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무대 위에는 포지가 남긴 다 타버린 성냥개비, 시닉의 식어버린 찻잔, 그리고 관조자가 남겨둔 서늘한 돌멩이(수석)가 그대로 흩어져 있다. 관객이자, 배우이자, 이 무대의 연출가이자, 작가인 ‘나’는 객석과 무대의 경계에 서 있다. 손에는 잔뜩 구겨진 대본 뭉치가 들려 있다. 조명은 화려한 핀조명이 아닌, 연극이 완전히 끝난 뒤 작업용으로 켜두는 서늘하고 어두운 백색 작업등(Working Light) 하나뿐이다. ‘나’는 텅 빈 객석을 한참 바라보다가, 무대 중앙의 의자에 주저앉듯 걸터앉는다.)
나:
(구겨진 대본을 바닥에 툭 떨어뜨리며, 자조적인 실소를 터뜨린다)
결국 다 도망친 거잖아.
포지도, 시닉도, 그 잘난 척하던 관조자 늙은이도…… 전부 내가 만들어낸 가짜들이면서, 가장 극적인 순간에 멋진 대사 한 마디씩 남겨놓고 무대 뒤로 쏙 숨어버렸어.
참 편리하지. 대본 뒤에 숨는다는 건. 낙관주의자라는 가면을 쓰고 소리를 지르거나, 비관주의라는 방패 뒤에서 냉소를 퍼붓거나, 그것도 아니면 달관한 척 우주의 순리를 읊조리면 그만이니까.
(머리를 감싸 쥐며, 목소리가 지독하게 가라앉는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여기 남아있지? 왜 불이 꺼진 이 무대 위에서, 내 안의 풀어지지 않는 이 둔탁한 슬픔은 단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고여 있는 거지?
사실 알고 있어. 저 세 사람이 나누던 그 화려하고 고상한 철학적 말싸움은, 진짜 내 이야기를 숨기기 위한 거대한 연막작전이었다는 걸. 내가 작가랍시고 펜을 굴려 1과 0과 공(空)을 논했던 건, 내 안에 있는 진짜 추악하고 비겁한 정체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피워 올린 비겁한 연기였어.
저 대본 속에는 차마 쓰지 못했어. 논리적으로 포장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지독히 수치스럽고 찌질한 나의 허물들. 이 세상에 오직 나만 알고 있는 내 부끄러움과 참담함, 그리고 죄책감. 그건 저 연극의 주인공들처럼 숭고하게 소리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거든. 만약 그걸 무대 위에서 그대로 까발린다면, 관객들은 감동하는 게 아니라 나를 향해 침을 뱉고 외면하겠지.
(가슴을 쥐어뜯듯 움켜쥐며, 목소리가 잘게 떨린다)
그 비밀이, 그 지독한 수치심이 매일 밤 내 목을 졸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남들에게는 꽤 그럴듯한 감독으로, 지혜로운 관조자로, 성실한 연기자로 보이겠지. 하지만 이 가면들을 다 벗겨내고 홀로 남은 나는…… 그저 비겁하게 도망칠 기회만 엿보는 소심하고 나약한 죄인일 뿐이야. 내가 나를 봐도 너무 한심하고 혐오스러워서, 차마 내 입으로 이 독백을 뱉는 것조차 두렵고 끔찍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오늘 하루가 왜 이렇게 괴로웠는지 알겠어. 나는 내 허물을 직면하는 게 무서워서, 그냥 온몸에 힘을 빼고 권태라는 늪 속으로 스스로를 걸어 잠근 거야. 멈춰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최소한 더 나쁜 죄는 짓지 않을 수 있으니까. 더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길고 거친 숨을 몰아쉰다. 한참을 바닥만 내려다보며 눈물을 삼키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본다. 얼어붙었던 감정이 비로소 터져 나오며 서글픈 해방감이 감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이 가슴속 깊은 수면 밑에 무겁게 가라앉혀 두었던 돌덩이 같은 부끄러움을, 이렇게 홀로 뱉어내고 나니까…… 이 텅 빈 무대 위에서 내 비참한 바닥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나니까…… 역설적이게도 이제야 비로소 숨이 쉬어져.
그래, 나는 완벽한 감독도, 위대한 배우도 아니었어. 매 순간 도망치고 싶어 발버둥 치는 어색한 연기자이자, 내 삶의 관람석 꼭대기에서 숨죽여 울고 있던 소심한 청중이었지. 엉키고 섞여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가 바로 나였어.
(바닥에 놓인 작은 수석(壽石)을 천천히 집어 든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린다)
해결되지 않아도 좋아. 평생 이 죄책감과 참담함을 흉터처럼 안고 살아간다 해도…… 그 또한 내 못난 인생의 일부겠지. 이 부끄러운 주름살을 억지로 다림질하려 하지 않겠어. 지독하게 수치스러운 나조차도, 결국은 내가 책임지고 품어 안아야 할 유일한 ‘나’이니까.
(돌을 가슴에 꼭 껴안는다. 깊고 고요한 평온이 찾아온다.)
오늘 밤은, 이 지독한 부끄러움을 베개 삼아 그저 가만히 누워보자. 못나고 허물투성이인 나를, 오늘만큼은 조금만 덜 미워해 주자.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무대 뒤가 아닌, 자신의 진짜 삶이 기다리는 객석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단단한 걸음으로 걸어 내려간다. 마지막 백색 작업등이 부드럽게 꺼지며, 완벽한 침묵 속에서 극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