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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제19집

수필-아버지 이야기-송은희

작성자송은희|작성시간26.06.08|조회수32 목록 댓글 0

아버지 이야기  

                            소속 : 춘성중학교 교사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현인) 노래 가사 중

나는 얼마전에 학생들과 함께 본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버지 생각을 하였다. 나는 요즘의 우리 가요가 소위 '소울'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 노래를 듣게 된다. 이 영화에는 6,25전쟁과 흥남 철수, 파독 광부 이야기, 베트남 참전, 이산가족 상봉 방송 등 전쟁 이후 한국의 현대사를 윤덕수가 겪었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사람과 사람이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우리가 태생부터 지닌 고유의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음 세대에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의 세대를 이해하게 하고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때에 그분들이 느꼈던 감정은 무엇인지를 젊은이들이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가 세대간 갈등을 줄이고 서로 화목하게 지낼 방법은 서로 각자의 경험을 많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서로를 깊이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세대간 마음과 마음의 다리가 놓아지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아버지는 1938년생이니 전쟁이 났을 때는 12살 된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바깥에 나가 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특히 관공서에 가거나 서류 처리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55세까지 회사에 다녔지만 늘 일하러 가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지금의 의학용어로 치면 공황장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에는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고, 더군다나 정신적 질병으로 병원에 가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병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네 명의 자녀와 엄마,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았으니 소심한 성격에 늘 큰 부담을 가지고 사셨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잠을 잘 못 주무셨고, 괴로움을 술로 달래려고 했고, 주사가 있었으니 엄마와 화목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상황이나 처지를 이해받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늘 밖으로만 나갔고 여러 자녀들을 돌보지 못했고 친할머니는 여섯이나 되는 자녀들의 생계를 꾸려야했다. 아버지는 가정생활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본받은 게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와중에도 공부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하셨으나 교납금을 내지 못해 늘 뒷산으로 도망을 가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몇몇 마을 남자 어른들과 함께 인민군에게 잡혀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렸었다고 한다. 인민군들이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는데 아버지에게 총을 쏘는 그 순간에 벼락이 쳤고, 총알이 빗나갔기 때문에 아버지는 살아나셨다고 한다. 그런 일을 겪은 후 아버지는 그때의 트라우마를 치료하지 못한 채 성장했다.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거나 관공서에 가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자주 술로 달래보려 한 것 같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3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고, 뇌출혈이 30% 진행된 후 병원에 실려갔는데, 그로 인해 혈관성 치매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미워했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미워했던 아버지의 신경쇠약과 불면과 그 모든 괴로움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언어장애가 생기고 치매가 오고 자식들에게 전적으로 돌봄을 받게 되고 나서야 단편적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벼락이 쳐서 총알이 빗나갔고 전라도에서 강원도까지 와서 너희들을 낳았지."

"그 순간에 벼락이 치지 않고 총알이 빗나가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거야."

"나는 제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식은땀이 나고 두려워서 관공서나 병원에 가지 못했어."

엄마는 젊은 시절 아버지가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불만이 많았었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들은 모두 아버지를 미워했었다. 아버지는 애기처럼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털어놓기 시작하셨다. 어눌한 말로 엉뚱한 단어로 애기처럼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다 풀어 놓고 녹여 놓았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자녀들에게 다 못한 사랑을 노년에 애기처럼 된 후 우리에게 다 돌려주셨다.

아버지와 나눴던 정서,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참 좋은 추억이 되었다. 아버지를 아기처럼 돌보며 지냈던 3년 동안은 나에게 기적이었고 축복이었다. 뇌출혈로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고 언어도 많이 잃어버린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당신이 예전에 좋아하던 노래의 가사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노래를 들으면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그리운 님 찾아 바다 건너 천리 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님의 마음 변하고 나 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 '서울이여 안녕'(이미자) 노래 가사 중

이 세상에 나처럼 아버지와 많은 정서를 함께 나누고,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고,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들어본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낸 딸이 있을까? 나는 오늘 아버지가 즐겨 불렀던 노래를 다시 들으며 아버지와의 추억에 잠긴다. <끝>

 

<프로필>

2025년도 강원교육문학회 신인문학상 등단(수필)

강원대학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졸업, 외국어로서 한국어교육 석사 졸업

춘천교육지원청 영재교육원 중등문학 영재반 지도교사 3년

현 춘성중학교 국어교사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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