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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21 가해 연중 12주일 도봉교회 설교

작성자우공이산|작성시간26.06.21|조회수31 목록 댓글 0

20260621 가해 연중12주일

예레 20:7-13 / 로마 6:-11 / 마태 10: 24-39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때부터 한달에 한번씩 하는 예비신학생 모임에 다니면서 성소(聖召)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나 2008년 5월에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사제가 된 지 18년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 44년이란 세월동안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교회는 제 삶과 가치에 있어서 늘 중심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깨달음의 기쁨, 봉사를 통해 얻는 보람 그리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의 내면에 있는 약함과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 등으로 아픔과 좌절, 심지어 이 길을 도망치고 싶은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제가 주님의 길을 따르는데 있어서 힘들어 할 때마다 오늘 제1독서에 나타난 예레미아 예언자가 한 독백 구절을 읽으면서 주님께 힘들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옛날 예언자가 지녔던 고뇌와 깊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천지창조부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받는 과정을 기술한 모세오경,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와 지혜가 담겨있는 지혜서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한 사람들, 우리가 예언자라고 부르는 이들의 활동을 다룬 예언서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장르 안에는 이사야서, 예레미아서, 에제키엘서 등의 대(大)예언서와 12개의 소(小)예언서가 있습니다. 여기서 대예언서, 소예언서라는 명칭은 그 중요도가 크고 작다는 뜻이 아니라, 책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른 분류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예언서는 이사야서입니다. 그렇지만 이사야 예언서 못지않게 예레미아 예언서 역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접하고 그 분이 가신 길을 묵상하면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메시아와 구원의 희망을 봤을 거며, 또한 예레미아 예언자가 언급한 회개와 새로운 언약에 대한 것도 떠올렸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명심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과 교회가 말하고 있는 ‘예언’의 의미가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예언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흔히들 예언이라고 하면 우리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아 맞추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점(占)을 친다’는 말을 할 때, 이것은 미래를 알기 위한 것과 관련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미래의 일들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컨대 에제키엘서에서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점을 쳤다는 언급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에제 21:26-27 참조) 그러나 성경과 교회가 말하는 예언이란 하느님의 뜻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란 점(divination)이라기 보다는 신탁(oracle)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 계시를 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언자는 하느님과 인간 간의 중재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가 예언자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을 보면, 일반적으로 예언자 학교 내지 사제를 양성하는 학교 등지에서 교육받습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학교(prophetic guild)는 오늘날의 정규 교육기관이라기보다, 예언자의 지도 아래 함께 생활하며 신앙과 예언 활동을 배우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예가 열왕기 하권에 등장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활동했던 시대에 있었던 ‘예언자 수련생’ 집단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농부인 아모스와 같이 체계적인 예언자 양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을 불러서 당신의 예언자로 쓰시기도 했지만, 대체로 예언자들은 방금 언급한 훈련과정을 거쳐 만들어 졌습니다.

사제가문의 아들인 예레미아 예언자 역시 일찍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제로서 또한 예언자로서 교육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 왕실과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정통코스를 통해 양성되고 국가와 성전의 핵심에서 활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 나라는 점점 쇠락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아를 제외한 다른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왕실에 듣기 좋은 말만 할 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외면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레미아가 나라의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자, 거짓 평화를 외치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거나 구덩이에 던져지는 등 극심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결국 나라는 멸망했고, 그는 백성들로부터 나라를 망하라고 저주한 민족의 배신자라고 비난받아 이집트로 끌려가 거기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렇게 망국(亡國)의 시대를 살았던 그의 일생은 참으로 불운했고, 사람들은 그를 ‘눈물의 예언자’라고도 부릅니다. 그의 인생은 이처럼 힘들고 어려웠기에 그는 인간적으로 그 상황을 외면하고 싶어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들은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하느님의 계시를 수행해야 하는 예언자의 사명과 그 속에서 힘들어하는 연약한 인간의 마음 간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처지를 묘사합니다: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예레 20:7-8) 그러나 그는 단지 힘들어 하는 자신의 마음보다 더 한 차원, 즉 자신의 뼈 속 깊이 박혀 있는 하느님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그 말씀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 20:9)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진정한 예언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느껴 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마태 10:3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증언은 때때로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심지어 평화가 아닌 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계시를 수행해야 하는 예언자는 오늘 들은 예레미아 예언자처럼 극심한 내적 고뇌와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수행합니다”라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회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화라는 이름 하에 하느님의 진리를 대변하는 예언직을 뒤로 미루고,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세상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여러 사회집단 중 하나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 10:38-39)라고 경고하십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전해야 하는 저는 솔직히 인간적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 하느님 성전에 온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으로 마음의 평화를 주고 싶지만, 오늘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는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저로서 그 사명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쩡쩡한 위로, 얄팍한 평화라는 영적처방으로 나의 백성을 호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로는 듣기에 불편하지만 진실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씨름해야지만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주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로마 6:11)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인 우리가 참된 평화를 얻기 위해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도중에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 이미 우리 뼈 속 깊이 그 고통을 이길 당신의 능력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고 지쳐서 도망치고 싶어도,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계신 하느님의 영과 말씀이 우리를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희망하기에 주님과 함께 구원을 향해 끝까지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가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애통해 하였지만, 하느님은 기나긴 구원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구원을 주셨듯이, 지금 우리 각자가 흘리는 이 눈물도 십자가의 은총으로 치유되길 기도합니다.

참된 예언과 계시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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