가, 뒤에선 사도라고 한 점입니다. 마태오 복음저자는 왜 이렇게 달리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제자와 사도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disciple)’란 말은 ‘배우다’라는 라틴어 ‘디쉐레(discere)’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쉽게 말해서 스승의 언행을 배우는 학생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에서 제자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익히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신자는 ‘제자’입니다. 그러나 ‘사도(apostle)’란 단지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추종하는 단계에만 머물지 않고,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보내지다’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을 ‘임무를 띠고 보내진 자’, ‘외교사절’을 지칭할 때 사용했습니다. 이 말을 후에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내진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란 성자 예수께서 성부 하느님의 사도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이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예수님과 주님의 교회로부터 파견된 사람을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이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추려서 사도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주교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유로 성공회가 ‘우리는 역사적 사도직을 계승한다’는 선언은 이러한 성서적이고, 신학적 근거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하기 위해선 단순히 제자들만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사명감을 갖고 ‘하느님의 사업(Opus Dei)’에 투신할 일꾼들, 즉 ‘사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선교현장에서 어떻게 단련되어야 하나요?

예수님은 세가지 상황을 가정하시면서 각각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첫째, 환대받았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마태 10:11) 예수님 당시와 초창기 교회 모습을 보면, 지금처럼 안정적인 조직체계나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사목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한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는 아무 집이나 임의로 들어가지 말고, 신중하게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고, 일단 정했으면 복음선포에만 매진하라는 뜻입니다.

둘째, 배척받았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려라.” (마태 10:14) 이 말씀은 더 이상 미련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발의 먼지를 터는 행위는 그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인지 구원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책임은 사도들에게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배척을 넘어서 박해를 받았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마태 10:23)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상황도 반영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자, 신도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결과적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도 8:1, 4 참조) 그러므로 사도들이 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무모하게 박해자들에게 맞서지 않도록 자제하는 한편, 피하는 것이 가져올 긍정적인 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피하는 것만 능사가 아닙니다. 때론 예수님처럼 사도들도 잡혀가 고초를 겪고 그들 앞에서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는 점도 언급하십니다. 그럴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설교 서두에서 언급한 러시아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강철은 강한 불 속에서, 그리고 차디찬 냉각 속에서 단련된다. 그때서야 강철은 단단해져 무엇이든 자를 수 있게 된다. 우리 세대도 그렇게 무서운 시련 속에서, 삶의 투쟁 속에서 단련되었고, 삶에 굴복당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기술문명이 고도화되고 문화적으로 세련 되어진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의 현실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가 이 작품을 쓰던 혁명과 내전으로 격변했던 20세기 초 러시아나 80년대 젊은이들이 최루탄을 맞아가며 민주화를 외쳤던 격동의 대한민국, 심지어 로마라는 이민족의 지배와 탄압 하에 신음했던 예수님 시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그들이 볼 때 굉장히 발전되고 풍요로운 사회일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또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마태 10:18)와 같은 비장함이 묻어나는 말들이 더는 피부에 확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감각을 좀 더 예민하게 다듬어 이 세상을 둘러보면, 지구촌 곳곳에선 여전히 전쟁과 테러, 기아와 불의로 인해 고통받고 기가 꺾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모습에 공감(compassion)하신 하느님이시고, 그런 사람들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라고 우리를 사도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도직을 주장하는 교회들은 이것을 신학적이고 관념적인 문서 속에만 가둬두지 말고, 주님이 파송하는 세상으로 나아가 치유와 구원하는 사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점차 망각하고 무기력 해져가는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들과 그들로부터 서품 받은 사제들이 강철처럼 단련되어 주님의 진정한 사도들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사도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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