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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강화읍 선교의 역사적 의미③ : 3. 강화 의병운동과 성공회 - 이덕주 목사

작성자주춧돌|작성시간09.09.15|조회수141 목록 댓글 0

              성공회 강화읍 선교의 역사적 의미 ③

 

 

                                                       이 덕주 목사 (신학박사/ 감리교신학대학원 강사)

 

 

 

3. 강화 의병운동과 성공회

 

 

       3.1 감리교인들의 희생 

성공회와 감리교가 강화 선교를 착수한 1893년 이후 10년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받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여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조약을 체결함으로 국권의 상징인 외교권과 내정권을 늑탈하였다. 이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운동도 강하게 일어났으니 특히 19078월 정미조약 직후 강제 해산당한 군대 출신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조직적인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정미 의병이라 하는데 진위대가 있던 강화에서도 이동휘·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이 주도한 의병이 일어나 전투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 한 사람이 살해되었고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였던 강화 군수 정경수가 의병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에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가 강화에 급파되어 견자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을 진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나왔다.

 

이같이 강화에서 의병운동으로 인한 혼란이 빚어질 때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가?

이번 경우에도 감리교와 성공회의 대응은 달랐다.

감리교인들이 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투쟁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운동을 지지하거나 적극 참여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우선 강회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던 이동휘는 강화 진위대장 출신으로 1905년 강화읍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후 보창학교를 설립하고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던 한말의 대표적 민족운동가였다.

그는 강화읍교회 권사로서 강화 전 지역을 순회하며 "나라를 되찾으려면 한 마을에 교회 하나, 학교 하나씩 세워야 한다"는 내용으로 계몽 강연회를 개최하여 소위 '11(一洞一校)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선교사들은 이런 그에게 '강화의 바울'(Paul of Kangwha)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E.M. Cable, "WEst Korea District", Minutes of Annual Session of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이하 MASK), 1905, 64쪽)

 

연기우·지홍윤 등 강화 의병을 실제로 이끈 의병장들은 진위대장 시절 이동휘의 지휘를 받았던 부하 장교들이었으며 이동휘 자신도 의병에 가담했다가 일본군 진압부대를 피해 탈출했다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동휘가 '감리교 권사'였다는 사실로 감리교회는 민족주의 단체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감리교회는 큰 희생을 치르어야 했다.

 

즉 의병을 진압하러 들어온 일본군 수비대가 강화읍에 진주하고 의병 가담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체포되었는데 그 가운데 강화읍교회 권사였던 김동수와 그의 동생 김영구, 사촌 동생인 김남수 등 3형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진압군에 체포되어 인천으로 압송되던 중 재판도 받지 않고 더리미 해안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江都誌』, 제 15장, 36쪽; C.S. Deming, "Chemulpo District", MASK., 1908, 35쪽)

 

이들이 의병에 직접 가담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대한자강회 회원이었던 김동수는 평소 이동휘와 함께 민족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특히 강화 군수 정경수가 총무로 있던 일진회를 규탄하는 연설을 자주 하여 일진회원과 감리교인 사이에 충돌이 자주 빚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평소에 '반일'(反日)적 성향의 행동을 취하였던 김동수와 그의 형제들이 일진회원들의 지목을 받은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희생된 것이다.

 

       3.2 성공회와 민족운동

이같은 상황에서 성공회는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가? 우선 성공회 교인으로 이 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되거나 희생당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강도지』기록에서 의병과 관련된 성공회 신부들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

 

"守備隊軍이 遂入城하여 進據見子山하야 將行大攻擊하니 一城危禍判在呼吸이라. 時任郡主事 黃翊周와 英人 段雅德(聖公會 主敎)이 次第上山하야 與守備隊將官으로 交涉하야 稍緩其鋒하고 其散棄軍器는 一邊收去하고 流民을 超集安堵하얏스나 不良 民等이 互相鼓簧하야 瓦全玉碎의 禍가 一時에 慘憺하얏나니라."

(『江都誌』, 제 15장, 36쪽)

 

정리하면, 의병 진압차 강화읍에 들어온 일본군 수비대가 견자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성안을 공격하려 준비할 때 강화군 주사 황기주와 성공회 터너 주교(주.한국명 2대 단아덕 주교)가 일본군 수비대장을 찾아가 공격을 멈추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의병과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거두어 반납하는 한편 주민들을 불러 모아 회유하던 중 일부 주민들의 선동으로 실패로 돌아가 결국 유혈 참상이 빚어졌다는 내용이다.

 

당시 선공회 주교 터너는 여름 휴가차 강화에 내려와 있다가 의병 '난리'(?)를 맞았다.

의병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갑곶으로 나가 강화를 떠나려 했지만 의병들에게 막혀 강화읍 성당에 머물다가 일본군 수비대의 진압 과정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한 곳은 성당이 위치한 곳과 같은 견자산이었다.

 

터너의 증언이다.

"그들(일본군)이 상륙하자 한국 군인들은 강화읍으로 퇴각하였는데 일본군이 기관총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는 그날 저녁으로 거의 대부분 도망쳤습니다.

밤늦게까지 간간히 총소리가 들렸으나 우리는 날 샐 때까지 잘 잤습니다.

아침에 깨어 보니 일본군은 동문과 남문 사이에 위치한 우리 주택 맞은 편 언덕을 점령하고 눈에 띄는 모든 것에 사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두 세 시간 동안 집중 사격을 하고는 병사를 풀어 읍에 내려보내 응사하는 세력이 있는가 조사하였는데 아무런 대응이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저는 지휘관을 만나 보려고 그리로 올라가 제가 파악하고 있는 모든 내용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물로 병사들에게 주라고 맥주 몇 병을 올려 보냈습니다."

(A.B. Turner, "The Bishop's letter", MC., Jan., 1908, 5쪽)

 

1차 진압 작전이 끝난 후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터너는 '화목 제물'(peace offering)로 맥주 몇 병을 가지고 올라가 일본군 지휘관을 만나 앞서 『강도지』에 언급되었던 바와 같이 무기 반납을 조건으로 주민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려와 주민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일본군은 일진회원을 앞세우고 강화읍 전체를 수색하여 방화와 혐의자 체포에 나섰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 학교에 다니던 '상투 자른' 학생 두 명이 군인으로 오해받고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고 의병에 연루되었던 성공회 교인 몇 명도 신부들의 권고로 자수하고 조사 받은 후 풀려났다.

 

"우리 교인 중에는 한 두 명이 이번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그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끌려 총을 들게 되었고 그 중 한 사람만 총을 쏘았고 다른 사람들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무기를 무기고에 반납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처벌을 면했으며 우리 충고를 받아들여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일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위 글, 7쪽)

 

터너 주교는 강화읍에 있던 신부와 수녀는 물론이고 성공회 교인 중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은 것과 '총소리가 나는 중에도 주일 미사를 평소처럼 드릴 수 있었던 것''대단히 감사'(very thankful)하였다.

반면에 감리교회 쪽에서 상당한 희생이 나온 것은 '아주 운이 없는'(not so fortunate) 일이었다.

 

"(반면에) 미국 감리교회 친구들은 아주 운이 없었는데 일본 당국은 그들 교인 몇몇이 이번 폭동에 관련 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그러했는지 그 여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일진회와 군수를 비난하였고 그 결과 일진회원들에게 미움을 사 교인 몇 명이 체포되었으며 더욱 불행한 것은 감옥에 갇혔던 죄수 일곱 명이 서울로 압송되다가 그 중 네 명이 총살당한 것입니다."

 

터너의 증언에 나오는 희생자 4명은 감리교의 김동수·김영구·김남수 3형제와 또 다른 희생자 김근식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터너의 눈에는 이들의 희생은 교회에 '아주 운이 없는' 사건이자 '불행한'(unfortunate) 사건이었다.

 

반면에 감리교 선교사들은 이들의 희생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였다.

강화읍 감리교회는 의병운동을 겪은 후 오히려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는데 선교사들은 그 현상을 김동수를 비롯한 3형제의 희생 결과로 보았다.

 

"강화 사업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강화 교회는 독자적으로 장로사 한 사람이 주재하며 일을 보아야 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는 곧 '피의 세례' 결과였습니다.

이 지역 일진회원들이 우리 교인들을 극도로 증오하고 또 악선전을 퍼부어 우리 교인들은 큰 위험에 처했고 그 결과 통감부 관리들이 올바르게 대응하지 못하여 적지 않은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정의의 심판은 신속하게 내려졌으니 강화 일진회는 해산되었고 그 지도자 두 명은 죄 값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C.S. Deming, "Seoul and Chemulpo District", MASK., 1908, 32쪽)

 

같은 사건인데도 성공회 선교사들은 '불행한 사건'으로, 감리교 선교사들은 교회 부흥을 가져온 '피의 세례'(baptism of blood)로 보았던 것이다.

감리교인들의 희생으로 강화 주민들 사이에 감리교회의 민족주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었고 그 결과 감리교 입교가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의병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을 보는 성공회와 감리교회의 시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터너를 비롯한 성공회 선교사들은 '교인을 보호한다'는 원칙에 충실하여 일본군에 '화목 제물'을 올려 보냈고 진압 작전에 협조하도록 교인들에게 지시하였으며 이런 류의 정치 운동에 가담하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그 결과 강화읍 성공회는 의병운동 과정에서 희생자 한 명 나지 않은 '행운'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태도도 성공회 특유의 '중도 신학', '3의 길'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적대적인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3의 길'을 추구하였다.

실제로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인 선교 못지 않게 일본인 선교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억압받는 한국인에 대한 관심 못지 않게 총독부 관리를 비롯한 일본인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06년 영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일영동맹에 영향을 받은 면도 있겠지만 국가 권력에 충성을 하는 '고교회' 전통의 성공회 선교사들에게 한반도에서 일본이라는 통치권력에 저항하는 신앙이나 정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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