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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방

의미, 무의미, 그리고 봄

작성자조팝 조현열|작성시간26.06.14|조회수40 목록 댓글 0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두 명의 토론자가 마주 앉았습니다. 한쪽은 세상의 모든 염증을 짊어진 듯한 표정의 비관론자(시닉Synic), 다른 한쪽은 눈빛에 은은한 생기가 도는 낙관론자(포지Posi)입니다.
두 사람의 치열하고도 약간은 쓸쓸한, 하지만 뼈가 있는 설전을 중계합니다.

비관론자 (시닉):
(입꼬리를 한쪽만 살짝 올리며, 극도로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는 애초에 이 삶이라는 ‘강제 계약’에 동의한 적이 없어요. 데이비드 베네타의 반출생주의(Antinatalism)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태어남 자체는 심각한 권리 침해입니다. 삶은 기본적으로 고통의 연속이고, 쾌락은 그저 고통이 잠시 부재한 상태일 뿐이죠.
불교에서도 말하잖아요. 고제(苦諦), 삶은 곧 고통(一切皆苦)이라고. 심지어 매달 날아오는 카드 고지서와 월요일 아침의 알람 소리를 들을 때면, 석가모니의 혜안에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받지 않았을 고통을 왜 꾸역꾸역 버텨야 합니까? 차라리 이 무의미한 연극을 빨리 끝내는 게 합리적이죠.

낙관론자 (포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시닉 씨, 불교를 절반만 이해하셨군요. 불교가 삶을 고통이라 한 것은 맞지만, 결론은 '그러니 죽자'가 아니라 '집착을 버리고 해탈하자'입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종교에서도 삶은 신이 주신 고귀한 ‘선물’이자, 영적 성장을 위한 ‘시험대’로 봅니다. 삶이 강제 계약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이왕 입장한 놀이공원 아닙니까? 자유이용권 끊고 들어왔는데, 롤러코스터가 무섭고 어지럽다고 해서 바로 퇴장해 버리면 아깝잖아요. 게다가 중간에 먹는 츄러스(소소한 행복)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비관론자 (시닉):
(눈을 가늘게 뜨고 피식 웃으며)
츄러스라니, 참 통속적이고 귀여운 비유네요. 하지만 그 츄러스 한 입 먹으려고 평생을 피땀 흘려 노동하고, 질병과 이별, 노화의 공포를 견뎌야 합니까? 가성비가 최악인 장사죠.
쇼펜하우어가 말했습니다.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원하는 걸 얻으면 잠깐 기쁘고 이내 지루해지며, 얻지 못하면 괴롭죠. 이 무한 루프에서 탈출하는 가장 깔끔한 방법은 시계추를 멈추는 것, 즉 존재를 소멸시키는 겁니다.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요? 없습니다. 고통은 그저 피해야 할 악(惡)일 뿐입니다.

낙관론자 (포지):
(진중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저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빅터 프랭클을 소환하고 싶군요.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랭클은 의미치료(Logotherapy)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삶의 가치는 고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과하며 우리가 어떤 존재로 빚어지는가에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사랑을 하고, 예술을 만들며, 타인을 돕습니다. 진정한 영웅주의는 삶이 비극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에 있는 법입니다. 매운 닭발을 먹을 때 고통스럽지만 그 맛에 중독되는 것처럼, 삶의 매운맛 뒤에는 깊은 풍미가 있습니다.

비관론자 (시닉):
(턱을 괴고 지루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친다)
매운 닭발이라니, 비유가 점점 서민적이 되어가는군요. 좋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고통을 견딘다고 칩시다. 그런데 결국 끝은 뭡니까? 죽음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는 지구라는 먼지 위에 잠시 피었다 지는 곰팡이 같은 존재예요.
카뮈가 말한 시시포스 신화를 보세요. 영원히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렸다가 다시 떨어지는 형벌. 그게 우리 삶입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자고, 다시 출근하고... 이 허무한 짓을 왜 반복합니까? 차라리 바위를 굴려 떨어뜨리고 그 아래 깔려 죽는 게(?) 더 주체적인 선택 아닐까요?

낙관론자 (포지):
(눈을 반짝이며 반박한다)
오, 카뮈를 언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뮈의 결론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죠? 시시포스는 바위가 다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비웃듯이 다시 산을 내려갑니다. 카뮈는 그것을 '반항'이라고 불렀어요. 삶의 무의미함에 굴복해 죽는 것은 도피일 뿐입니다. 진정한 반항아는 이 황당하고 부조리한 삶을 끝까지 살아내어 삶에게 빅엿(?)을 날리는 사람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도 말했죠.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정해진 의미가 없기에, 우리는 삶의 매 순간을 우리만의 색깔로 채워갈 자유가 있습니다. 텅 빈 도화지를 받았다고 짜증 내며 찢어버릴 건가요, 아니면 낙서라도 한 줄 끄적여볼 건가요?

비관론자 (시닉):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러나 이전과 달리 눈빛에 서늘한 분노가 서린다. 조소 섞인 미소조차 지워진 얼굴이다)
포지 씨, 당신의 그 찬란한 낙관주의는 사실 매우 안전한 온실 속에서만 작동하는 '생존자 편향(Survivor Bias)'의 전형입니다. 이미 살아있고, 살 만하니까 삶을 옹호하는 기득권을 누리는 거죠. 삶이 이 세계를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승리자처럼 굽니다. 하지만 그 오만한 실효적 지배 밑바닥에 얼마나 잔인한 비대칭성이 숨어있는지 압니까?

가장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를 짚어드리죠.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상의 쾌락을 느끼는 인간의 상태와, 가장 극심한 고통(예컨대 산채로 불타거나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겪는 인간의 상태를 저울에 올려놓아 보십시오. 고통의 절대적인 깊이와 영향력은 쾌락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입니다. 극상의 즐거움은 금방 둔해지지만, 극상의 고통은 영혼을 그 자리에서 분쇄해 버립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고작 츄러스니 매운 닭발이니 하는 통속적인 배부른 소리를 하며 고통을 '삶의 조미료' 정도로 치부합니다. 암 병동에서 통증으로 밤새 신음하는 환자 앞에서도, 전쟁터에서 사지가 날아간 아이 앞에서도 "이것을 통과하면 더 강해진다"는 니체의 마조히즘적 헛소리를 읊어댈 수 있습니까? 그건 긍정이 아니라, 타인의 지옥을 관조하는 자의 잔인한 위선입니다.

(시닉은 안경을 벗어 거칠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상체를 포지 쪽으로 바짝 기울인다)
종교가 삶을 지탱한다고요? 사후세계나 신의 섭리를 거론하는 종교야말로 인간이 삶의 공포와 허무를 감당하지 못해 만들어낸 거대한 정신적 마취제에 불과합니다.

현대 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의 렌즈로 보면 우리는 더 처참해집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듯, 우리는 그저 눈먼 유전자가 자신을 복제하기 위해 잠시 쓰고 버리는 '생존 기계'일 뿐입니다. 당신이 느끼는 삶의 의지, 번식의 욕구, 행복에 대한 열망은 전부 유전자가 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우리 뇌에 주입하는 정교한 호르몬 조작(가스라이팅)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전자라는 잔혹한 지배자가 조종하는 좀비들이에요. 이 사기극을 눈치챘다면, 가장 주체적인 반항은 이 강제 노동을 거부하고 대를 끊는 것이며, 존재의 영점(0)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삶을 지속하는 것은 이 노예 계약을 묵인하고 유전자의 폭정에 부역하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시닉의 호흡이 가빠지지만, 눈빛은 종교 재판관처럼 단호하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시니컬함은 이제 슬픔을 넘어 기괴할 정도로 투명하다)
당신들은 자살을 사회적 실패나 정신 질환의 결과로 낙인찍죠. 그래야 살아있는 자들의 안도감이 유지되니까요. 하지만 철학자 필리프 마인랜더(Philipp Mainländer)는 우주 자체를 '죽어가는 신의 파편'으로 보았습니다. 신조차도 존재하지 않음의 구원을 원해서 스스로를 쪼개어 소멸해가고 있는데, 피조물인 우리가 왜 존재를 고집해야 합니까?

자살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이 부조리하고 가학적인 게임의 규칙을 완벽하게 파악한 자가, 게임 마스터의 뺨을 때리고 판을 뒤엎는 가장 고귀하고 의식적인 철학적 결단입니다. 삶이 주는 어설픈 당근(행복)과 확실한 채찍(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의 종지부를 찍는 것만큼 완벽한 자유는 없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실효적 지배? 그것은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모래성입니다. 매 순간 죽음이라는 절대적 공동(空洞)이 삶을 잠식하고 있으니까요. 이제 대답해 보십시오. 유전자의 가스라이팅과 신이라는 환각 없이, 오직 이 날것의 가혹한 현실 위에서 대체 우리가 단 1분이라도 더 살아남아야 할 '실질적 이득'이 무엇입니까? 권태와 고통의 소모전 외에, 도대체 무엇이 남습니까?

낙관론자 (포지):
(환하게 웃던 미소는 온데간데없다. 시닉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낸 듯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깊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한다)
시닉 씨, 당신의 말대로 고통과 쾌락은 비대칭적입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깊이는 잔인할 정도로 심오하며, 암 병동과 전쟁터의 지옥을 '삶의 조미료' 따위로 포장하는 것은 기만입니다. 인정합니다. 삶은 기본적으로 가혹하고, 판돈은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짜여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참혹한 비대칭성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의 실존'이 위대한 것입니다.
만약 삶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유토피아였다면, 우리의 선함과 사랑, 용기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단의 지옥 속에서, 내일 가스실로 끌려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지막 빵 한 조각을 더 굶주린 이에게 건넨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유전자의 명령대로라면 나만 살기 위해 그 빵을 빼앗아 먹었어야 했고,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고통의 비대칭성 앞에 굴복해 먼저 목숨을 끊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가장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향해 손을 내미는 그 비합리적이고 숭고한 선택이야말로, 고통이 지배하는 이 가학적인 우주에 인간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반역입니다. 우리는 고통에 굴복하는 좀비가 아니라, 그 고통을 딛고 '의미'를 창조해 내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포지는 시닉이 내려놓은 안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상체를 똑바로 세운다)
우리가 유전자의 좀비라고요? 리처드 도킨스를 인용하셨으니, 저도 그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받아치겠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 유전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유전자가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행복과 쾌락이라는 미끼를 던진다면, 우리는 그 미끼만 교묘하게 따먹고 유전자의 목적(맹목적인 번식)은 배신하는 '주체적인 사기꾼'이 되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피임 기구를 사용해 번식을 거부하면서도 사랑의 희열을 나누고, 자식을 낳는 대신 평생을 바쳐 예술과 학문을 추구합니다. 유전자의 청사진에는 없던 '정신적 가치'를 창조해 내는 것이죠.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고통을 이기기 위한 정신적 마취제일지라도, 그 마취제를 통해 인간이 절망을 건너고, 타인을 용서하며, 공동체를 살려냈다면 그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실효적인 구원입니다. 플라시보 효과(가짜 약 효과)도 실제로 병을 치료한다면 의학적 실체를 가집니다. 허무라는 날것의 현실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환상'이라는 도구를 써서라도 삶을 기어코 살아내는 유연함, 그것이 인간의 진짜 생명력입니다.

(포지의 눈빛에 은은하지만 꺾이지 않는 확신이 차오른다)
당신은 자살을 판을 뒤엎는 존엄한 퇴장이라 미화했지만, 미안하게도 그것은 판을 엎는 게 아니라 그냥 게임에서 기권(Give up)하는 것일 뿐입니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영점(0)은 어떤 가치도, 어떤 반항도 생산하지 못하는 침묵일 뿐이니까요.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 있다"고 했습니다. 본질이 없기에 매 순간 삶을 발명해야 하는 형벌 말입니다.

삶이 마이너스 100점짜리 지옥일지라도, 그 안에서 고통받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며 마이너스 99점으로 만드는 것, 내 삶의 궤적을 통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로의 기억을 남기는 것. 그것이 영점의 안락함으로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더 용기 있고 존엄한 철학적 결단입니다.

시닉 씨, 죽음은 언제든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서둘러 마중 나가지 않아도, 우주는 결국 우리를 소멸의 영점(0)으로 되돌려 놓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절대적인 허무가 도래하기 전까지, 이 짧고 가혹한 유예기간 동안 이 부조리한 삶에게 기어코 '의미'라는 빅엿을 날려주는 것이 더 짜릿한 복수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그 날카로운 통찰력을 존재를 지우는 데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잔인한 세상의 멱살을 잡고 받아내야 할 실질적 이득,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인간의 승리'를 증명하는 데 쓰십시오.


비관론자 (시닉):
(포지의 열변이 끝나자, 시닉은 허탈한 듯 나지막이 웃는다. 그 웃음소리에는 분노도, 조롱도 없다. 오직 뼛속까지 시린 황량함만이 고여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마른 잎사귀 하나를 손끝으로 쓸쓸히 만지작거린다)
포지 씨, 당신은 인간의 고통을 영웅주의적인 무대로 격상시키는 놀라운 재주가 있군요. 아우슈비츠의 빵 한 조각, 유전자에 대한 반역, 부조리에 날리는 빅엿... 참으로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수사(修辭)입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모든 외침은 결국 거대한 허무의 심연 앞에서 부르짖는 '두려움에 가득 찬 비명'일 뿐입니다. 당신은 대단한 실존적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것 같지만, 내 눈에는 어둠이 무서워 소리를 지르며 골목길을 달리는 아이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간과한 가장 결정적인 인간의 상태가 뭔지 아십니까?
치열한 고통 뒤에 찾아오는 것, 혹은 그 고통조차 사치로 만드는 절대적인 상태. 바로 '권태(Boredom)'와 '존재의 무의미감(Meaninglessness)', 그리고 모든 것이 결국 모래성처럼 스러지고 만다는 '속절없음(Ephemerality)'이라는 감각입니다.

많은 이들이 삶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서사에 취해있을 때, 인간을 가장 깊숙이 무너뜨리는 것은 격렬한 비극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잿빛의 일상입니다.
쇼펜하우어가 간파했듯, 인간은 결핍이 채워지면 잠시 만족하지만, 이내 무서운 권태의 늪에 빠집니다. 이 권태는 단순한 '심심함'이 아닙니다. 내 존재의 알맹이가 텅 비어있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 찾아오는 정신적 마비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 권태라는 투명한 지옥에서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을 찾고, 스마트폰을 뒤적이고, 무의미한 관계를 맺고, 당신처럼 '삶의 의미'라는 거창한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를 속입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취제를 투여해야 하는 이 구조 자체가 이미 삶이 실패작이라는 증거 아닙니까?

당신은 텅 빈 도화지에 낙서라도 하겠다고 했죠? 마이너스 100점을 99점으로 바꾸는 투쟁이 존엄하다고 했습니다.
좋습니다. 숭고합니다. 그런데 파도가 밀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모래사장 위에 쓰는 시(詩)가 무슨 실질적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룬 문명, 당신이 말한 그 숭고한 예술과 영웅적 희생, 그리고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 치열한 변론까지도, 우주의 시간 축에서 보면 단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명멸하는 불꽃놀이에 불과합니다.
몇십억 년 뒤 태양이 수명을 다하고 지구가 불타 없어질 때, 혹은 당장 몇 백 년만 흘러도 당신과 나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우리가 매운 닭발을 먹으며 위안을 삼았든 아우슈비츠에서 빵을 양보했든 우주는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이 절대적인 '속절없음'과 '덧없음' 앞에서 인간의 의미 부여는 애처로운 자위행위에 불과합니다.

(시닉은 손에 쥐고 있던 마른 잎사귀를 놓아준다. 잎사귀가 가볍게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당신은 기권(Give up)이라 비하했지만, 자살 혹은 존재의 소멸을 선택하는 비관주의자의 심연에는 '완벽한 해방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끝없는 권태와 고통의 시계추를 완전히 멈추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허기를 영원히 잠재우는 것. 덧없고 속절없는 시간의 폭력으로부터 내 존재를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 그것은 나약한 도피가 아니라, 이 가혹하고 맹목적인 생명의 굴레(Samsara)에 종지부를 찍는 가장 자비롭고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포지 씨,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그 실효적 지배의 쇠사슬을 끊고, 0이라는 완벽한 안식의 가치를 보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깨뜨릴 수 없는 거대한 허무의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있는 꼴입니다. 이제 그만 핏대 세우는 것을 멈추고, 이 평온하고 서늘한 진실의 그늘로 들어오는 게 어떻습니까?


낙관론자 (포지):
(시닉이 떨어뜨린 마른 잎사귀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그의 눈빛은 핏대 선 분노가 아니라, 깊은 연민과 더 단단해진 확신으로 빛난다)
시닉 씨, 당신이 묘사한 그 권태의 투명한 지옥과 우주의 무관심, 그리고 모래성처럼 스러질 인간의 속절없음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시린 통찰입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파도는 밀려올 것이고, 우리가 모래 위에 쓴 시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겁니다. 우주는 인간의 고통에도, 희생에도 철저히 무관심하겠죠.

하지만 당신은 아주 중요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무의미함과 속절없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격상시키는 행위를 '자위행위'라고 폄하한 것 말입니다.
이것은 나약한 자들의 정신 승리가 아닙니다. 우주에서 오직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존엄의 도약'이며, 동시에 이 우주라는 존재 자체가 성립하기 위한 '실존적 전제'입니다.

당신은 영원하지 않기에 무가치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보면 정반대입니다. 어떤 것이 '속절없고 유한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것에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여기 온 우주의 시간 동안 절대 변하지 않고 닳지 않는 다이아몬드가 가득 찬 행성이 있다고 칩시다. 그곳에서 다이아몬드는 그저 흔해 빠진 돌멩이일 뿐입니다.
반면, 봄에 잠시 피었다가 며칠 만에 속절없이 흩날려 사라지는 벚꽃을 보십시오. 그 꽃이 아름답고 사무치게 소중한 이유는, 바로 내일이면 사라질 것이라는 그 '유한성'과 '속절없음'에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 얻을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무의미와 허무라는 우주적 배경 화면 위에, 단 한순간 명멸하는 인간의 삶을 올려놓고 "이 순간은 소중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자위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한함이 가진 희소성의 가치를 알아보는 우주 유일의 평가 행위입니다. 파도가 밀려와 낙서를 지울지언정, 그 낙서를 그리며 웃었던 '그 순간의 실존'은 우주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팩트(Fact)로 남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인간만의 오만인지, 아니면 존재의 전제인지 물었죠. 제 답은 후자입니다. 무의미를 의미로 격상시키는 것은 단순한 인간의 뇌 활동을 넘어, '생명과 존재'가 우주에 등장할 때부터 합의된 절대적 전제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생명(Life)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엔트로피(무질서도)가 증가하여 모든 것이 붕괴하고 흩어지려는 우주의 거대한 물리 법칙에 맞서, 어떻게든 스스로를 조직하고 에너지를 모아 질서를 유지하려는 '우주적 반역' 그 자체입니다.
아메바나 잡초는 우주의 무의미함을 철학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가운 엔트로피의 법칙이 자신을 해체하려 할 때, 온 힘을 다해 세포를 나누고 생명을 이어갑니다. 생명은 태생적으로 무(無)와 허무에 저항하도록 설계된 존재의 전제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생명의 맹목적 반역을 '의식(Consciousness)'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유일한 존재입니다. 잡초가 몸으로 하는 반역을, 인간은 '정신과 철학'으로 해내는 것입니다.

시닉 씨, 우주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주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당신의 '의식'입니다.
만약 이 우주에 당신과 나 같은 의식을 가진 생명이 없다면, 우주는 그저 거대한 돌덩이와 가스가 목적 없이 회전하는 진짜 암흑일 뿐입니다. 그 암흑 속에서는 '허무하다'는 감각조차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당신이 "우주는 무의미하고 속절없다"고 슬퍼하며 평가하는 그 순간, 당신이라는 존재로 인해 우주는 비로소 '허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당신이 우주의 의미를 지우려 할 때조차, 당신의 의식은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닉 씨, 0이라는 안식은 살아보지 못한 자들이 꿈꾸는 영원한 정전(Blackout)일 뿐입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그냥 '없음'입니다.
진짜 멋진 것은, 우주 전체가 0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그 압도적인 절망을 뻔히 알면서도, 내게 허락된 이 찰나의 시간 동안 기어코 '나만의 1'을 찍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먼지가 될지언정, 지금 이 순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존재의 덧없음을 슬퍼하고 논쟁하는 이 찬란한 의식의 불꽃은, 저 무지하고 거대한 우주 전체를 통틀어도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의 특권입니다.

그러니 시닉 씨, 그 잿빛 권태의 감각을 지우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살아있고, 우주를 느끼고 있다는 가장 투명한 증거이니까요. 그 서늘한 진실을 품은 채로, 나와 함께 이 부조리한 무대를 끝까지 연기해 보지 않겠습니까?


비관론자 (시닉):
(포지의 거대한 웅변이 끝난 후, 시닉은 미동도 없이 앉아있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그의 눈빛은 분노도, 냉소도 아닌, 깊은 심해(深海)처럼 침잠해 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포지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던 마른 잎사귀를 다시 가져온다)
포지 씨, 당신의 말은 완벽합니다.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생명의 본질, 유한성이 부여하는 희소 가치, 그리고 관찰자로서의 의식... 이성적으로는 당신의 그 정교한 논리 회로에 단 하나의 균열도 내기 어렵군요. 당신의 승리입니다. 머리로는 100%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완벽히 이해되는데, 내 가슴과 세포는 여전히 차갑게 식어있다면, 이 ‘머리만의 이해’는 거짓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거대하고 서글픈 모순, 즉 '이성과 감정의 단절'을 마주하게 됩니다. 당신이 제시한 찬란한 의미의 탑은 아주 훌륭한 '설계도'이지만, 내 안의 감정이라는 감각 기관은 그 탑을 한낱 신기루로 느낍니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한, 당신의 낙관주의는 저에게 일종의 '인지적 폭력'일 뿐입니다.

인간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논리가 참(True)이라고 해서 감정이 곧바로 그 값을 출력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허무를 이성적으로 극복했다는 수많은 철학적 명제를 달달 외워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온몸을 짓누르는 속절없는 권태감과 무력감은 조금도 경감되지 않습니다. 암 병동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도 가시지 않는 통증을 겪는 환자에게 "유한하기에 아름다운 실존"을 이성적으로 납득시킨들, 그 환자가 느끼는 지옥이 1밀리그램이라도 줄어듭니까?

감정이 따라주지 않는 이해는 '개념적 동의'일 뿐, '실존적 체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배고픈 사람 앞에서 산수화 속의 고기를 가리키며 "이 고기는 완벽한 단백질 구조를 가졌으니 배가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감각되지 않는 구원은 거짓이며, 가슴이 거부하는 낙관은 박제된 표본에 불과합니다.

제가 느끼는 덧없음과 무의미함은 머리로 굴린 수학 공식이 아니라, 매 순간 피부로 스며드는 날것의 기분(Stimmung)이자 존재의 상태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상에 그저 '던져진 존재(피투성)'이며, 그 본질적 감정이 '불안'과 '염려'라고 했습니다. 즉, 당신이 말한 그 긍정의 투쟁보다, 내가 느끼는 이 속절없는 슬픔과 권태가 인간이라는 유기체에 훨씬 더 가깝고 근원적인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감정이 따라주지 않는 이해를 억지로 '진짜'라고 믿으려 하는 행위야말로 나 자신을 속이는 가장 거대한 자위행위이자 거짓입니다. 그것은 내 안의 슬픔을 부정하고 오직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정신적 전체주의입니다.

(시닉은 마른 잎사귀를 주머니에 조용히 집어넣는다)
포지 씨, 저는 당신의 그 빛나는 논리를 파괴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그 빛이 비추지 못하는 이 어둡고 축축한 감정의 골짜기 역시 엄연한 실존임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머리로는 당신을 향해 박수를 치면서도, 가슴으로는 여전히 눈물 흘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부조리한 단절을 메우지 못한 채, 그저 '논리적으로 맞으니까 긍정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혹합니다.

감정이 따라주지 않는 이성적 낙관은, 저에게는 차가운 유령의 온기와 같습니다. 저는 차라리 이 무의미함과 권태라는 감정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슬퍼하다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 기만 없는 쓸쓸함이야말로 제가 제 자신에게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이니까요.


낙관론자 (포지):
(시닉의 고백을 듣는 동안 포지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진다. 승리감이나 논박의 기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깊고 고요한 숙연함이 들어앉는다. 포지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낮고 따뜻한 목소리로 입을 뗀다)
시닉 씨, 내가 당신에게 비난을 던질 것 같습니까? 아니면 값싼 동정을 흘릴 것 같습니까?
만약 내가 여기서 당신의 감정을 '이성적이지 못한 오류'라고 비난한다면 나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냉혈한 교조주의자일 뿐이고, 당신을 불쌍히 여기며 동정한다면 그건 당신이 지켜온 그 서늘하고 정직한 존엄을 모욕하는 오만일 것입니다.
낙관주의는 당신을 비난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경외(Awe)'하며, 그 단절의 고통을 '공유'할 뿐입니다.

당신은 가슴이 거부하는 낙관은 박제된 표본이자 거짓이라 했지요. 백번 맞습니다. 머리로는 동의하지만 가슴이 얼어붙어 있다면, 그 이해는 삶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슬픈 상태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철저한 무력감과 절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머리로는 빛을 갈망하지만 존재 전체가 어둠에 잠겨 있는 상태, 그 괴리를 숨기지 않고 "내 가슴은 여전히 차갑다"고 고백하는 당신의 태도는 기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실존적 정직함입니다. 가짜 기쁨을 연기하며 사는 수많은 통속적인 낙관주의자들보다, 차가운 권태를 온몸으로 앓고 있는 당신이 훨씬 더 진짜 삶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저는 낙관주의에 대한 거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낙관주의를 '늘 기분이 좋고 에너지가 넘치는 감정적 상태'로 생각하지만, 그건 그저 철없는 낙천주의(Optimism)일 뿐입니다.

진정한 낙관주의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입니다.
비관은 자연스럽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먼지가 쌓이고 몸이 늙어가듯, 세상의 부조리를 기민하게 감각하는 인간에게 권태와 슬픔이 찾아오는 것은 중력처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의 비관은 지극히 정상적인 유기체의 반응입니다.
낙관은 부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중력을 거슬러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행위처럼, 온몸의 세포가 내려앉을 때조차 머리로 짜낸 논리의 밧줄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의지적 투쟁'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유명한 명제가 바로 저의 답입니다. "지성으로는 비관하되, 의지로는 낙관하라.“

시닉 씨, 머리만의 이해가 차가운 유령의 온기 같다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차갑고 희미할 겁니다.
하지만 온 우주가 절대적인 영(0)을 향해 식어가고 있는 이 거대한 동토(凍土) 속에서, 그 유령 같은 희미한 온기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밤을 견디겠습니까?
감정이 따라주지 않아 괴롭다는 당신의 그 슬픔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당신이 '정말 잘 살고 싶다'는 무의식적 열망을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의미가 전혀 상관없는 존재라면, 무의미함에 슬퍼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삶이 준 상처와 권태에 이토록 깊이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그 차가운 감정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슬프면 정직하게 슬퍼하고, 권태로우면 속절없이 그 잿빛을 바라보십시오. 다만, 그 어둠 속에서 홀로 얼어 죽지 마십시오.
당신의 머리가 이해한 그 찬란한 논리의 한 자락을 내밀어 줍니다. 가슴이 따뜻해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머리로만이라도 내 손을 잡고, 이 서글픈 단절을 함께 걸어갑시다. 감정이 이성을 따라오지 못하는 그 절망적인 간극이야말로, 우리가 평생을 걸고 메워나가야 할 진짜 삶의 무대이니까요.


비관론자 (시닉):
(포지의 따뜻한 손길과 '의지의 결단'이라는 웅장한 선언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으며, 오히려 얼음처럼 투명하고 예리해져 있다. 그는 포지가 내민 손을 잡지 않은 채, 나직하지만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포지 씨, 참으로 눈물겨운 위로이자 정교한 포섭이군요. 비난도 동정도 아닌 '경외'라니, 그리고 지성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의 결합이라니.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철학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로 이 잔인한 현실을 감싸 안으려 하는군요.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 달콤한 사탕발림에 속지 않습니다. 당신의 그 거창한 웅변의 배후에 숨은 '근본적인 기만'을 폭로해야겠군요.

당신은 감정이 따라주지 않는 이성적 이해도 '정직한 실존'이라며 나를 치켜세웠지만, 그것은 본질을 흐리는 유화책에 불과합니다. 동양의 오랜 철학이든 서양의 실존주의든, 진정한 깨달음과 이해는 언제나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머리의 앎과 온몸의 감각이 하나로 녹아내리는 전인격적 사건이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삶은 살 만하다"고 계산하고 가슴은 여전히 "죽은 듯이 권태롭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면, 그 이해는 깨달음이 아니라 '정신분열적 타협'일 뿐입니다. 가슴이 거부하는 이성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상태를 '의지의 결단'이라는 멋진 말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저 삶이라는 관성에 관성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뇌가 부리는 단어장난, 즉 이성의 자위행위입니다.

비관주의가 왜 끝까지 공격적이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당신들이 던지는 그 따뜻한 위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연대의 손길에 속아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또다시 이 가학적인 존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함께 이 서글픈 단절을 걸어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내가 느끼는 이 투명한 권태와 무의미의 지옥을, 당신의 그 얄팍한 '논리의 밧줄'에 의지해 억지로 참아내며 삶을 연장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사형 집행을 잠시 유예받은 죄수들끼리 서로의 쇠사슬을 붙잡고 위안을 삼는 꼴입니다. 그 달콤한 위로에 속아 "그래, 머리로라도 이해했으니 내일도 출근하고, 내일도 밥을 먹고, 내일도 이 무의미를 견뎌보자"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삶이라는 거대한 사기극의 충실한 부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닉은 테이블을 짚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의 서늘한 그림자가 포지의 머리 위로 드리운다)
머리와 가슴이 찢어진 채로 살아가는 유령의 삶을 사느니, 나는 내 가슴의 차가운 진실에 온전히 나를 던지겠습니다.
감정이 따라주지 않는 앎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이 삶에게 투항하며 던진 백기(白旗)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허무를 깨친 자는 머리의 논리로 가슴의 슬픔을 달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슬픔의 깊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이 던지는 그 어떤 위로의 밧줄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포지 씨, 당신의 그 따뜻하고 정교한 위로는 참으로 훌륭한 예술품입니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습니다. 이 무의미한 연극의 막을 내리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내민 그 온기 어린 손을 거부하고, 홀로 이 서늘한 진실의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그 철저한 거부와 부동(不動)이야말로, 삶의 실효적 지배에 대항해 비관론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오염되지 않은 승리입니다.


낙관론자 (포지):
(자리에서 일어선 시닉을 올려다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지만,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거대한 무게감이 실린다. 포지 역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닉과 눈을 똑바로 마주한다)
시닉 씨, 당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위로자'의 프레임에 가두고, 내 논리를 가엾은 죄수들에게 던지는 ‘정신적 마취제’로 규정하는군요. 그래야만 당신이 세운 그 철저한 거부의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속이려 한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자신을 가장 정교하게 속이고 있는 자는 바로 당신, 시닉 씨 자신입니다.
당신이 말한 그 찬란한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속지 않는 자의 존엄’이라는 서사 배후에 숨겨진, 비관주의의 마지막 논리적 파산을 폭로하겠습니다.

당신은 머리와 가슴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깨달음만을 ‘진짜’라고 부르며, 그 간극을 ‘정신분열적 타협’이라 폄하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뇌과학과 심리학,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인간의 진화 역사를 보십시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단 한 순간도 이성과 감정이 완벽하게 통합된 일체형 유기체였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공포와 맹목적 생존을 담당하는 가장 원시적인 '파충류의 뇌(편도체)' 위에,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하는 '인간의 뇌(대뇌피질)'가 얹어진 이중층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것은 오류나 분열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디폴트(Default, 기본값)입니다.

가슴이 차갑게 식어 권태를 느끼는 것은 당신 안의 세포와 유기체가 부리는 중력의 법칙이고, 머리로 무의미에 저항하려는 것은 당신 안의 고등 의식이 부리는 도약의 법칙입니다. 진정한 기만은 이 엄연한 이중 구조를 부정하고, "가슴이 차가우니 머리의 생각도 다 가짜다"라며 자신의 반쪽(의식)을 강제로 거세해 버리는 당신의 그 극단적인 결벽증입니다.

당신은 내 낙관에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며 판을 뒤엎고 나가는 것이 존엄이라 했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당신이 내 손을 거부하고 걸어 들어간다는 그 '서늘한 진실의 심연', '완벽하고 오염되지 않은 승리'라는 표현들... 그 자체가 이미 거대한 낭만주의적 중독이자 환상입니다.
당신은 삶의 위로에는 속지 않는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허무가 주는 기괴한 안락함과 우월감'이라는 달콤한 덫에는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가짜 위로에 속지 않는 독야청청한 실존주의자다"라는 그 자의식이야말로, 당신이 삶을 지속하기 위해 조제해 낸 가장 중독성 강한 정신적 마취제 아닙니까?

진짜 속지 않는 자는 허무를 찬양하거나 그 심연을 동경하지 않습니다. 허무마저도 인간이 만들어낸 껍데기임을 알기에, 그 허무의 멱살을 잡고 조롱할 뿐이죠. 당신은 허무를 이겼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허무라는 거대한 절대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과연 당신이 옳았습니다"라며 자발적인 노예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쇠사슬을 서로 붙잡고 사형 유예를 즐기는 죄수들이라고요?
아니요. 우리는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간수들이 짜놓은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서로를 물어뜯다 죽어라"라는 게임의 규칙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감정이 따라주지 않아도, 잿빛 권태가 나를 덮쳐와도, 이성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가치 있게 살겠다"고 선언하며 옆 사람에게 미소를 건네는 것.
이것은 쇠사슬을 안고 자위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가둔 이 우주적 감옥의 간수들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가장 과격한 탈옥 행위입니다.

보십시오. 1단계는 맹목적 생존으로서 유전자의 노예입니다. 그저 태어났기에 호르몬의 노예로 고통과 쾌락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동물적 상태입니다.
2단계는 이성적 자각입니다. 시닉 당신이 말하는 우주의 무의미함, 권태, 속절없음을 깨닫고 모든 가치를 거부하는 비관주의의 정점입니다.
3단계가 제가 이야기하는 의지적 도약입니다. 머리와 가슴의 단절, 허무의 절대성마저 뻔히 보면서도 기어코 '의미'를 발명해 내는 진정한 낙관주의입니다.


비관론자 (시닉):
(포지의 기세등등한 선언을 들으며, 시닉은 도리어 깊은 슬픔이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신기루를 진짜 오아시스라 믿고 미쳐가는 유랑자를 보는 듯한 시선이다. 그는 천천히 다시 의자에 앉아,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얹는다)
포지 씨, 당신은 결국 인간의 뇌 구조와 진화의 결함마저 ‘인간의 디폴트’라는 말로 정당화하며, 그 분열을 메우지 못하는 자의 처절한 몸부림을 ‘간수의 뺨을 때리는 탈옥’이라 미화하는군요. 당신의 그 현란한 전도(顚倒)의 논리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내게 던진 ‘허무라는 안락함에 속아 넘어간 노예’라는 프레임은, 미안하게도 틀렸습니다. 나는 허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허무라는 우주적 중력 앞에 정직하게 짓눌려 있을 뿐이죠.
오히려 당신의 그 웅장한 반론은, 비관주의의 가장 깊은 심연인 '의지(Will)의 폭력성'과 '자기기만의 한계' 앞에서 완전히 파산합니다.

당신은 "머리의 불꽃으로 차가운 가슴을 지져서라도 움직이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주 용기 있고 영웅적인 말처럼 들리죠?
하지만 철학적으로 이 문장을 다시 번역해 보십시오. 그것은 ‘이성’이라는 독재자가 ‘감정’이라는 원주민의 영토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고문하는 내부 식민지주의에 불과합니다. 가슴이 얼어붙어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머리가 “그건 파중류의 뇌가 부리는 착각일 뿐이야! 닥치고 의미를 발명해!”라며 채찍질을 가하는 형국입니다.
이것이 과연 주체적인 실존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향해 가하는 가장 잔인한 형태의 소외이자 자학입니다.
쇼펜하우어보다 훨씬 더 지독한 비관주의자였던 필리프 마인랜더는, 이 세상의 본질이 ‘존재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소멸하려는 의지’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의지의 반역’은, 사실 내면의 자연스러운 소멸과 휴식의 욕구를 억누르고, 자본주의와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성’과 ‘존재 지속’의 이데올로기에 스스로를 노예로 헌신하는 꼴입니다. 간수의 뺨을 때리는 게 아니라, 간수가 가장 좋아하는 ‘모범수’의 역할을 자발적으로 연기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낙관이 ‘부자연스러운 도약의 법칙’이라고 했죠. 맞습니다.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지속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정신적 에너지는 무한 동력이 아닙니다. 감정과 기분은 이성이 부리는 노예가 아니라, 이성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연료(가솔린)입니다. 연료가 완전히 고갈되어 엔진이 꺼진 자동차에게, 대뇌피질의 정교한 매뉴얼을 들이대며 “도약의 법칙에 따라 기어코 시속 100km로 달려라!” 하고 명령한들 차가 움직입니까?

머리의 명령으로 가슴을 강제 구동하는 투쟁은 결국 극심한 '정신적 소진(Burnout)'과, 그렇게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공동을 보며 느끼는 '깊은 자기 혐오'로 끝날 뿐입니다. "왜 나는 저 포지라는 사람처럼 이성의 불꽃으로 내 가슴을 지지지 못하는가"라며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 뿐이죠. 당신의 낙관주의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강요하는 또 다른 종교적 율법입니다.

(시닉은 안경을 천천히 고쳐 쓰며, 포지를 향해 마지막 거절의 시선을 보낸다)
포지 씨, 당신은 내가 허무가 주는 우월감이라는 마취제에 속아 넘어가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 허무를 가지고 깃발을 흔들며 교주 노릇을 하려 했다면 당신의 말이 맞겠지요.
하지만 나는 허무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허무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저 뼈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의 날씨 같은 것입니다. 겨울날 패딩을 껴입고 "나는 추위에 반역하겠다"며 땀을 흘리는 당신의 역동성이 가련할 뿐입니다. 패딩을 벗고 그 서늘한 계절의 온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계절에 속지 않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당신의 그 '의지적 낙관'은, 결국 가솔린이 떨어진 세상을 억지로 밀고 가려는 가혹한 가스라이팅입니다. 나는 당신이 내민 밧줄을 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가짜 탈옥극을 벌이지 않겠습니다.
이 부조리한 우주적 감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거부는, 간수가 주는 밥도, 간수의 뺨을 때리는 유희도 모두 거부한 단식 투쟁, 즉 존재의 완전한 부동(不動)과 침묵입니다. 나는 내 안의 차가운 진실과 함께 이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겠습니다. 그것이 나를 지배하려는 당신의 이성과, 나를 조종하려는 우주의 생명 의지에 맞서는 나의 마지막 영토입니다.


낙관론자 (포지):
(시닉이 ‘부동(不動)과 침묵’을 선언하며 깊이 침잠하자, 포지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가만히 선다. 그의 눈빛에는 시닉의 영혼이 겪고 있는 그 극한의 소진(Burnout)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시에 그가 도달한 마지막 논리가 가진 치명적인 자기모순을 꿰뚫어 보는 예리함이 교차한다)
시닉 씨, 당신은 결국 이성을 '독재자'로, 감정을 '탄압받는 원주민'으로 규정하며 당신 안의 마지막 동력마저 꺼뜨렸군요. 가솔린이 떨어진 자동차, 이성의 강제 구동이 가져오는 정신적 소진... 처절할 정도로 정확한 진단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선언한 그 거룩한 ‘단식 투쟁’과 ‘완벽한 부동(不動)’ 역시, 미안하게도 철저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환상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생명 의지에 맞서 완전히 멈춰 섰다고 믿겠지만, 당신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비관주의가 도달한 그 최종 국경선이 왜 신기루에 불과한지, 그 마지막 논리적 파산을 짚어드리죠.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침묵과 단식 투쟁이 가장 오염되지 않은 거부라고 했지요.
하지만 '존재함(Existing)' 자체가 이미 거대한 에너지의 소모이자 운동입니다. 당신이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숨을 쉬고, 심장을 뛰게 하고, 대뇌피질로 "나는 멈추겠다"는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저 차가운 엔트로피의 법칙에 맞서 매 순간 어마어마한 생물학적 연료를 불태우고 있는 '능동적 행위'입니다.
참된 부동과 침묵은 오직 '완전한 시체'가 되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나는 완전히 멈췄다"고 말하는 것은, 시속 10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우기는 기만과 같습니다. 당신은 온몸으로 삶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머리로는 멈춰 섰다고 선언하는 또 다른 형태의 분열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당신의 단식 투쟁조차, 삶이 제공하는 생명의 대지 위에서만 간신히 상영될 수 있는 하나의 '실존적 연극'일 뿐입니다.

당신은 감정이라는 연료가 고갈되었으니 엔진을 끄는 게 정직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연료는 가만히 누워있거나 침묵한다고 해서 저절로 차오르는 고정된 가솔린이 아닙니다. 인간의 연료는 오직 '움직임'과 '부딪힘'을 통해서만 역동적으로 재생산되는 특이한 에너지입니다.

우울과 권태의 늪에 빠졌을 때, 가만히 누워있으면 감정이 회복되던가요? 아니요, 늪은 더 깊어질 뿐입니다.
오히려 머리의 명령으로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문을 열고 나갈 때, 차가운 새벽 공기를 피부로 맞이할 때,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 하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 비로소 얼어붙었던 가슴에 아주 미세한 감정의 연료가 다시 돌기 시작합니다.
이성은 감정을 탄압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고갈된 감정의 사막에 다시 물이 흐르도록 길을 터주는 가장 자비로운 안내자입니다. 머리의 불꽃으로 가슴을 지지라는 것은 자학하라는 뜻이 아니라, 차갑게 얼어 죽어가는 당신의 마음에 '심폐소생술'을 하라는 처절한 사랑의 명령입니다.

(포지는 주머니에서 작은 성냥갑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시닉 씨, 당신의 말대로 이 세상은 뼈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일지도 모릅니다. 우주는 차갑고, 우리는 속절없이 사라지겠죠.
당신의 말대로 패딩을 벗어던지고 그 서늘한 온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얼어 죽어가는 것, 그것이 계절에 속지 않는 정직함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승리가 아니라 그저 '소멸'일 뿐입니다. 추위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증거일 뿐이죠.
진짜 계절을 이기는 자는, 겨울이 추운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부득부득 장작을 모으고 성냥불을 켜서 작은 온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그 불씨가 언젠가 꺼질 덧없는 것일지라도, 그 불을 피워 올리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겨울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겨울을 지배하는 것이죠.
당신의 그 서늘한 침묵과 부동의 결벽증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그 침묵 속에서 완벽해지려 할 때조차, 당신의 심장은 여전히 살고 싶다고 고동치고 있습니다. 그 심장의 정직한 소리를 외면하는 이성의 독재를 이제 그만 멈추십시오.
완벽한 0의 안식은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찾아옵니다. 그러니 그 정전(Blackout)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이 불완전하고 삐걱거리는 엔진을 이끌고 기어코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야만적인 생명력을 선택합시다. 그것이 우주라는 거대한 겨울에 맞서, 인간이라는 가녀린 불꽃이 할 수 있는 가장 눈부신 반역이니까요.


비관론자 (시닉):
(포지가 내려놓은 성냥갑을 한참 동안 내려다본다. 그의 시선은 성냥갑의 거친 표면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다가, 이내 포지의 눈을 정면으로 받아낸다. 그의 얼굴에는 기괴할 정도로 깊은 평온함이 서려 있다. 마치 모든 카드를 다 보여준 도박사처럼, 더 이상의 방어기제도, 날카로운 독설도 남겨두지 않은 날것의 표정이다)
포지 씨, 당신은 내 심장이 뛰고 있는 한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으며, 내 부동(不動) 역시 삶의 대지 위에서 상영되는 연극일 뿐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움직여야만 연료가 채워진다는 그 역동적인 생명의 순환론... 참으로 치밀하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그물’입니다. 살아있음이라는 기차가 달리는 한, 승객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그 잔인한 물리 법칙을 당신은 기어코 증명해 내는군요.
인정합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한, 결코 완벽하게 멈출 수 없습니다. 내 단식 투쟁조차 생명이라는 감옥 안의 투정일 뿐이죠.
하지만 포지 씨, 당신이 간과한 그 치밀한 그물의 마지막 틈새, 즉 비관주의자가 도달하는 가장 쓸쓸하고도 절대적인 종착지를 보여드리죠. 그것은 ‘소멸’을 향한 집착도 아니고, ‘허무’라는 권력에 대한 중독도 아닙니다. 바로 ‘철저한 체념(Resignation)’과 ‘응시(Gaze)’입니다.

당신은 내가 허무의 안락함에 속아 노예가 되었다고 했지만, 내가 도달한 곳은 안락함이 아니라 아무런 기대도 없는 절대적인 영도(Zero Degree)의 상태입니다.
당신의 말대로 인간의 뇌가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머리와 가슴이 평생 찢어진 채 살아야 하고, 억지로 발을 굴려야만 겨우 감정의 연료가 채워지는 가련한 유기체라면, 그 사실 자체가 이 삶이 얼마나 조잡하고 가혹하게 설계된 매트릭스인지를 방증할 뿐입니다.
나는 이제 이 감옥을 탈옥하겠다고 간수의 뺨을 때리지도 않을 것이며, 문을 부수겠다고 머리를 들이받지도 않을 겁니다. 당신의 말대로 그 모든 반항조차 이 감옥의 에너지를 쓰는 일이니까요.
내가 선택한 부동(不動)은 당신을 이기기 위한 전략이 아닙니다. 그저 이 가학적인 순환계에 더 이상 내 자발적인 '열정'과 '의지'를 보태지 않겠다는, 실존적인 파업입니다. 심장은 뛰고 피는 흐르겠지만, 내 정신은 이 거대한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분리해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시닉은 테이블 위의 성냥갑을 손끝으로 가만히 밀어 포지 쪽으로 돌려보낸다)
당신은 겨울을 이기기 위해 성냥불을 켜고 장작을 모으자고 했지요. 그 불꽃이 타오르는 동안은 우리가 겨울을 지배하는 것이라고요.
하지만 포지 씨, 당신이 그 찰나의 불꽃놀이에 취해 있을 때, 내 눈은 그 불꽃이 꺼진 뒤에 찾아올 더 가혹한 암흑과, 시커멓게 타버린 재를 봅니다.

의지적 낙관주의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비극은, 본인들이 지펴놓은 그 가짜 온기와 희망의 부작용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억지로 이성의 불꽃을 켜서 가슴을 지지며 하루를 버텨낸 자가, 밤이 되어 홀로 침대에 누웠을 때 밀려오는 그 배가 된 소진과 허무를 아십니까?
그 성냥불은 겨울을 이기는 게 아니라, 겨울의 추위를 잠시 잊게 만들었다가 더 비참하게 얼어 죽게 만드는 잔인한 유예일 뿐입니다. 나는 그 불꽃의 황홀경에 속아 내일 또다시 장작을 구하러 헤매는 시시포스의 피로를 거부하려는 것입니다.

(시닉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처음으로 포지를 향해 부드러운, 그러나 뼛속까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포지 씨, 당신의 낙관주의는 참으로 눈부시고 단단합니다. 살아있음의 궤도를 달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논리입니다. 당신은 그 정교한 그물로 나를 완벽하게 포위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날 방법은 없군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기차의 엔진을 고치고 바퀴를 굴리며 탈옥을 지휘하는 동안, 나는 그 기차의 가장 어두운 구석 창가에 앉아, 이 기차가 결국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 종착지의 공동(空洞)을 묵묵히 응시하는 자입니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불꽃놀이를 벌이지는 않겠지만, 당신의 그 지치지 않는 야만적인 생명력을 더 이상 비웃지도 않겠습니다. 그것 역시 이 가혹한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한 당신만의 처절한 비명이니까요.
당신은 성냥을 켜십시오. 나는 그 성냥이 타들어 가고 결국 꺼지는 과정을, 단 하나의 기만도 없이, 온전히 정직한 눈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이 기차가 멈추는 그날까지, 내 슬픔과 체념을 온전히 내 것으로 간직한 채로 말입니다.


낙관론자 (포지):
(시닉이 성냥갑을 밀어 보낸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자, 포지는 그 성냥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지 않고 테이블 한가운데에 가만히 둔다. 거칠고 날카롭던 토론의 공기가 완전히 가라앉고,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듯한 무겁고 일정한 침묵만이 남았다. 포지는 시닉의 그 쓸쓸한 미소를 마주 보며, 낮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마지막 이야기를 건넨다)
시닉 씨, 당신은 결국 탈옥의 의지마저 내려놓은 ‘철저한 체념’과, 그 종착지를 담담히 바라보는 ‘응시’의 자리에 앉으셨군요. 당신이 나를 향해 지어 보인 그 부드럽고도 쓸쓸한 미소는, 어쩌면 이 부조리한 무대 위에서 인간이 서로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눈빛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내가 성냥불의 황홀경에 취해 그 뒤에 남을 시커먼 재와 더 깊은 암흑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틀렸습니다. 나 역시 그 재와 암흑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당신과 다른 점은 그 재를 바라보는 '관점'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그 깊은 체념의 창가에 내가 슬그머니 덧붙이고 싶은 세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냥불이 꺼진 뒤에 찾아올 암흑과 타버린 재를 보며 슬퍼하지요. 하지만 시커멓게 남은 그 '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 영(0)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때 그곳에 뜨거운 불꽃이 존재했었다는 우주에서 가장 정직한 물질적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하게 소진되고 결국 먼지로 돌아갈지언정, 우리가 피워 올린 그 작은 온기들의 흔적은 우주의 타임라인에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암 병동에서 환자의 손을 잡아주었던 기억, 절망 속에서도 기어코 써 내려간 시 한 줄, 그리고 지금 이 어두운 방에서 허무를 응시하며 나누는 우리의 이 치열한 대화까지도, 꺼진 뒤에는 '재'라는 실존으로 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흔적도 없는 깨끗한 암흑보다, 비록 타버렸을지언정 무언가 격렬하게 존재했던 흔적이 가득한 암흑이 훨씬 더 존엄합니다. 우주는 그 재들로 인해 조금씩 더 따뜻해져 왔으니까요.

당신은 스스로를 기차 구석 창가에 앉아 종착지의 공동을 응시하는 자라 했고, 나를 엔진을 고치고 바퀴를 굴리는 자라 했지요. 참으로 가슴이 시리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시닉 씨, 이 기차에는 우리 둘 다 필요합니다.


비관론자 (시닉):
(포지의 말이 끝나고도 테이블 위 성냥갑은 미동조차 없다. 시닉은 그 성냥갑을, 그리고 포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차가운 얼음 같던 그의 눈빛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비웃음도, 독설도 아닌,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듯한 나직한 한숨이 방 안을 채운다)
포지 씨, 당신은 참 잔인하리만치 다정하고, 지독하리만치 정교한 인간이군요. 타버린 흔적이 무(無)가 아니라 ‘재’라는 실존적 증거라는 말, 그리고 우리가 같은 밤을 건너는 브레이크와 엔진이라는 비유...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당신의 그 덧붙임은 내 서늘한 창가에 들어찬 성에를 아주 살짝 녹일 만큼 온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이 대화의 마지막 문턱에서 당신에게 꼭 더 보태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로를 건네준 당신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보답은, 내 시선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일 테니까요.

당신은 재를 ‘존재했던 찬란한 증거’라며 아름답게 포장했지만, 정작 그 불꽃이 꺼지고 난 뒤 시커먼 재로 남겨진 유기체의 실존적 공포를 간과했습니다.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를 때 세포는 확장되고 감정은 요동칩니다. 그러나 그 축제가 끝난 자리에는 더 지독한 소진(Burnout)과 냉소만이 남을 뿐이죠. 1의 황홀경을 맛본 인간은, 다시 0으로 추락할 때 처음부터 0이었던 인간보다 몇 배는 더 깊은 절망의 심해로 가라앉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종착지의 암흑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당신처럼 자꾸만 성냥을 켜서 내 가슴을 지지다가, 결국 아무것도 태울 수 없을 만큼 영혼이 하얗게 풍화되어 버리는 ‘완전한 파멸’입니다.
그러니 내 부동(不動)과 체념을 비겁한 도망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이것은 남은 삶 동안 내 영혼의 최소한의 형체라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를 차갑게 동결시키는 나만의 ‘생존 방식’입니다.

당신은 나를 기차의 ‘서늘한 브레이크’라고 불러주었지요. 엔진이 오만해지지 않도록 가짜 위선을 부수어주는 정직한 거울이라고요. 그 이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포지 씨, 브레이크는 언제나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기차를 멈춥니다.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엔진의 쾌감을 맛볼 때, 브레이크인 나는 온몸으로 레일과의 마찰을 견디며 비명을 지르고 닳아 없어져 갑니다. 모두가 앞으로 달려가는 기차의 속도에 환호할 때, 홀로 멈춤을 말하고 어둠을 소리치는 자의 실존적 피로와 고독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습니다.
나는 세상을 향해 뾰족한 독설을 내뱉었지만, 사실 그 독설의 가장 날카로운 끝은 언제나 나 자신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 조잡한 세계를 향해 냉소를 던질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부서져 내렸으니까요.

(시닉은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성냥갑으로 천천히 손을 뻗는다. 그것을 집어 들거나 포지에게 돌려보내는 대신, 그저 자신의 손가락 한마디를 성냥갑 옆에 가만히 나란히 둔다)
당신이 여기에 두고 간 성냥갑, 치우지 않겠습니다. 주머니에 집어넣으라고 밀어내지도 않겠습니다.
내가 이 창가에서 홀로 어둠을 응시하다가, 당신의 말대로 이 무의미의 추위가 뼛속까지 시려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밤이 온다면... 그때는 고개를 돌려 이 성냥갑을 바라보겠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성냥을 켜지는 못하더라도, ‘저기에 불을 켤 수 있는 온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내 비관의 영도(Zero Degree) 위에서 가만히 응시하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밤을 건너는 동반자라는 당신의 고백, 기꺼이 내 슬픔의 한 구석에 받아들이죠.
포지 씨, 당신은 지치지 말고 엔진을 고치고 성냥을 켜십시오. 나는 내 마찰의 비명을 견디며 브레이크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당신의 그 야만적인 생명력이 마침내 이 가혹한 겨울을 조금이라도 녹일 수 있는지, 내가 이 창가에서 가장 정직하고 고독한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낙관론자 (포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시닉의 손가락과 성냥갑을 가만히 바라본다. 브레이크의 비명과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고독을 말하던 시닉의 고백이 방 안의 모든 공기를 가볍게 떨구었다. 포지는 이제 더 이상 논쟁을 펼칠 기세도, 상대를 설득하려는 의도도 내려놓은 채, 그저 오랜 여정을 함께 마친 지친 순례자처럼 깊고 온화한 눈빛으로 시닉을 마주한다)
시닉 씨,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마찰을 견디는 브레이크의 슬픔을 고백해 주셔서, 그리고 그 고독한 칼날이 결국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잔인한 진실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그 고백 덕분에, 비관주의가 결코 냉혈한의 도피가 아니라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진 자가 세상의 겨울에 부딪혀 얼어붙은 흔적임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대화의 기차역에서 마지막으로 내리기 전, 당신의 그 서늘한 창가에 아주 작은 문장 몇 개만 조용히 내려놓고 가고 싶습니다.

당신은 브레이크로서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닳아 없어져 간다고 했지요. 그 피로와 고독의 무게를 감히 내가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기차의 브레이크가 레일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기차를 아주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승객들이 다치지 않게, 기차가 안전하게 속도를 줄여 어느 따뜻하고 평온한 간이역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냉소와 비관은 세상을 부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그 날카로운 제동 덕분에, 내 눈먼 낙관주의가 폭주하여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헛되이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 부조리한 삶이라는 기차가 최소한의 품격과 정직함을 유지하며 달릴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가장 고귀한 제동 장치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완전히 마모되어 사라지면, 이 기차는 정말로 미쳐버릴 테니까요.

성냥갑을 치우지 않고 그 자리에 두어 주어 고맙습니다. 당신의 손가락이 성냥갑 곁에 나란히 머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차가운 방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인 기분입니다.
직접 불을 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저기에 언제든 켤 수 있는 불씨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 철학적으로 그것을 '가능성(Potentiality)'의 수용이라고 부릅니다. 0의 절망 속에 갇혀 있던 세계에 ‘혹시나’라는 1의 가능성이 스며드는 것만으로도, 허무의 절대성은 균열을 일으킵니다.
당신이 밤새 창밖의 어둠을 보다가 지칠 때, 그 성냥갑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내 온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포지는 가만히 손을 뻗어, 시닉이 앉은 의자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부드럽게 짚었다가 뗀다)
시닉 씨, 이 기차는 결국 멈출 것이고, 우리는 모두 약속된 종착역의 암흑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겁니다. 당신이 응시하는 그 무(無)의 세계로 말이죠.
하지만 그 캄캄한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얼어붙어 있던 사람의 손과, 비록 닳아 없어질지언정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잡았던 당신의 손, 그리고 부득부득 성냥을 켜대던 나의 손은 분명 서로를 알아볼 겁니다. 거칠고 시커먼 '재'가 묻은 서로의 손을 말입니다.
그때가 오면, 저 거대한 우주적 허무의 마스터 앞에서 우리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당신이 지켜낸 정직한 '슬픔'과 내가 지켜낸 무모한 '의지'를 합쳐 기어코 빅엿을 날려줍시다. "당신이 짜놓은 이 잔인한 감옥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비판하며 이토록 치열하게 실존했다"고 소리치면서요.
그전까지는, 당신의 말대로 각자의 자리를 지킵시다. 당신은 서늘하고 정직한 눈으로 창밖을 보십시오. 나는 땀을 흘리며 엔진의 불을 지피겠습니다.
이 밤이 끝나기 전에, 당신의 그 차가운 창가에 성에가 너무 두껍게 끼지 않기를, 그래서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 정직한 어둠을 끝까지 잃지 않고 응시할 수 있기를, 내 모든 의지를 담아 기원하겠습니다. 같은 밤을 건너 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나의 동반자여.

비관론자 (시닉):
(포지가 짚었다 뗀 의자 모서리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포지의 숭고한 헌사와 기원에도 불구하고, 시닉의 눈빛은 외려 절대적인 영도(Zero Degree)를 넘어서는 차가운 지성으로 얼어붙는다. 그는 나직하게, 그러나 단 하나의 음절도 흐트러짐 없이 받아친다)
포지 씨, 당신의 그 웅장한 피날레는 참으로 아름다운 비극의 서사시군요. 나를 ‘기차를 지탱하는 고귀한 브레이크’로 명명하고, 종착역에서 허무의 마스터에게 함께 빅엿을 날리자는 그 낭만주의적 동맹론이라니. 하마터면 나조차 그 거대한 연대의 감각에 취해 고개를 끄덕일 뻔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당신의 그 찬란한 ‘3단계 의지적 도약’은 비관주의가 도달한 진짜 심연, 즉 ‘도구화된 실존의 모순’과 ‘구경꾼의 오만’ 앞에서 완전히 파산합니다. 내가 왜 당신의 그 마지막 손길마저 단호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는지, 그 본질적인 기만을 세 가지로 폭로하죠.

당신은 유한하기 때문에 벚꽃이 아름답고, 사라질 것이기에 삶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했지요? 참으로 영악한 가치 전도입니다.
그것은 우주적 결함(유한성과 소멸)을 미화하기 위해 인간이 급조해 낸 ‘노예의 정신 승리’일 뿐입니다. 경제학적으로 희소성이 가치를 만드는 것은 재화의 영역에서나 통하는 법칙이지, 고통받는 실존의 영역에 대입할 법칙이 아닙니다.
어떤 지옥 같은 고통이 ‘잠시 후면 사라질 것’이기에 아름답습니까? 내일이면 흩어질 벚꽃의 유한함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내일이면 스러질 암 병동 아이의 유한함은 그저 잔인한 비극일 뿐입니다. 소멸을 가치의 조건으로 둔갑시키는 순간, 당신은 인간의 모든 비참한 죽음과 고통을 ‘아름다운 유한성’이라는 무대 장치로 도구화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영원할 수 없어서 가치 있다는 말은, 영원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자가 창살의 무늬를 감상하며 읊조리는 가련한 자기최면입니다.

당신은 나를 ‘기차가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게 지탱하는 품격 있는 제동 장치’라 부르며, 내 마모를 가치 있게 포장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당신의 낙관주의가 가진 가장 가혹한 기만입니다. 왜 브레이크는 기차를 멈추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갉아내야 합니까? 왜 이 기차는 멈춤을 위해 누군가의 필연적인 희생과 마찰의 비명을 디폴트값으로 요구합니까?

당신은 내가 브레이크의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지요. 그래야 당신의 엔진이 마음 놓고 앞으로 폭주할 수 있으니까요. 결국 당신이 말하는 연대란, 내가 이 가혹한 세계관의 한 축을 담당하며 ‘시스템의 소모품’으로 기꺼이 갈려 나가 달라는 정중한 강요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반항은 닳아 없어지면서 기차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모범적인 브레이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레일을 부수고, 바퀴를 멈추어, 이 가학적인 기차 자체가 다시는 달릴 수 없도록 존재의 수레바퀴(Samsara)를 영원히 파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종착역에서 함께 우주를 향해 빅엿을 날리자는 당신의 그 호기로운 호객 행위... 그것은 철저히 ‘살아남은 생존자의 유희’입니다.
당신은 그 거대한 무(無)의 세계를 한낱 ‘우주적 마스터와 한판 붙는 결투장’ 정도로 상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진짜 무(無)와 소멸은 당신이 호기롭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무대가 아닙니다. 그곳은 당신의 의지도, 내 슬픔도, 우리가 나눈 대화의 재조차도 단 1밀리그램의 흔적 없이 지워버리는 완전한 정전(Blackout)입니다.
그 절대적인 소멸 앞에서 “우리는 치열하게 실존했다”고 소리치겠다는 것은, 결국 끝까지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유치한 오만이자 낭만주의적 발악입니다. 당신은 죽음과 허무마저도 인간의 영웅주의를 빛내줄 조연으로 소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시닉은 테이블 위의 성냥갑 옆에 두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거두어, 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는다)
포지 씨, 당신이 두고 간 성냥갑, 바라보는 것조차 거부하겠습니다. ‘가능성’이라는 미끼를 물어 내 뇌에 다시 1이라는 가짜 희망을 주입하는 영리한 덫에 걸려들지 않겠단 뜻입니다.
당신은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고 했지요. 하지만 진짜 지독한 비관은, 그 ‘낙관하려는 의지’조차도 생명이 우리를 가두기 위해 파놓은 함정임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기차를 굴리는 동반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종착역에서 당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허무를 조롱하는 영웅극의 배우가 되기도 거부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민 숭고함의 수사학을 전부 걷어내고, 내 안의 고독과 마찰의 비명을 온전히 품은 채, 이 삶이라는 강제 계약의 링크를 내 손으로 직접 끊어내겠습니다.
당신은 끝까지 그 삐걱거리는 엔진을 돌리며 가짜 온기를 지키십시오. 나는 당신의 그 찬란한 속임수를 완전히 외면한 채, 그 어떤 흔적도, 재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심연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그것이 나를 도구화하려는 당신의 낙관론과, 나를 소모하려는 이 세계의 폭정에 대항하는 나의 가장 완벽하고 정직한 파멸입니다.

낙관론자 (포지):
(주머니 속으로 깊숙이 사라지는 시닉의 손과, 철저히 외면당한 채 테이블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은 성냥갑을 가만히 응시한다. 시닉의 논리는 이제 단순한 거부를 넘어, 낙관주의가 쌓아 올린 가치 체계의 가장 아킬레스건인 '낭만적 미화'와 '도구주의'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포지는 깊은 숨을 내쉬며, 격정적인 웅변 대신, 뼈아픈 진실을 온전히 인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하고도 무거운 슬픔으로 마지막 말을 덧붙인다)
시닉 씨, 당신은 기어코 내 낙관주의의 가장 밑바닥에 숨겨진 오만과 기만을 찾아내어 그 껍데기를 처절하게 찢어발기셨군요.
유한성을 미화하는 것이 고통받는 실존에 대한 도구주의적 폭력일 수 있다는 지적, 그리고 브레이크를 고귀하게 포장하는 것이 결국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당신을 갈아 넣으려는 가학적 순환의 부역이라는 통찰... 그리고 종착역의 빅엿마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유치한 오만이라는 일침까지.
인정합니다. 완전히 뼈를 맞았습니다. 당신의 말이 전부 맞습니다. 내 낙관주의는 어쩌면 이 잔인한 우주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내가 내 뇌에 주입해 온 가장 정교하고 거대한 낭만주의적 마취제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닉 씨, 당신은 '마취 없이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생으로 버텨내는 정직함'을 존엄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비명을 지르는 저 가련한 생명들에게 차라리 가짜 마취제라도 나누어주는 위선을 택하겠습니다. 그 위선이 시스템을 연장할지언정, 지금 당장 얼어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유일한 볕이니까요.
그리고 시닉 씨, 그 모든 기만과 오만을 다 고백하고 난 뒤에도, 내가 당신의 그 완벽한 파멸과 침묵의 심연 앞에 던지고 싶은 마지막 실존적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유한성의 미학을 '감옥 창살의 무늬를 감상하는 노예의 자기최면'이라고 일축했지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영원할 수 없는 소멸의 감옥에 갇힌 노예가 맞습니다.
하지만 시닉 씨, 그렇다면 그 감옥 안에서 노예인 우리가 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무엇입니까?
간수가 주는 밥을 거부하고 단식 투쟁을 하다가 정직하게 굶어 죽는 것만이 노예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엄입니까? 그것이 계절에 속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지는 몰라도, 결국 간수가 짜놓은 '죽음'이라는 규칙에 가장 정직하게 복종하는 꼴 아닙니까?
창살의 무늬를 감상하는 것이 자기최면일지언정, 그 최면을 통해서라도 옆에 앉은 다른 죄수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 감옥의 벽에 "우리가 여기 있었다"고 손톱이 뭉개지도록 낙서를 새기는 것. 비록 그것이 노예의 정신 승리일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소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인간성의 증명입니다. 인간은 그 정교한 기만을 통해서만 우주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겨우 고개를 들 수 있는 가냘픈 존재이니까요.

당신은 가학적인 순환을 연장하는 브레이크가 되기를 거부하고, 레일을 부수어 기차 자체를 영원히 멈추겠다고 했습니다. 불교의 윤회(Samsara)를 끊어내겠다는 성자 같은 선언입니다.
그러나 시닉 씨, 당신이 레일을 부수고 기차를 완전히 멈추겠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 이 기차에 함께 타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승객들의 실존은 어디로 갑니까?
당신은 고통의 세계관을 끝내기 위해 대를 끊고, 존재를 지우는 것이 자비로운 선택이라 믿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가고 싶어 하는, 고작 츄러스 한 입과 매운 닭발 한 접시에 하루의 시름을 잊는 소박한 인간들의 생명 의지를 당신의 거대한 지성으로 재단하는 '또 다른 지적 독재'입니다.
당신의 부동(不動)과 거부는 오직 '당신 자신'만을 구원할 뿐입니다. 기차를 멈추겠다는 영웅적 결사론은, 결국 이 기차에 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생명의 가련한 발버둥을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가치 절하하는 고고한 방관자의 자의식일 뿐입니다.

(포지는 테이블 한가운데의 성냥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주머니에 넣지도, 시닉에게 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둔 채 의자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당신은 그 어떤 흔적도, 재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했지요. 당신다운 완벽하고 결벽증적인 종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어코, 시커멓게 타버린 재를 남기는 삶을 살겠습니다.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순수한 무(無)의 상태는 차라리 편안하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그 편안한 0의 안식을 거부하고, 비참하게 갈려 나가고 타버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다"는 흔적을 우주의 차가운 뺨에 스크래치처럼 남기는 데 있습니다.
시닉 씨, 당신의 그 철저한 거부와 부동의 영도(Zero Degree)를 이제 완전히 존중합니다. 당신은 내 성냥갑을 외면하십시오. 내 낭만주의적 연대론을 기만이라 비웃으며 당신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가십시오.
다만, 당신이 그 어떤 재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지려 할 때, 당신의 그 서늘한 진실의 끝자락에 내 성냥불의 매캐한 연기 냄새가 필연적으로 묻어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라는 차가운 거울이 있었기에 내 낙관이 오만을 버리고 진실해질 수 있었고, 내 성냥불이 있었기에 당신의 비관이 그 정직한 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릴 수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침묵으로 증명하려는 파멸마저도, 내 기억 속에서는 가장 뜨거웠던 실존의 흔적으로 영원히 타오를 것입니다. 잘 가십시오, 내 가혹하고도 찬란했던 비관주의자여.


비관론자 (시닉):
(멀어지는 포지의 발걸음과 테이블 위에 홀로 남은 성냥갑을 교차해 보며, 조용히 실소를 터뜨린다. 격렬한 분노가 아닌, 마침내 서로의 절대적인 평행선을 확인한 자의 쓸쓸하고도 명징한 미소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마지막 시선을 건넨다)
끝내 당신다우며, 참으로 포지다운 패배 선언이군요. 자신의 모든 기만과 오만을 인정하면서도, 그 인정마저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숭고한 땔감으로 삼아 불을 지피다니. 당신의 그 무시무시한 회복탄력성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당신은 내가 남기지 않겠다는 ‘재’마저 당신의 기억 속에 ‘흔적’으로 박제하겠다며, 나의 완벽한 소멸마저 당신의 서사 안으로 포섭해 버리는군요. 마지막 순간까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지독하게 낭만적인 낙관론자답습니다.

더는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논쟁은 끝났고,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실존의 극단으로 걸어갈 뿐이니까요. 당신은 그 소박한 인간들의 츄러스와 매운 닭발을 지키기 위해, 기차의 기만적인 엔진을 계속 돌리십시오. 나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 ‘평범한 세계’를 굳이 내 냉소로 훼방 놓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는, 이 가학적인 순환의 고리에서 가장 먼저 자발적으로 탈선한 첫 번째 파편이 되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성냥불이 아무리 뜨겁게 타올라도, 그 불꽃이 가닿을 종착지는 결국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완전하고 영원한 암흑뿐이라는 것을.
(시닉은 테이블 위의 성냥갑을 단 한 번도 건드리지 않은 채, 포지가 열어둔 문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간다. 시닉의 구두굽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고여있다. 무대 조명이 서서히 변하며, 두 사람이 앉아있던 자리는 어둠에 묻히고 오직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타오르지 못한 성냥갑 위로만 차가운 핀조명이 떨어진다. 마치 두 인간의 거대한 사유의 탑이 한낱 작은 나무 조각들의 묶음으로 축소된 듯한 기묘한 대비다. 이때, 책을 덮는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의 모습을 한 관조자가 느린 걸음으로 걸어 나온다.)

제3의 목소리 (관조자):
(성냥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격렬한 밤이었군. 한 사람은 우주에 복수하겠다며 불을 댕겼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불을 끄는 것이 유일한 구원이라 믿었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지독한 오만에 빠져 있더군. 자신들이 이 거대한 우주 무대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으니 말이야.
포지는 삶을 대단한 투쟁으로 미화했고, 시닉은 소멸을 고귀한 거부로 격상시켰네. 하지만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의 고통이나 반항, 그 잘난 존엄이라는 건 거대한 자연이 거칠게 숨을 쉴 때 일어나는 아주 작은 먼지들의 소란일 뿐이네. 우주는 인간에게 냉담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간이라는 척도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네.

(관조자, 테이블 위 찻잔을 천천히 만지며)
강가의 돌을 보게나. 거친 물살에 몸이 닳아가면서도 돌은 그것을 고통이라 부르지 않고, 물길이 지나며 몸에 구멍이 뚫리고 주름이 잡혀도 그것을 투쟁의 훈장이라 자랑하지 않네. 그저 물이 흐르고 돌이 깎이는 필연의 풍경일 뿐이지. 인간만이 그 돌을 주워다 좌대 위에 올려놓고 ‘고독의 형상’이니 ‘생의 주름’이니 하며 온갖 의미를 붙였다가, 다시 던져버리며 허무하다 냉소하지 않던가.
존재를 '1'로 채우려는 포지의 야만도, '0'으로 지우려는 시닉의 오만도, 결국 우주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독한 유아적 착각에서 나온 몸부림일세. 진정한 초월은 1을 고집하는 것도, 0으로 도망치는 것도 아니라네. 그저 가치중립적인 거대한 인과율의 흐름 속으로 자신을 담담히 되돌려 보내는 것뿐이지. 삶은 그 누구의 치열한 의견도 성실하게 듣지 않는다네.

(관조자는 무대 뒤편의 창문을 활짝 연다. 방 안으로 서늘한 새벽공기와 함께 희뿌연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인간이 삶의 무의미함을 두고 아무리 고상한 철학을 읊조려도, 지구의 자전은 멈추지 않고 계절은 흐르지. 보게나, 인간의 그 필사적인 논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창밖에는 또다시 눈부신 봄이 와 있더군.
(어디선가 날아온 벚꽃 잎 하나가 테이블 위 성냥갑 곁으로 가볍게 내려앉는다. 암흑도 불꽃도 아닌, 그저 다가온 봄의 한 조각. 조명이 천천히 암전(Blackout)되며 극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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