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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일을 당했다구요!(연중 29주)

작성자최도미닉|작성시간16.10.15|조회수116 목록 댓글 1

2016. 10. 16 (연중29주일 )/ 창세32:23-32, 2디모3:14-4:5, 루가18:1-8

터무니없는 일을 당했을 때 주를 의지하라

어느 날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너 세상 그렇게 살지마!”

순간 내 마음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이런 메시지를 보냈을까? 그런데 잠시 후에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 보냈습니다.”

 

참 묘하지요. 잠시였지만 이 이유 없는 메시지는 나를 혼란스고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오해를 사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또 서로 다른 생각과 판단들 때문에 좋왔던 관계가 상처를 입고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뜻과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이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참으로 억울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라고 했습니다. “얼울한 일” “특별한 잘못도 없는 데 누명을 쓸 때 쓰는 말입니다. 이유 없이 당하는 억울한 일,정말 쓰리고 아프고, 정말 혼란스럽고 힘들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일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가족 간에, 그리고 가까운 이웃과 교회 안에도 늘 이런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여기에 걸리면 우리의 믿음은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때문에 이 암초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암초를 극복해 낼 수 있을까요?

 

우선 하느님을 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고약한 재판관을 찾아가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과부가 왜 그토록 끈질기게 졸라댔을까요? 비록 의롭지 못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졸래대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 잡아 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과부는 몰인정한 재판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확신을 갖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이런 상황 앞에서 이 과부처럼 주님께 매달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과부처럼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느님을 찾으라 하십니다. 야곱이 환도 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어도 천사의 샅바를 놓지 않았던 것처럼 주님께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과 화해하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형을 향해 갑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형이 4백 명의 부하를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가족은 뒤로 빠지고 선물과 종들만 먼저 보냈습니다. 참으로 약은 수입니다. 이게 우리의 생각이고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몰인정한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재판관이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까지 세고 계시며, 골수를 쪼개 그 생각과 처지를 다 아시는 재판관이십니다. 그리고 내 발 헛디딜까 염려하시고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고, 나를 지켜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드네, 도움 어디서 오는가. 나의 도움은 주님께로부터 온다.” 이처럼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은 나를 지켜주시는 분, 나를 지키시기 위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터무니없는 오해 앞에 하느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느님의 방식대로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은 별일이 아니었습니다.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을 미워해서 치기 위해 온 것 아니라 환영하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터무니없는 일들을 보면 처음에는 무슨 큰 일 같지만 사실 별일 아닙니다. 문제는 야곱과 과부처럼 우리들의 문제를 사랑의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내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만스럽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선택은 하느님께 나를 맡길 때 가능한 일입니다. 잠언3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믿어라. 잘난 체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야훼께 여쭈어라. 그가 네 앞길을 곧바로 열어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페320절 이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주님이 열어주실 것이요,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십니다. 과부처럼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느님께 매달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 ‘너무나 성가시게 구니 소원대로 판결해주어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찾아와서 못살게 굴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인내하기를 원하십니다. 쉬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응답이 이루어 질 때까지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포기하지 말고 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3절에서 이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 그것은 고통과 시련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길을 끈기 있게 갈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그 일이 진리의 길이라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일이라면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그 일이 실패했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그 일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렇습니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리라.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다”(하바2:2)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십시오. 꾸준히 하노라면 거둘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수고하고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습니까? 선택과 삶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식도, 느낌도 아닙니다. 삶입니다. 주님은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마지막 날에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선택과 삶입니다. 결국 신앙이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움은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선택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바울로가 로마로 후송될 때의 일입니다. 유리굴라라는 태풍을 만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마침 멀리 섬 하나가 보입니다. 바울로는 사람들에게 배가 가라앉기 전에 섬을 향해 헤엄쳐 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왔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해변 가에 모두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바울로는 쉴 틈도 없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 속에 넣었습니다. 바울로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쳐있는 이들을 위해 장작을 들어 불 속에 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작을 넣으려고 할 때 그 속에 숨어 있던 뱀이 바울로의 손을 물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들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분명히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정의의 영신이 살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수군 거렸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자신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사람들은 바울로를 위로하기는커녕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로가 행했던 모든 행위가 시기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질투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일을 당한 것입니다.

죄인인 주제에 잘난 체 하네, 이런 일을 하다 꼴좋다!”

사실 이런 말이 바로 독사입니다. 바울로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저 같았으면 독이 퍼지듯이 분해서 온 몸을 떨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몸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바울로가 이 일로 크게 실망하고 낙담하고 그 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리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아무 말 없이 그 뱀을 불속에 넣어버렸습니다.

 

바로 이 선택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독사가 뭡니까?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줍니까? 나를 무시하는 말이 있나요, 모함하는 말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독침을 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도 독사처럼 독을 쏘겠습니까? 아니면 이런 독사를 불 속에 넣어 버리겠습니까?

이런 독사가 물었을 때 그 독에 빠져서 아파하고, 분노할 것이 아니라 불속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과부의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이유는 지식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느끼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야곱처럼 환도뼈가 부러지는 아픔이 있어도, 주님이 주신 길을 선택할 수 있고, 살아 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로, 또 이유 없는 시련과 아픔이 있을 때 내 뜻이 아닐 주님의 뜻을 잡으십시오. 주님이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 눈을 들어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움은 주님을 잡을 때 거기에서 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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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Wicky | 작성시간 16.10.15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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