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9(연중 16주)/ 사무하7:1-14, 에페2:11-22, 마르6:30-34,53-56
궁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너와 세상을 치유하라.
얼마 전 생활고를 비관하던 한 어머니가 세 아이들과 함께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9살 된 큰 아이는 엄마에게 살고 싶다고 애원했던 모양인가 봅니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실강이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런 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버렸습니다. 부모 없이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인가 봅니다. 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했을까? 그만큼 우리 사회가 상처받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것이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목회를 하고 있는가? 희망을 주는 목회를 하고 있는가? 기쁨을 주는 목회를 하고 있는가? 생명을 주는 목회를 하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상처와 아픔은 우리의 삶을 참으로 힘들게 합니다. 때문에 이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것, 참된 신앙의 여정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려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까지 많은 사람들이 따라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자 잃을 양과 같다”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목자를 잃은 양과 같다는 말은 뭔가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목자 없은 양과 같이 만들까요? 저는 두 가지 상황이 목자 없는 양처럼 만듭니다. 하나는 시련이고, 또 하나는 유혹입니다.
어떤 일에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어떤가요? 내 마음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런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마치 눈에 비늘이 덮힌 것처럼 되고 맙니다. 오락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면 어떨까요?
그런데 주님은 이런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들의 상처가 치유되었을까요? 그 열쇄가 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6장 56절 말씀입니다.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져야할 예수의 옷자락은 어디 있을까요? 저는 이 옷자락,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갈등과 상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 속에서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은 모습을 보셨습니다.
목자를 잃은 양과 같다는 말은 뭔가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무엇이 위기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아모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아모8:11)
지금 내 모습은 어떤가요? 제대로 길을 가고 있나요. 우리 가정은 어떤가요?
저는 보입니다. “남보다 더”라고 하는 나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 황금만능주의, 출세 지상주의 풍조가 우리 모두를 목자 잃은 양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평화로워야할 우리의 삶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청계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교육현장을 보면 아이들은 다섯 가지 과잉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잉, 보호과잉, 학습과잉, 기대과잉, 황금신뢰가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키우다 보니 7무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무절제하고, 무례하고 이기적이며,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생명존중과 두려움이 없고, 진선미에 감동이 없고 폭력배로 성장한 다는 것입니다. 목자 잃은 학교입니다. 어디 학교뿐이겠습니다.
이런 위기에 빠져 있는 내 자신을 치유해야 합니다. 내 가정을 치유해야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치유될 때 우리는 세상에 희망을 주고 치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듯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지 그 말씀의 여정을 떠나볼까 합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주님은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일을 하셨습니다. 때문에 한적한 곳으로 가 제자들과 함께 쉬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좀 쉬려고 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온 것입니다. 정말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쫓아버리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던 길을 멈추시고 배에서 내려와 그들을 위해 말씀을 선포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욕구를 먼저 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왜 우리들 안에 위기가 올까요? 배려하는 마음을 잃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중심에 놓고 보려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갈등과 상처의 중심을 보면 언제나 내가 있습니다. 조금만이라도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볼 수만 있다면 정말 많은 것들을 볼 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의 출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파라오가 전국에 히브리인들이 아기를 낳을 때 계집아이면 살려두고 사내아이를 낳으면 다 강물에 집어넣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조금 늦게 태어나든지, 아니면 조금 일찍 때어나든지 하지, 왜 하필이면 다 죽이라고 할 바로 그때 태어났는지, 바로 이런 죽음의 상황, 어둠의 세계에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석 달 동안은 어떻게 해 보았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강물에 버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그냥 강물에 던져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왕골로 상자를 만들어 역청과 송진을 바른 뒤에 그 상자 속에 모세를 넣고 강물에 뛰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습니다. 행여 운이 좋아서 바구니에 물이 차기 전에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아마, 모세의 어머니는 이렇게 기도했겠지요. “오! 하느님! 이 아기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침은 그 때 에집트의 공주가 울고 있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공주는 아이를 보는 순간 “이 아이는 히브리인의 아기”임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아이를 물속에 쳐 넣은 것이 아니라 그 아기를 건져내어 궁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어머니도 포기한 이 아기를 살려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역청을 바르고 송진을 발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역청과 송진 때문에 잠시는 견디어 냈겠지요. 사실 모세를 살려낸 것은 바로 공주였습니다. 하느님은 이 공주를 통해 모세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주가 믿음이 있었습니까? 야훼를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공주가 이 히브리 아기를 어떻게 살려낼 수 있었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어떻게 이 아기를 살려냈습니까?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공주는 알았습니다. 이 아기를 보는 순간 물에 던져 버려야할 히브리 아기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주가 자신의 현실을 생각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공주는 자신의 현실에서 모세를 본 것이 아니라 지금 모세의 현실에서 자신을 본 것입니다. 바로 이게 배려하는 마음이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공주의 이 마음이 없었다면 모세는 죽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공주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마음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이게 성서가 말하는 복음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는 결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이게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사람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쉬고 싶은 자신의 욕망, 제자들과 함께 하려는 모든 계획도 포기 하셨습니다. 왜 포기 하셨습니까?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 독서 에페소의 말씀을 보십시오. 어떻게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화해가 일어는 비전을 보여주셨습니까? “자신을 희생하여” 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유다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평화를 이룩할 수 없고, 또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아픔이 없이는 하느님과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애 버리고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남이 희생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불화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궁휼히 여기는 마음, 그것은 자신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셋째, 궁휼히 여기는 마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의 실천입니다.
주님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을 보시고 측은하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양심이 있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마음에 품으셨고, 그리고 그 품으신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셨습니다.
바울로의 말씀처럼 믿음이란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입으로 고백을 해야합니다. 물론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더 나가야합니다.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한 사랑의 행위, 용서를 통해 드러난 기적들은 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삶을 지금 내가 살아야할 삶이라고 하면 뒤로 물러서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옳다고 여기는 삶을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잡아야할 이 옷자락, 저는 궁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이 마음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세상을 치유하십니다.
자, 지금 내 자신을 봅시다. 그리고 내 가정을 보고, 이 세상을 봅시다. 목자 잃은 양처럼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치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궁휼히 여기는 마음”의 옷자락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그것을 잡는 순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위기가 있습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남보다 더 가져야하고, 더 높아진다고 되겠습니까? 돌을 가지고 빵으로 만드는 은혜를 받았다고, 높은 탑 위에서 떨어져도 천사가 떠받치는 능력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를 다 가질 수 있는 권력과 힘을 가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나보다 남을 더 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궁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배려하는 마음, 그래서 나를 포기하고, 줄 수 있는 이런 마음으로 “목자 잃은 양” 과 같은 우리를 치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 치유와 화해를 만들어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