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작이라는 《대성당》 소설집을 제법 기대를 품고 샀습니다. 표제작이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상찬이 자자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체로 소설수업을 카버로 부터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소설을 한번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책을 펼쳐 그 안에 실린 〈깃털들〉, 〈셰프의 집〉, 〈보존〉까지 내리 세 편을 읽었지요.
그런데 책장을 덮은 순간, 가슴 속에서 밀려드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지독한 지루함과 서늘한 불쾌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썩어가거나, 타인의 기묘한 행복을 겉모습만 흉내 내다 제풀에 무너지고, 환경이 조금 바뀌었다고 술을 끊은 척하다가 이내 다시 파멸을 준비합니다. 이 지루하고 무가치하게 이어지는 온갖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며 나는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무기력한 인간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나열해서 얻는 게 무엇이며, 내가 이 소설읽기에서 뭘 배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 편을 보고 나니 더는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나 버려, 혹시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주변에 묻기까지 했습니다.
평론가들은 이 소설들이 지닌 ‘여백의 미’나 문학적 상징들에 극찬을 보냅니다. 마당을 서성이는 공작새, 흉측한 치아 교정틀, 고장 난 냉장고 같은 것들이 대단한 인생의 진실을 품고 있다는 서술입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그저 본질(Genotype)은 전혀 다른데 외형(Phenotype)의 똬리만 대충 묶어놓은 억지스러운 장치들로 보였습니다. 줄무늬가 조금 닮았다고 해서 성질이 전혀 다른 돌들을 ‘호피석’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강제 분류해 버리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직관적인 공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카버가 배치한 상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인물들의 비합리적인 투사이자 착각일 뿐, 내 가슴을 울리는 진짜 삶의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소설이라면 마땅히 사건과 사건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갈등이 있고, 나름의 해결점이나 인물이 움직이는 주체적인 ‘벡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카버의 소설은 인간의 비루한 단면을 그저 XY축 위의 한 점으로 찍어놓은 정지된 좌표계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를 통신 공학의 ‘반송파(Carrier Wave)’에 비유해 보면 그 답답함의 실체가 명확해집니다. 어떤 정보를 보내기 위한 전파인 반송파에 진폭을 더하면 AM이 되고, 주파수를 바꾸면 FM이 되며, 위상을 변조하면 PM이 됩니다. 그러나 반송파가 어떤 방식으로 변조되었든 우리가 라디오를 켤 때 귀를 기울이는 것은 가장 풍부하고 맑은 음질로 전달되는 내부의 ‘음악’이지, 신호를 실어 나르는 그릇에 불과한 ‘반송파’가 아닙니다. 음악이라는 메시지가 중요하지 반송파라는 그릇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카버를 추천하는 이들은 수식어를 아끼고 건조하게 사실만 기술하는 그의 미니멀리즘 문체, 즉 반송파를 만지는 기술적 세련미에 열광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릇을 근사하게 빚어놓았 한들, 그 안에 실린 음악이 빈약하고 무력하다면 그것은 독자의 귀를 찌르는 화이트 노이즈일 뿐입니다. 평론가들만 만점을 주고 정작 관객들은 하품하며 나가는 흥행 실패 영화를 본 듯한 불쾌감이 바로 여기에서 옵니다.
이런 무기력의 나열을 마주하다 보니 문득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가 떠올랐습니다. 전쟁의 구체적인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형은 진짜 아픈 ‘환자(병신)’입니다. 반면 아우는 형과 같은 구체적인 아픔의 원인이 없으면서도, 형의 고통을 멀리서 관찰하고 상상하며 알 수 없는 무력감 속에 함께 신음하는 ‘상상 환자(머저리)’입니다. 형에게 고통은 삶의 생생한 증상이지만, 아우의 아픔은 그저 증상의 흉내일 뿐입니다. 메시지는 병신이고 반송파는 머저리인 셈인데, 나는 도대체 무엇이 좋다고 그 병증을 따라 하며 쓰잘데없는 신음을 흘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 삶의 야전에서 상처를 입은 진짜 병신의 고통은 리얼하고 극적이지만, 그 병이 나으면 신음은 씻은 듯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아픈 척 흉내를 내는 머저리는 구체적인 원인이 없기에 치유의 대상도 없습니다. 그래서 치료되지 않는 병신보다, 병증을 흉내 내다 진짜 병신이 되어버린 머저리(말더듬이를 흉내내다가 실제로 말을 더듬는 것처럼)가 문학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더 끈질기게 오래 살아남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되곤 합니다. 카버의 소설 속 인물들과 그들의 냉소를 세련미로 포장하는 문학관이 바로 이 머저리의 세계와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무기력한 머저리의 오래가는 신음보다, 비록 삶의 현장에서 찢기고 다쳐 병신이 될지언정 마침내 그 병을 스스로 고쳐내고 자신이 아팠다는 사실조차 깨끗이 잊어버린 채 대지를 딛고 일어서는 ‘치료된 병신’이 훨씬 좋습니다.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도약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벡터, 그것이 바로 반송파의 노이즈를 뚫고 우리에게 도달해야 할 진짜 삶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카버의 책을 덮으며 내 안목을 의심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독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도약이 거세된 잿빛 세계관을 거부하는 내 내면의 단단하고 건강한 이정표가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해봅니다. 껍데기만 요란한 반송파를 치워버리고, 머저리의 가짜 신음 대신 치료된 인간의 당당한 발걸음을 보고 싶다는 주체적인 선언인 셈입니다. 그러니 이 지루한 소설집을 과감히 내려놓으려 합니다. 내 삶의 라디오는 앞으로도 더 가치 있고 풍부한 주파수의 진짜 음악을 연주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