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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민의 촌정필담

71. 초례봉 2

작성자촌사람(이동민)|작성시간25.07.01|조회수32 목록 댓글 0

 

초례봉의 바위가 보인다.
초례봉 남근석 아래에 있는 알터이다.

 

초례봉 2

    삼국사기 제사조에 의하면 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렸다. 명산대천에 올리는 제사는 자연신(천신이나 산신)에게 올린다. 자연신에 올리는 제사는 특정의 제실을 짓지 않고 자연에서 그대로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왕건이 초례정에서 올린 제사도 자연신에 올린 제사로 볼 수 있다.

 제사를 올리는 성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특정 장소가 된다. 말하자면 초례정은 우리 민족이 선사시대부터 제사를 지내던 성소이었을 것이다.

 신석기-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과 유물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다 알다시피 무덤이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성소로도 알려져 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제사의례 유적은 암각화이다. 암각화가 있는 곳은 고대인들이 제사를 올리던 성소이다. 암각화는 바위를 위시하여 고인돌에 많이 남아 있다. 고인돌에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흔한 것이 성혈이다. 여수시 오림동의 고인돌, 김해시 도황리 고인돌, 경주시 내남면 고인들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의 알터(성혈)는 이곳이 선사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신앙하던 상징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대구에서는 진천리에 청동기 시대의 무덤 터에서 선돌(立石)과 성혈이 발굴되었다.

 그뿐 아니다. 포항의 칠포리, 고령의 양전리, 영천의 보성리 등에 알터 유적이 있다. 모두가 선사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신앙지이다. 즉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내가 초례봉을 답사하여 주변을 찾아 보았을 때도 여러 개의 알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알터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치된 주장을 한다.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곳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몸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것과 땅에서 식물이 자라고,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프레이져는 이와 같은 고대인의 사유 세계를 유물주술, 감염주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끼리 서로 영향을 준다는 논리이다. 고대인들은 땅에서, 사냥에서 많은 수확을 바라기 위해서 신앙의 대상으로 생산을 하는 여신을 모셨다. 여신을 상징화한 것이 알터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여신 신앙의 흔적을 무수히 많이 만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산신이 여신이었다고 한다. 운제산 신모를 비롯하여 치술령의 망부석도 여신의 상징이다. 고을의 산마다 남아 있는 옥녀봉, 선녀바위도 여신을 모셨던 흔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성혈이 있는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는 초례봉은 선사시대에 여신을 신앙했던 성지이다.

사진 내pc 팔공산 –초례봉 남근석 아래 바위의 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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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로운 것은 팔공산 줄기가 남서쪽으로 뻗어내리면서 환성사 뒤편에 우뚝 솟은 봉우리 이름이 감투봉이다. 초례봉보다 높다. 마을 사람들은 감투봉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나는 얼핏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투거리’란 말은 여성 상위 체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초례봉에 상응하는 봉우리로서 여성을 상징히는 의미가 아닐까? 성기 신앙은 성 결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례봉은 신라 시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제사의례를 올리던 성소이었으므로 전투를 앞 둔 왕건이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견우와 직녀가 초례를 치루었다는 전설과 복을 가져다준다는 복조리 이야기를 토대로 초례봉을 한 번 고찰해 보자. 여자의 몸에서 많은 생산을 바란다는 것은 ‘성결합’을 전제 한다. 견우와 직녀가 치룬 초례는 성결합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여신 신앙에서 배필이 되는 남신이 등장하는 사회 배경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견우의 등장은 남성신의 등장이다. 성기신앙에서도 시회의 변화에 맞추어 여성 성기를 상징하는 성혈에서 남근석이 등장함을 볼 수 있다. 아곳운 풍요와 다산에 여신만이 아닌 남신도 관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남신의 상징은 남근석이다. 흔히 선돌신앙 또는 입석신앙이라고 한다. 진천리의 청동기 유적지에서도 성혈이 새겨져 있는 남근석을 발굴하였다. 초례봉의 정상에는 남근석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신앙을 이야기 할 때 가장 흔히 바위신앙과 선돌신앙을 말한다. 초례봉은 바위와 선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거기에 성혈까지 있다. 후대로 갈수록 남신이 힘을 발휘하지만 무속신앙에서는 지금도 여신이 힘에 세다.

 고려말기에 운문사와 동화사를 근거지로 하여 초적과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군이 이들 운문적을 토벌하고 나서 팔공산에 산신제를 올린 제문이 있다. 여기서는 남신의 명칭인 대왕(大王)이라고 하였다. 팔공산의 산신이 이미 남신으로 바뀌어서 성혈의 의미가 많이 축소되었으리라 추측한다.

 불교가 민간 신앙으로 스며들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고대의 성지는 불교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마을 주민들도 토속 신앙터를 떠나서 사찰로 자리를 옮기면서 옛 성지는 점차 잊어진 것이 아닐까? 왕건이 올렸던 대대적인 제사도 이제는 더 이상 올리지 않음으로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초례봉은 점차 잊어져 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민속 신앙은 쉽게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초례봉을 조리봉으로 바꾸어 부르면서도 복조리라 하여 무의식적으로 기복을 하였을 것이다. 다산과 풍요가 기복신앙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리봉도 고대의 다산과 풍요 신앙과는 일맥 상통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고대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 신앙은 祈子(기자)신앙으로 살아 남는다. 전국의 산에 버티고 남아 있는 남근석들이 그들이다. 상투바위, 촛대바위라 부른다. 좀 더 고상한 이름으로 필봉, 미륵바위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아예 *바위라고 원색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 바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선돌신앙의 잔재이고 성기신앙의 흔적이다. 민간신앙으로 살아 남아서 지금도 기능을 하는 곳이 많다.

고대 농경신앙에서 기자 신앙과 기우 신앙이 가장 신앙이 깊은 자발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동체가 복리를 위하여 올리는 의례는 개방적인 장소에서 축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치룬다고 한다. 풍년제나, 동제, 기우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남자들이 주도하여 축제로 치룬다.

기자 신앙은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아 선호 사상은 기자 신앙을 더욱 불을 붙였다. 기자 신앙은 여인들에 의하여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 사회에서 농경신앙이었던 성기신앙과 기자 신앙은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아 선호 사상은 기자 신앙을 더욱 불 붙였다. 기자 신앙은 여인들에 의하여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 사회에서 농경신앙이었던 성기 신앙이 조선시대에 기자 신앙으로 바뀌었다. 기자 신앙은 공동체 의례와는 성격이 달랐다. 개인적인 의례일 뿐 아니라 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은밀하게 치루었다. 신앙 대상인 성석(性石)은 여근, 남근, 성교합 형상의 자연물이 대상이 된다. 대개의 경우에 여인들이 치성을 올리는 성석은 산 속 깊숙한 곳에 있다. 지금도 성기 신앙은 민간 신앙으로 숨쉬고 있다. 성석의 주변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명산 대천에서 제사를 올렸던 산신기도가 기자신앙으로 바뀌었음을 심청전에서도 볼 수 있다. ‘앞 못 보는 심봉사 마누라도 품팔아 모은 돈을 몽땅 털어 명산 대천에서 굿을 하고, 대찰에 불공을 드려서 심청을 낳았다.’ 라고 하였다.

요약하면 초례봉은 고대 사회에서는 공동체적인 번영을 기원하는 성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공동체의 의례는 잊혀지고 개인의 기복을 바라는 민간 신앙처로만 존재하였다. 조선시대가 되면 남아선호사상과 맞물려서 기자 신앙터로 은밀하게 이어져 왔다. 그러나 오늘은 그곳이 무엇을 하였는지 조차 잊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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