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에 귀의하오며.
불교경전을 읽다 보면 수많은 보살이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와 친숙한 분중의 한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십니다.
법상으로 보면 지장보살은 세간법인 인과법과 관련되고 관세음보살은 출세간법인 오온사제와 공과 관련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관세음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행하실때 살펴보시니 다섯가지 근간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공)을 보셨는니라'라고 시작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관세음 보살 신앙의 바탕은 법화경 보문품에서 인간생활에서 겪는 절망적인 극한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지장신앙과 함께 우리 한국불교의 큰 신앙의 대상이된 관세음보살에 대하여법상측면과 신앙측면 모두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기도중에 관세음 보살을 명호하지만, 대부분 관세음 보살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관세음 보살에 대하여 보다 더 정확이 그 분의 뜻을 알고 기도한다면
보다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본 글은 "자비 크시사 누리 건지시는 관세음보살, 고익진 저, 일승보살회 교제용"입니다. 갈무리 하시어 출력해봄도 좋지요.
1.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라.
뭇생류중에서 인간으로 생을 받는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지상의 어느 생류보다도 인간은 복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음과 건강이 함께 할 때 인생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다. 높은 산봉우리를 정복하고 넓은 바다를 가르는 젊음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즐겁게 한다. 젊음이 있기에 세상은 온통 아름답고, 곳곳에 노래와 춤이 아우러져 흐른다.
그러나 그런 젊음과 건강에 왜 추한 늙음과 병이 찾아들어, 마침내는 저 막막한 죽음의 어둠 속에 사라지게 하는가. 지상에 생을 받는 자로서 영원한 젊음을 누린 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예수도 석가도 현실적으로는 모두 돌아가고 말았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여도 영원한 젊음과 건강은 실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젊음과 건강은 한때의 꿈이요, 마침내 괴로움으로 끝날 덧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음과 건강에 못지 않게 진실한 사랑 또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내가 비록 불행하게 되어도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는 한없이 그리운 것이다. 진실한 사랑만 있으면 인생이 어찌 외로다 하랴. 문학작품이 재산이나 권리보다는 사랑을 즐겨주제로 삼음은 이 때문 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사랑에도 왜 쓰라린 헤어짐이 찾아드는 것일까? 영원히 맺지 못할 사랑의 애달픔.... 설혹 맺어졌다 해도 이내 떠나가는 이별의슬픔...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을 함께산다 하여도 죽음에 임해서는 별 수 없이 헤어지고 말 것이다. 사랑 또한 영원한 가치라고는 할수는 없다.
헤어짐이 괴로움이라면 만남은 행복한 것일까? 이것 또한 일률적으로는말할 수는 없다.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즐겁지만 우리가 매일 만나야 할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저 강인한 인상들, 오만한 태도, 간사한 웃음, 타사적인 접근.... 남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마음 먹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뿐이다. 만남 또한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도 정말 힘이 든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갈 힘을 가졌건만, 인간은 왜 나면서부터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일까, 아침 저녁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 일을 해도 일을 해도 항상 부족한 살림.... 서로 속이고 짓밟는 아귀다툼에서 패배하는 날이면 사회의 영원한 낙오자가 되고 만다. 설혹 성공하여 넉넉한 의식주를 확보하고 부귀한 권세를 얻었다고 하여도 그것이 또 얼마나오래가는 것인가. 인생은 참으로 막막한 괴로움의 바다라 하지 않을 수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다. 무엇을 위해 살고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젊음과 사랑을 주었으면 그것을 영원히 누리게 할것이지, 왜 이렇게 늙음과 헤어짐이 있게 하는가? 신의 벌이라면 가혹한 벌이요, 운명의 장난이라면 너무나 잔인한 장난이다. 또한 우리 마음의 무지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도 너무나도 어리석은 무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인간의 이런 괴로움을 한없이 괴로와 하시고, 그 근본적인 해결에 전생애를 바치신 분이라고 해도 좋다. 불교의 기초교설이 풍부하게 간직된 아함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수없이 되풀이 되고있다.
어떤것을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1) 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2) 늙고
3) 병들고
4) 죽는 것이 괴로움이다.
5)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6) 미움과 만나는 것이 괴롭움이고
7)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8)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근간(오취온)이 괴로움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인간의 절망적인 괴로움이 여덟가지 항목으로 잘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8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젊고 건강하고 살아 있는 것이즐겁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만나고 미운 사람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는 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인생의 어두운 측면에서 보다는 밝은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우리는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 하는데에 있다.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져 쓰라린 환멸만을 남겨주는 데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함경은 다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영원한 가치)'라고 할 수 없다" (삼법인설). 불교에서 인생을 괴로움이라고 단정함은 이런 현실의 엄현한 사실 때문이다. 일부러 현실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고자 한것은 아니다.
관세음보살 신앙의 바탕이 되는 법화경 권7 보문품에는 인간이 실재 생활 에 겪게되는 절망적인 극한상황이 다시 다음과 같이 나열되고 있다.
1) 큰불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타 죽게 되었을 때
2) 홍수가 져 세찬 물살에 떠내려갈 때
3)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죽게 되었을때
4) 칼이나 몽둥이를 든 사람이 가해하고자 할 때
5) 무서운 귀신이 나타나 괴롭힐 때
6) 죄를 지어 또는 짓지 않고도 형틀에 묶이게 되었을 때
7) 장사하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도적들이 들끓는 험한 길을 지나게 될 때.
8) 음욕이 치열하게 일어날 때
9) 노여움이 불길처럼 일어날 때
10) 어리석음이 통탄스러울 때
11)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아들.딸을 바랄 때
12) 잘살던 살림이 갑자기 망할 때
이와 같은 열두 가지 상황은 법화경 보문품이 설해졌던 당시 사회의 두 드러진 재난을 열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찌 그뿐이랴. 그 밖에도 많은 재난이 있다. 따라서 그 열두가지는 몇 가지 예로 전체를 포섭하는 표 현양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슷한 사고와 재난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여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결코 남의 일만 이 아니다. 언제 자기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재난들일 것이다.
아미타불의 청정한 서쪽 극락세계를 설해주는 무량수경에는 이 세상의 괴 로움이 다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은 각박하여 급하지 않는 일에 아귀다툼하고, 그런 다툼 속에서 애타게 일하고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남녀.노소.존비 가릴 것 없이 재산을 걱정하고, 재산이 있건 없건 모두 노심초사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밭이 있으면 밭을 걱정하고, 집이 있으면 집을 걱정하고, 가축.노비.금전.가구의 복.음식 등을 걱정한다. 그런 걱정에 수재.화재.도난.빚 등의 걱정이 겹치고, 긴장이 쌓여 목숨이 끊어져 떠나가도 함께 가 줄 사람조차 없다.
부귀를 누리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이런 괴롱움이 있어, 추울 때나 더울때나 마음 놓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은 또 궁핍한 나머지 항상 모자라 한다. 밭이 없으면 밭 갖기를 걱정하고, 집이 없으면 집 갖기를 걱정하고, 가축.노비.금전.가구.의복.음식 등을 갖고자 걱정한다. 하나를 얻으면 다시 더 바라고, 그것을 얻으면 또 더 바래, 끝없는 궁핍에 허덕여,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마음 놓지 못한다. 그러다가 목숨을 잃으면 선한 일을 배본 적이 없 이 어느 길에 떨어질지를 알지 못한다."(무량수경 권하, 대정 11.274. b~c)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같이 겪는 세상의 괴로움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았지만, 불교는 다른 종교에서는 예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에 대한 의식이 강렬하다. 기독교가 인간의 죄에 대 한 의식이 강하고, 유고가 도덕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면, 불교는 괴로움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괴로움에 던져진 인간을 불교는 다시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 속에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절망적인 존재로 보는가?
그렇지는 않다. 불교는 우리에게 다시 괴로움을 극복할 밝은 희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 그것을 멸하는 수행의 길이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 자세하게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수행의 길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려면 모든 존재의 구조를 철저히 연구해야 하고 그에 입각한 수행은 꾸준한 노력 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이 아니면 실감하기 어렵다. 바쁜 세 상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겐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런 수행의 여유가 없는 절박한 상황에선 어떨까? 법화경 보문품에 나열된 열두 가지 상황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 있는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죽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 보문품은 그런 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라."고 한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이 곧 " 그 음성을 듣고 그들을 모두 위험과 괴로움으로붙터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무량 백천억 중생이 갖은 괴로움을 겪어도 관세음보살에 관해 듣고 한맘 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듣고 모두 벗어나게 해주시 리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자는 불에 들어가도 불이 태우지 못하나 니, 그 보살의 위신력 때문이다."(법화경 권7.보문품)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지 않을 수 없는 절망적인 사람에겐 꿈만 같은 희망 을 주는 말씀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관세음보살 을 부르는 것은 이 경전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 보문품을 일명 관음경이라고도 부른다.
아미타불의 서쪽 극락세계를 설해주는 무량수경과 같은 계통의 경전으로 관무량수경이 있는데, 그곳에는 그런 극한 상황에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라고 설하고 있다.
" 5역(五逆), 10악(十惡)과 같은 갖은 악업을 지은 중생은 마땅히 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괴로음을 받으리라. 그런 어리석은 자가 죽음에 이르러 다행 히 착한 벗을 만나, 그로부터 법을 듣고 부처님을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미 괴로움이 절박하여 부처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이 때 착한 벗이 이르기를 '부처님을 생각할 수 없거든 나무아미타불을 지 심(至心)으로 불러라.'하고 그가 지심으로 소리를 내어 끊어지지 않게 열 생각(十念)을 갖추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부처님의 이름을 부른 까닭 에 생각 생각에 80억겁 생상의 죄가 없어지리라. 그리하여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 해둘레(日輪)와 같은 금색 연꽃이 자기 앞에 나타남을 보고 한 생각 사이에 극락세계에 왕생케 되리라."(관무량수경, 대정 112.346.a)
무량수경에 의하면, 극락세계에 가려면 최소한 1) 깨달음(보리)을 얻겠다는 마음 일으키고(발심), 2) 열번이라도 아미타불을 지심으로 믿고 생각해야 한다(十念)는 두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러나, 이 관무량수경에서는 그렇지 못한 죄악중생이라도 열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절박한 임종에 있는 죄악 중생에게 이 또한 커다란 희망을 주는 말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아미타불 신앙도 관세음보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요,그 연장이라 말해도 좋다.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두 보살을 모든 경전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라고 설하고 위의 관무량수경의 경문에도 곧이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연꽃 속에서 12대겁을 채우면 연꽃이 피고, 연꽃이 필 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곳에 이르러 큰 슬픔(大悲)의 음성으로 모든 법의 실상을 설해 죄악의 법을 멸해주시리라. 그러면 그는 그것을 듣고 환희하여 깨달음(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리라(발심)"(관무량수경., 대정 12.346.a)
중생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는 것은 관세음과 대세지 두 보살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세음보살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경전은 '큰 우정과 큰 슬픔(대자대비)'의 대표적인 보살을 관세음으로 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이 풍부한 밀교 계통 경전에는 관세음보살의 그러한 세상을 건지는 기능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관세음보살의 분신을 발생하고,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가지 진언과 의궤(儀軌)가 설해지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불러도 물러서지 않는 단계(불퇴전지不退轉地)에 오르고 모든 병과 장애와 두려움을 떠나고 죄업을 소멸하리라. 하물며 관세음보살이 설한 진언을 지니고 읽고 행함에 있어서랴. 마땅히 알라. 그는 깨달음을 얻음이 마치 손바닥에 있는 것과 같으리라."(십일면신주심경, 대정20.152.c)
밀교경전에 설해진 그러한 관세음보살의 진언은 너무나 수가 많고 복잡하여 간단히 소개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예송하는 천수천안관세음경의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는 그 중의 하나로서, 그 내용은 뒤 '2절 관세음보살은 어떤 보살인가' 에서 소개하겠거니와,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생각한 뒤 이 대비심다라니를 외면 다음과 같은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 오랜 생사의 중죄가 멸하고,
2) 뜻하는 부처님의 땅에 태어나고,
3) 3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4) 무량한 삼매와 변재(辯才)를 얻고
5) 구하는 바를 얻고,
6) 뜻대로 남자의 몸을 받고,
7) 참회할 길 없는 파법(破法)의 죄를 멸하리라"는 것 등이다.
뿐만 아니라 그 진언을 외우는 자는 15종의 좋은 생을 받고, 15종의 나쁜죽음을 안받는다고 한다. 그 중 15종의 나쁜 죽음은
"1) 굶어 죽는 것
2) 형벌로 죽는 것
3) 원수 손에 죽는 것
4) 전쟁에서 서로 죽이는 것
5) 짐승에게 물려 죽는 것
6) 뱀에게 물려 죽는 것
7)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 죽는 것
8) 독약에 의해 죽는 것
9) 벌레 죽에 죽는 것
10) 미쳐 죽는 것
11)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것
12) 악인 때문에 죽는 것
13) 악귀 때문에 죽는 것
14)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는 것"등이다.(上揭經, 대정 20.107.b)
이것은 관음경에 설해진 극한상황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훨씬 더 확충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과 함께 그의 본사(本師)이신 아미타불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미타불 신앙까지 그 속에 종합하고자 한것임을 알 수 있다. 밀교 경전은 인도 대승불교의 후기에 성립한 것이므로,그런 종합적인 색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교에서 '진언'을 중시하게된 것도 관음경이나 무량수경에서 설하고 있는 '이름부르기'가 진언의형태로 발전해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밝은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대승불교의 여러 교설은 모두 법화경 보문품의 관세음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 믿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관세음이라는 보살은 어떤 분이기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하나만으로 절망적인 괴로움이 저절로 해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법화경은대승경전에서 믿음과 절대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경전이다 "부처님이 이룬 희유하고 난해한 법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시나니, 그 법에 큰 믿음을 낼지니라."라고 설하고 있으며(법화경 제 1권 방편품), 보문품에도 "괴로움과 죽음에 임해 의지할 바는 오직 관세음이라는 것을 생각생각에 의심치 말라" 고 설하고 있다.(상게경 권 7 보문품, 대정 9.58.a)
무량수경에는 "만일 어떤 사람이 죄와 복은 믿지만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지혜를 의심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란다면, 그곳에 왕생하더라도 그의심 때문에 궁전 같은 곳에 갇혀 5백세 동안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설해있다. 앞에 소개한 밀교의 천수경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비심대다라니를 외면 어떤 중죄라도 없어지지만, 다만 한가지 그 진언에 의심을 일으킨 자는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어있다.(천수다라니경, 대정 20.107.a)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절대성은 다른 종교에서도 다같이 설하고 있다. 가령 기독교를 예를 들면, 신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요,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이 신을 알고자 하거나 되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요 죄악이다. 죄를 범한 인간은 신의 용서를 바라고 그 구원을 전적으로 믿을뿐이라고 한다. 믿음의 절대성이 관음신앙에 못지 않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덮어놓고 믿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사람을 잘못 믿었다가 화를 입는 경우를 흔히 보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광신자에 의해 오도되고 있는가?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재산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믿을 만한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혜에 의해 뒷바침 될 때 믿음은 비로소 건전한 방향을 잡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전부라고 하지 않는다. 깨달음에 들어가는 길목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법화경은 믿음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경전이지만, 불교에 들어온 자가 부처님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대의 교만이라고 설하고 있다. 기독교의 교만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화엄경 또한 보살의 길은 맨 먼저 믿음에서 시작하여 (10信), 10주(住), 10행(行), 10회향(廻向), 10지(地)를 거쳐 깨달음에서 완결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관음신앙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단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영험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도대체 어떤 보살이기에 그런 힘을 가지고 계신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그럴만한 진실성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은 한결 더 확고해지고 순수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관세음보살은 어떤 보살인가.
관세음보살은 우선 불교경전에 괴로움의 근본을 다한 반야(지혜)의 대표적인 보살로 설해지고 있다. 앞서 우리는 괴로움의 양상에 대해 살펴본 바 있거니와 그런 괴로움은 인간에게 왜 있게 되는가? 신의 벌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인간의 무지 때문인가. 불교는 물론 맨 마지막 경우로 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간단히 제시할 수는 없다. 불교의 전체 교리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그에 입각해서 수행해 보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의 전개상 필요한 몇 마디 말은 불가피할 것 같다.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나’(불변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렇게 덧없는 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다. ‘나’(不變)라고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변했다가는 ‘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 변화가 생기면 그 영향을 받아 ‘나’의 물질적인 바탕은 변하고자 한다. 물질적인 것(色)은 외부의 대상이건 내부의 신체적이건 간에 자연법칙적 인과율(因果律)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의지(意志)적인 아집(정신)은 자신의 존속을 위해 자연적인 변화(신체)에 대해 역작용(逆作用)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역작용은 힘이 들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힘드는 것이 바로 괴로움(苦)이다.
따라서 중생은 이런 안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밖으로 업(활동)을 일으키게 된다. 괴로움을 주는 대상을 미워하고 편안함을 주는 대상을 사랑한다. 그런 업(원인)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과보(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을 위한 악업(惡業)에는 괴로움이... . 따라서, 금생(今生)에 받지 못한 과보는 내생(來生)에라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업과 과보의 인과(因果)관계는 과거.현재.미래의 3세(三世)에 걸쳐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3세 인과(因果)를 깨친자는 스스로 악업을 끊고 선업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 남을 생존 경쟁적 적대자로 보지 않고, 자신의 안락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동반자로 보게 된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지 않고 한없이 베풀어 주려(布施) 한다. 이런 우정(友情)이 곧 자비(慈悲)라는 말 속의 그 ‘자(慈)’이다. 그러나 이런 깨침이 없는 자는 어떨까? 어두운 무지속에서 갖은 악업을 지을 것이고, 악업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른다. 그리하여 절망적인 괴로움의 길을 더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절망적인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무엇인가는 이제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 바로 자기 마음속의 무지와 밖으로 향한 악업인 것이다. 동시에 그런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도 물을 필요가 없다. 무지와 악업을 멸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고(千古)의 베일에 가렸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다. 인류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 문제로 번민해왔던가. 불교가 제사(祭祀)나 기도(祈禱) 보다도 선업을 강력하게 권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의 문제가 완전히 풀릴 것인가. 인간의 선업에는 한계가 있다. 저 광막한 우주와 무량한 생류 속에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언젠가는 덧없음을 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업(業)의 이런 한계성을 극복할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럴 경우, 안으로는 눈을 돌려 아집(我執)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될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아집으로 말미암아 안에 괴로움이 생겼고, 그 괴로움을 덜려고 밖으로 활동을 일으킨 것이 선.악(善惡)의 업이기 때문이다.
아집은 분명히 잘못된 집착이다. 모든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나’라고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체(實體)가 없는 허망한 것을 집착한 망집(妄執)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망집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이 발생하고 그로 말미암아 생사의 괴로움에 헤매고 있다면, 어찌 그것을 그대로 놓아 두랴. 철저하게 망집을 부정하여(無我實踐) 참다운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의 교리는 세속적인 교설에서 다시 아집 부정의 해탈(解脫)의 교설로 발전하고 있다.
아집을 버리고 담다히 바라보는(사[捨]) 경계, 그것을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괴로운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해탈(解脫)이라고도 부르고, 뜨거운 번뇌의 불길이 꺼졌다고 해서 열반(涅槃)이라고도 부른다. 아함경의 궁극적으로 설하는 종교적 이념은 바로 이런 열반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열반을 다시 ‘절대적인 실체’로 집착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 또한 일종의 아집이요, 망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여란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생사’라는 것이 있으므로 그에 따라 있게 된, 일종의 상대적인 진리이다. 불교술어로 말하면 ‘연생(緣生) 한 법’이다. 따라서 그런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집착한다면 그것을 어찌 망집이라 하지 않겠는가.
망집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른다. 앞서 우리는 아집에서 괴로움이 발생케 되는 이유를 간단히 살펴본 일이 있지만, 그런 원리가 이 새로운 망집에도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생사와 열반 등을 분별(分別)하는 망집을 부정한느 교설이 다시 베풀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바로 이런 자각에서 일어난 불교라고 해도 좋다. 대승경전 초기에 성립한 금강경(金剛經)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은 어떻게 깨달음에 마음을 내야 하는가(發心). 일체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되,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고 보라. 왜냐하면 보살에게 조금이라도 아집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별망집을 부정하는 대승보살의 행은 끊임없이 게속될 수 밖에 없다. 어떤 경계를 얻으면 그것 또한 분별망집이 됙 때문이다, 얻음도 없고 얻음 아닌 것도 없다. 중생은 본래부터 청정(淸淨)하다. 모든 법은 이렇게 자성(自性, 아집)이 공(空)해 버리지만, 그러나 이러한 공은 허무나 공간과 같은 개념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그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한없이 청정한 법계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혜를 반야(般若)라 하고, 그런 반야는 궁극적으로 이 세계를 초월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라 한다. 반야가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뜻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은 이런 반야의 완성에 의해 비로소 해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승불교는 방대한 양의 반야경전(般若經典)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이 공관(空觀)의 실천을 통해 피안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이 괴로움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볼 수는 없다. 왜 그런가? 자기는 비록 벗어났지만, 무수한 동료 중생들이 뒤에서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와하는데 어찌 자기만이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시 괴로운 세계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동료 중생들이 건지는 데 몸을 바칠 수 밖에 없게 된다. 보살의 이런 마을을 큰 우정(大慈)이요, 큰 슬픔(大悲)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피안에서 차안(此岸)에 돌아오는 그런 과정에서 보살의 깨달음은 지극히 바르고 원만한 것이 된다. 보살은 피안에 이르러 깨달은 바가 없지 않지만, 그러한 깨달음은 피안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런 깨달음의 빛으로 다시 차안에 돌아와 차안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전체적인 법의 실상(實相)이 요연(了然)해질 것이다. 이런 ‘다시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보살은 얻게 되고,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여래(如來)요, 부처라고 부르레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법화경은 불교를 더러운 땅(차안)에 피는 하얀 연꽃에 비유하고, 불교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 땅(佛國土)을 장엄(莊嚴)하고 중생을 가르칠 것이 모든 보살의 사명(수기,授記)으로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중층(重層)적으로 심화되는 불교 교리는 법화경의 이런 교설로 일단 체게적인 골격이 갖추어진다. 화엄경, 무량수경 등 그 밖의 교설들은 이상 간단히 소개한 교리조직을 바탕으로 그것을 부연 응용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이런 불교 교리 체계에서 반야교설을 대표하는 보살로 설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방대한 반야경의 핵심을 따낸 반야심경은 다음과 같은 서두로 시작되고 있다.
거룩한 관자재(觀自在 : 관세음)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 바라밀다에 행하하실 때 자세히 내려다보시니 다섯 가지 근간[五蘊]이 있는데, 그들은 자성이 모두 공함을 보셨느니라.[梵文 般若心經에 의함]
뿐만 아니라 그 뒤의 본문은 관자재보살이 사리불에게 반야의 진리를 설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반야심경 또한 일종의 관음경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방대한 반야경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성립 또한 이른 것으로는 볼 수 없다(4세기 경 성립). 따라서 반야심경에 관세음보살이 주인공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곧 반야의 대표적인 보살이라고 단정함은 속단이라고 할지 모른다. 반야교설 발전의 근본이 되는 소품반야경에는 관세음의 이름은 보이지도 않고 대신 살다바륜(薩陀波崙)과 담무갈(曇無竭)보살이 등장하고 있다.[소품반야경 권 10 살다바륜품 ; 동담무갈품] 그러나 소품반야경의 그 두 보살 가운데서 전자는 반야를 구하는 자로, 후자는 반야를 설하는 자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반야를 직접 실천했던 자요 지금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하는 자로 나타나, 한 몸에 그두 측면이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자재라는 이름은 그가 반야의 대표적인 보살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관자재는 범어로 'avalokitesva-ra'로 되어 있는데, 'avalokita'와 'isvara'로 분석된다. 그 중에서 전자는 'avalokayati(내려다 본다)'라는 말의 과거분사(형용사)이고, 후자는 '가진 임(主)', '다스리는 임'이라는 명사이다. 따라서 '내려다뵌 임'이라는 뜻이 되지만, 범어에서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전용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내려다뵌(과거분사)'은 '내려다본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이렇게 해석할 경우 'isvara'라는 말과 잘 어울려 '내려다본 것을 다스리는(또는 가진) 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 '내려다본 것'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위에 인용한 반야심경의 서두에 "관자재보살은 자세히 내려다 보시니 다섯 가지 근간이 있다."는 구절이 보인다. '내려다본. 다(觀)'는 말이 서로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려다본 것'은 '다섯 가지 근간(五蘊)'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섯 가지 근간은 아함경에서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근간적인 부분, 곧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가리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것(一切), 모든 법(諸法), 이 세계(世間)를 가르킨다. 반야심경에서도 같은 뜻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한 다섯 가지 근간의 세계는 중생들의 분별망집이 행해지고, 그 때문에 절망적인 괴로움을 겪고 있는 곳이다. 그러한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멸하는 길은 그런 분별망집이 공함을 보고 그것을 철저하게 타파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은 곧 이어 "그들은 자성이 공함을 보셨다."는 말이 따르고 한역(漢譯) 심경은 다시 그 뒤에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셨다(度一切苦厄)."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은 일찍이 이러한 반야의 공관(空觀)을 실천하셨다. 반야심경의 서두는 관세음보살의 옛날 행을 서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반야심경의 본문)은 어떤가? 피안에서 다시 차안에 돌아와 사리불에게 반야의 교설을 베풀고 계시는 것이다. 사리불은 아함경에서 가장 지혜가 수승한 부처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는 아직도 괴로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일체 중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내려다본 것'이라는 말에 '다스리는 임'이라는 말이 합성된 것은 그 보살이 이러한 차안에 돌아와 반야교설을 베풀어 중생들을 건지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관자재'라는 범어 이름은 그가 반야 교설의 대표적인 보살이라는 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 큰 반야와 큰 자비의 실천자로서의 그는 중생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그것을 다스리고(교화) 계시며, 중생들은 일심으로 그를 우러러 믿고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괴로운 세계의 임이요, 주(主)이시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을 소유하고 다스리는 신이 '하늘-임(天主)'이라면, 그런 하늘-임까지를 포함한 다섯 가지 근간(괴로움)의 세계를 소유하고 다스리는 보살이 바로 '관자재'라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분석되는 관자재의 범어 이름이 한자로는 관자재(觀自在) 또는 관세음(觀世音)으로 번역되어 있다. 전자는 '관(觀)'자를 능동태(能動態)로만 보지 않으면 어느 정도 원어에 가깝다 하겠지만[法華經 普門品에 '觀其音聲'이라는 말이 있어 '觀'字는 '본다'는 能動態의 뜻으로 보통 취하고 있지만 잘못이다. '본 바(所觀)'라는 過去受動分詞이다], 후자는 어떻 게 된 일인가? 학자들은 옛 범어 원전 속에 'avalokita(내려다 본)-svara(소리)'라는 말이 발견되므로[1927년 東 터키스탄 지방에서 발굴된 보문품의 梵語古寫本斷簡에 그런 범명이 뚜렷하게 보인다(觀世音菩薩の硏究 p.10).] 관세음은 그것을 번역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법화경 보문품에도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보고(觀) 해탈시켜 준다."는 말이 보이므로, 의미상으로도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혼성범어(混成梵語)에서는 'avalokitesvara'가 'avalokita- svara'로 철자(綴字)되기가 쉬운 일이며,[佛敎混成梵語(Buddhist Hybrid Sanskrt)에서는 sibilant는 흔히 교체되고, 모음 sandhi법칙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현 범본 법화경을 조사해 본 결과 '즉시 그 음성을 보고[卽時觀其音聲]'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법화경을 번역하면서 뜻을 보충하기 위해 써 넣은 것임에 틀림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음성은 듣는 것4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세음이라는 번역은 문제성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세음'이라는 이름은 오랜 신앙의 역사 속에 뿌리 를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자재'보다는 오히려 더 사람 들에게 친숙해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한낱 이름을 갖고 왈가왈 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관세음이건, 관자재이건, '내려다본 것의 임'이건 신앙의 대상은 다같이 그 '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은 그밖에도 대비성자(大悲聖者), 시무외자(施無畏者), 원통대사(圓通大士), 남해대사(南海大士), 천광명(千光明) 등의 많음 것이 있고[聖觀自在菩薩一百八名經(대정 20, 69-70)에는 관세음의 108종 이름이 梵音陀羅尼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이름과 분신(分身)이 나올 수 있다[三國遺事 卷 5 廣德嚴莊의 廣德의 妻는 관세음 19應身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상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살펴 보았거니와, 그런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세계에 활동할 때 설법과 방편은 어떻게 하는가?" 법화경 보문품(관음경)은 다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어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건져 주신다고 설하고 있다.
1.부처(佛) 2.벽지불 3.성문(聲聞) 4.범왕(梵王) 5.제석천(帝釋天)
6.자재천(自在天) 7.대자재천(大自在天) 8.천대장군(天大將軍)
9.비사문(毘沙門,四天王) 10.소왕(小王) 11.장자(長者) 12.거사(居士)
13.재관(宰官) 14.바라문(婆羅門) 15.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 (優波塞),우바이(優婆夷) 16.장자,거사,재관,바라문의 부녀(婦女)
17.동남(童男),동녀(童女)
18.천(天),용(龍),차(夜叉),건달바,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인비인(人非人) 19.집금강신(執金剛神)
모두 19항목에 이르고 있는데, 이것을 관세음의 19응신(應身)이라 부른다. 보문품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능엄경 권 6은 그것을 다시 가감,부연하여 32응신(應身)을 세우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능엄경 권 6(大正 19,128/c-129/a)의 32 應身은 다음과 같다.
1.佛 2.獨覺 3.緣覺 4.聲門 5.梵王 6.帝釋 7.自在天 8.大自在天
9.天大將軍 10.四天王 11.四天王太子 12.人王 13.長者 14.居士 15.宰官 16.婆羅門 17.比丘 18.比丘尼 19.優婆塞 20.優婆夷 21.女主,國夫人,
命婦,大家 22.童男 23.童女 24.天 25.龍 26.藥叉 27.건달바 28.阿修羅 29.緊陀羅 30.摩呼羅伽 31.人 32.非人,有形,無形,有想,無想].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부르는 곳은 어디나 찾아가신다. 하늘이건 인간이건 심지어는 귀신의 세계까지.... 그리하여 그들을 건질 수 있는 최선의 형상을 취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그를 일심으로 공양치 않으면 안 된다[法華經 卷7 普門品, 大正 9/57/b, "以種種形遊諸國土度脫衆生.是故 汝等 應當一心供養觀世音菩薩."]."고 보문품은 말을 맺고 있다. '공양'이라는 말은 다른 종교의 공희(供犧)나 제사에 해당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최고의 신을 법화경에서는 관세음으로 대신해 주고 있음을 뜻한다.
반야심경과 보문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관세음의 성격은 그 밖의 경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해심밀경(解深密經) 권 4 지 바라밀다품(地婆羅密多品)은 보살의 10지(地)와 6바라밀(婆羅密)을 설해주고 있는데, 그것이 관자재보살과 부처님의 문답으로 진행되고 있다. 관자재의 반야적 측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 제 34 입법계품(入法界品)에는 55선지식[善知 識, 두번씩 만나는 사람이 있으므로 실지로는 53명]이 선재(善財) 동자의 보살행을 지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제 28번째 선지식으로는 '큰 슬픔의 법문과 광명의 행(大悲法門光明之行)'을 설하는 관세음보살이 등장한다[華嚴經 卷 51 入法界品, 大正 9/718/b, "善男子 我已成就大悲法 門光明之行 敎化成熟一切衆生 隨所應化善現其前."]. 관세음의 자비적 측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법화경은 보살들께 지상의 부처나라를 장엄(莊嚴)하여 중생들을 가르칠 것을 수기(授記)하고 있음은 앞서 말한 바가 있다. 그러한 부처 땅은 보살 때의 발원(發願)에 따라 장엄의 양상이 달라진다. 대승경전에 설해지는 여러가지 정토(淨土)는 그런 발원에 의해 장엄된 과보(果報)의 땅[報土]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토는 부처님 수만큼이나 많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안락하기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쪽 극락세계(極樂世界)이다.
그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설하는 경전에서 관세음은 다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대세지 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두 협시(脇侍) 보살의 하나로 나타난다. 우리들이 속해 있는 세계를 불교는 사바(娑婆)세계라 하는데, 법화경 보문품은 관세음의 구제활동을 분명히 사바세계의 일로 하고 있다. 사바는 극락세계가 아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이 그런 극락세계의 대표적인 보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은 사바에서 극락세계로 적(籍)을 옮겨간 것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관세음보살의 큰 슬픔과 구제 활동이 정토신앙의 형태로 확장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바는 참으로 괴로움 투성이다. 궁핍한 자원, 폭발적인 중생, 극심한 경쟁, 들끓는 죄악,수많은 질병.... 그 속에서 절망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어떤 곳에 태어나길 바랄까(願生)? 모든 종교는 천당이나 지옥과 같은 사후 세계를 설해주고 있다. 불교또한 업설에서 육도(天, 人, 修羅, 餓鬼, 畜生, 地獄) 윤회를 설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곳은 괴로움을 완전히 다한 곳이 아니다. 천당이나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덧없음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극락세계는 어떤가? 땅이 황금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물자가 풍족하고 영원한 수명과 광명이 넘치고 있다. 불보살이 주야로 법을 설해 누구나 쉽게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다. 사바세계나 사후 천국과 비교할 때 꿈만 같은 곳이다. 죽음에 닥친 자가 어찌 그런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부처님이 그런 사람들(願生者)을 위해 특별히 장엄해준 부처나라라 볼 수 있다. 무량수경의 삼배(三輩) 중생이나 관무량수경의 구품(九品) 중생 같은 왕생자는 모두 임종(臨終)을 계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극락세계가 그렇게 수승한 곳으로 주장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만일 그럴 만한 근거를 제시함이 없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극락세계의 장엄은 한낱 미사여구(美辭麗句)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믿을 만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근거를 찾을 경우 반야바라밀다를 떠나 어디서 찾을 것인가? 관세음보살은 바로 그런 반야바라밀다를 대표하는 보살이 다.극락세계의 장엄에 관세음보살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있다.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관세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정토 교설(淨土敎說)은 그것 자체가 관세음 신앙의 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큰 지혜 큰 자비의 실천자요, 괴로운 세계의 임이신 관세음 보살은 이제 이렇게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활동무대를 넓히고 있는데, 밀교경전에서는 다시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시는가? 우선 몸의 형태부터가 기괴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성관음(聖觀音. Aryalokitesvara bodhisattva)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Cintamanicakra bodhisattva)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Ekadasamukha bodhisattva)
불공견색관음(Amoghapasa bodhisattva)
천수관음(千手觀音. Sahasrabhuja bodhisattva)
마두관음(馬頭觀音. Hayagriva bodhisattva)
준지관음(Cundi bodhisattva)
청경관음(靑頸觀音. Nilakantha bodhisattva)
[大正藏經 卷 20에 수록된 觀自在菩薩 관계 경전 등에 散說되고 있다]
얼굴이나 눈, 손, 팔, 지니는 물건 등의 수와 모양이 기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관세음의 특징적인 의지와 활동을 구체적으로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여의륜관음의 여의보주(如意寶珠)는 모든 뜻을 성취시켜 주는 구슬로서 중생들의 욕구를 충분하게 만족시켜 주는 관세음의 능력에 통하는 바가 있다. 불공견색관음의 견색은 전쟁에 쓰는 올가미로서 중생을 붙잡는데 실패함이 없는(不空) 관세음보살의 큰 자비를 생각케 한다. 천수관음이 가진 일 천의 손과 일천의 눈은 관세음보살이 뭇 중생을 낱낱이 보고 낱낱이 건져 주는 활동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관음의 발생(5 - 6세기 경)을 단순한 조형 예술적(造形藝術的) 동기에서라고 만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당시 인도에서 신앙되고 있던 힌두이즘(Hinduism)의 신들을 관세음화(化)하려는 것에 보다 근본적인 동기가 있었지 않았나 느껴진다. 십일면관음은 인도의 십일황신(十一荒神. E-kadasarudra)에 기원을 두고, 불공견색관음의 아모가(Amogha)는 시바(Siva)신의 별명이요, 견색(pasa)은 두루가(Druga) 여신이 지닌 무기였다. 마두관음은 리그베다(Rg-veda)의 마사(馬詞. Asvamedha)에서 유래한 것 같고, 준제관음의 춘디(Cundi)는 두루가 여신이 나타내는 화신(化身)의 하나와 이름이 같다. [觀世音菩薩의 硏究, 第 12章 七觀音의 分化. pp.105 - 106 참조할 것. 단 그곳에는 靑頸觀音에 대한 해설이 빠져 있다.] 청경관음의 청경(nila-kantha)은 공작(孔雀)새를 가르키지만, 이 또한 사바 신의 한 별명인 것이다.
힌두이즘의 신들을 관세음화(化)한다는 것은 관세음의 활동 영역이 다시 더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활동 무대를 넓힌 관세음은 이제는 다른 종교에도 눈을 돌려 그들까지 건져주려는 큰 자비를 발휘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관세음의 분화(分化)는 힌두이즘에 한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관음신앙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고, 중국에서 다 시 한국,일본 등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변화관음을 발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양류(楊柳), 용두(龍頭), 백의(白衣), 엽의(葉衣), 어람(魚藍), 수월(水月), 합리 등의 삼십삼 관음[觀世音菩薩의 硏究, 第 13章 三十三體의 應化 참조할 것. 전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楊柳 2.龍頭 3.持經 4.圓光 5.遊戱 6.白衣 7.蓮臥 8.瀧見 9.施藥 10.魚藍 11.德王 12.水月 13.一葉 14.靑頸 15.威德 16.延命 17.衆寶 18.岩戶 19.能靜 20.아뇩 21.阿磨提 22.葉衣 23.유리 24.多羅尊 25.합리 26.六時 27.普悲 28.馬郞婦 29.合掌 30.一如 31.不二 32.持蓮 33.灑水(中國에서 日本에 걸쳐 民間에 행해진 관음신앙을 개관한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형태적 분화(分化) 외에 다시 관세음보살은 밀교경전에서 가장 많은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를 설하고 있는 보살이다. 보현(普賢), 금강수(金剛手), 미륵(彌勒), 문수(文殊) 등도 진언을 설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수량면에서 관세음보살의 진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천전다라니(千轉陀羅尼), 보현다라니(普賢陀羅尼), 소복독해다라니(消伏毒害陀羅尼), 육자신주다라니(六字神呪陀羅尼),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 십일면신주다라니(十一面神呪陀羅尼), 대준제다라니(大准提陀羅尼), 여의륜다라니(如意輪陀羅尼), 불공견색다라니 등.
이 중 불교에서 조석으로 염송하고 있는 것은 천수경의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이다. 그러나 한자음이 변하여 원음과 너무 떨어진 감이 있어,다음에 원음과 뜻을 실어 둔다.
범문 천수관음대비심다라니
[梵文千手觀音大悲心陀羅尼(神妙章句)]
namo ratna-trayaya(三寶에 귀의합니다).
nama aryavalokitesvaraya bodhisattvaya mahasattvaya mahakarunikaya(聖觀自在菩薩 마하살 大悲主에게 귀의합니다) omsarva-bhayesu trana-karaya(一切 恐怖에서 守護해 주시는 이에게). tasmai namah-krtva imam aryavalokitesvara-bhasitam nilakantha-namahrdayam avartayisyami(그에게 귀의하여 이 聖觀自在보살이 설하신 靑頸이라는 心呪를 지송하리니) sarvartha-sadhanam subham ajeyam sarva-bhutanam bha vamarga- visuddhakam(일체의 所願을 成就하는 것이며, 勝妙 한 것이며, 일체 衆生의 生死路를 淨化하는 것이옵니다).
tad-yatha(그것은 다음과 같다). om aloke alokamatiloka-tikrante(옴 非世間에, 非世間,出世間의 超越에). hehe hare. maha-bodhisattva(大菩薩). smara smara. hrdaya(心呪). kuru kuru. karma-sadhana-sadhana(業의 成就成就). dhuru dhuru. niyantr mahaniyantr(調御者 大調御者). dhara dhara. dhatr-indresvara(持世 自在主神). cele cele. mala vimalamala(垢 離垢無垢). budhi ehyeye. lokesvara raga-visa-vinasana dvesa-visa-vinasana moha-visa-vinasana(世自在 欲毒消滅 瞋毒消滅 痴毒消滅). horu horu mala horu hare. padma-nabha(蓮華船). sara sara siri siri suru suru. budhya budhya(悟로 悟로). bodhaya bodhaya(覺에로 覺에로) maitreya-nila-kantha(慈氏靑頸菩薩) kama-sudarsana(愛善見)prahlada- manah(觀喜心) svaha. nila-kanthaya(靑頸보살에게) svaha. varaha-mukha- sinha-mukhaya(豚面獅子面보살에게) svaha. padma-hastaya(連華手보살에게) svaha. cakrayudh-aya(輪戰보살에게) svaha. sankhasabda-vibodhaya(螺聲覺보살에게) svaha. maha-lakuta-dharaya(持棒보살에게) svaha. vyaghara- carma-nivasanaya(着虎皮보살에게) svaha. namo ratna-trayaya(三寶에 귀의합니다). nama aryavalokitesvaraya(聖觀自在보살에게 귀의합니다) svaha.
나모 라트나 트라야야. 나마 아랴발로키테스바라야 보디삿트바야 마하삿트바야 마하카루니카야. 옴 사르바 바예수 트라나 카라야. 타스마이 나마 크리트바 이맘 아랴발로키테스 바라 바시탐 닐라칸타나마흐리다얌 아바르타이샤미 사르바아 르타사다남 수밤 아제얌 사르바부타남 바바마르가비수다감. 타드야타. 옴 알로케 알로캄 아틸로카아티크란테. 헤헤 하레 마하보디삿트바. 스마라 스마라 흐리다야. 쿠루 쿠루 카르마사다나사다나. 두루 두루 니얀트리 마하니얀트리. 다라 다라 다트린드래스바라. 찰라 찰라 말라 비말라 아말라. 부디 에혜혜. 로케스바라 라가비사비나사나 드베사비사비나사나 모하비사비나사나. 호루 호루 말라 호루 하레 파드마나바. 사라 사라 시리 시리 수루 수루 부댜 부댜 보다야 보다야 마이트레야닐라칸타 카마수다르사나 프라흘라다마낫 스바하. 닐라칸타야 스바하. 바라하무카싱하무카야 스바하. 파드마하스타야 스바하. 차크라유다야 스바하. 상카사브다비보다야 스바하. 마하라쿠타다라야 스바하. 뱌그라차르마니바사나야 스바하. 나모 라트나 트라야야. 나마 아랴발로키테스바라야 스바하.
이런 밀교의 진언,다라니는 법화경 보문품에서 '관세음을 생각하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라.'는 교설에 근거를 두고 발전한 것임을 전술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다른 종교의 주술(呪術)을 관음신앙 속에 포섭하고자 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변화(變化)관음이 힌두이즘(Hinduism)의 신들을 불교화하려고 했던 것처럼 관음다라니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 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이제 민간의 주술(呪術)신앙에까지 깊이 침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세음보살의 지혜와 자비와 활동을 되돌아볼 때 그를 이제 어지 한낱 보살이라고만 보겠는가? 부처가 아니고는 도저히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관세음보살의 19응신이나 32응신 속에는 '부처의 몸'이 들어 있다. 따라서 관세음은 이미 부처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관세음삼매경(觀世音三昧經)에도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부처님이 아난(阿難)에게 이르시길, "내 이제 진실을 말하노니 거짓이 아니니라. 관세음을 생각컨대, 그는 나보다 앞서 성불하여 이름을 정법명(正法明)여래라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관세음은 여전히 보살로 활동하고 있다. 관음수기경(觀音授記經)에는 그가 아미타불에 이어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까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남자여,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겁(劫)이 되면, 아미타불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리라.... 아미타불의 정법(正法)이 멸한 뒤 한밤을 지나 새벽 빛이 틀 무렵, 관세음보살은 칠보(七寶)로 된 보리수 아래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이름을 보광공덕산왕(普光功德山王)여래라 하리라.
관세음보살은 이미 부처가 되었으면서도 이렇게 보살로 남아 있고 수기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천수경은 다음과 같은 해명을 베풀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위신(威神)의 힘은 이미 과거 무량한 겁에 성불하여 이름을 정법명(正法明)여래라 하였건만, 큰 슬픔과 발원의 힘으로 일체 보살을 일으키고 일체 중생을 안락하게 성숙시키고자 현재 보살로 있는 것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공경하고 공양하고 진심으로 그 이름을 불러라. 무량한 복을 얻고 무량한 죄를 멸하여, 목숨이 다해서는 아미타불의 나라에 가게 되리라[千手陀羅尼經, 大正 20/110/a, "善男子 此觀世音菩薩不可思議威神之力 已於過去無量劫中 已作 佛竟 號正法明如來. 大悲願力 爲欲發起一切菩薩 安樂成熟衆 生故現作菩薩. 汝等大衆....皆應恭敬莫生輕慢. 一切人天堂須 供養專稱名號 得無量福滅無量罪 命終往生阿彌陀佛國."].
관세음보살이 부처의 몸이면서 보살로 있는 것은 중생을 건지려는 큰 슬픔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의 몸으로는 중생의 몸을 건질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교리적으로 볼 때, 보살의 반야바라밀다와 부처의 깨달음 중에서, 중생의 괴로움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것은 전자이다. 후자는 반야를 완성하여 피안에 이른 보살(不退轉 보살)이 다시 추구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의 괴로움을 건지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 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자가 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관세음보살은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큰 반야와 큰 자비의 실천자요, 괴로운 세계(五蘊 : 다섯 근간)의 구세주요, 극락세계의 안내자요, 다른 종교의 너그러운 포용자요, 중생과 괴로움을 함께 하려고 부처의 자리까지 박찬 구원(久遠)의 보살인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때마다 인간들은 하늘이나 신을 우러러 구원을 빌어 왔다. 그런 신앙의 대상을 찾을 경우, 관세음보살보다도 더한 종교적 신격(神格)을 찾을 수 있을까? 불교 경전에 설해진 숱한 불,보살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종교의 천신들 중에서도 그에 견줄 만한 대상은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구제력(救濟力)은 아무 종교에서나 터무니없이 서술하고 주장할 수 있는 종교적 가설(假設)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앞서 간단히 소개했지만 불교는 괴로움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하여 그 근본 원인과 해결의 길을 밝히고 있다. 관세음 신앙은 그런 지(知)적인 보편성을 지닌 반야바라밀다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관세음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면 어떤 괴로움도 벗어나리라."는 법화경 보문품의 설은 믿을 만한 진실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하고 싶다.
3. 생각하고 부르는 마음의 자세
'믿을 만한 진실성'이 있다면 괴로울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즐거울 때도 관세음보살을 지심으로 생각하고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누구나 불행은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생각하고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는데 어떤 방법이나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인가. 관세음 신앙에는 심오한 반야사상이 깔려있다. 덮어놓고 믿으면 된다는 그런 식의 신앙이 아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되 그것을 어떤 마음자세로 행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은 누구나 살기 위해서는 아는 새 모르는 새 욕심을 내고 악을 짓게 마련이다. 악업에서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고, 괴롭기 때문에 다시 악을 짓게 된다. 그리하여 끝없는 죄악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죄악 중생이 어쩌다가 착한 벗으로부터 관세음보살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의 구원을 받고자 한다하자. 그런 사람은 캄캄한 마음의 치암(痴暗) 때문에 관세음보살을 전혀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큰 소리로, 낮은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 그런 부름(念誦)을 한결같이 하는데 염주(念珠)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절대적인 구세주(救世主)로 믿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서 절대적인 신앙을 강요하고 있듯이. 이때의 관음신앙도 절대성을 띠어야 한다. 밀교에서 여의륜,십일면,불공견색,천수천안.... 등의 절대적인 신격의 변화(變化) 관음을 설하고, 많은 주술적(呪術的) 관음 다라니를 설하고 있음은 이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이 이렇게 절대적인 신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기에, 관세음보살께 공양(供養)하는 것도 필요하다. 보문품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여러나라에 다니며 중생을 건지시나니, 너희는 마땅히 일심으로 그 에게 공양하라." '공양'이라는 말은 값진 것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다른 종교의 '공희(供犧)'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관세음살의 탱화(幀畵)나 조상(彫像)이 있으면 그 앞에 나아가 공양하고 참회,기도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밀교 경전에 많은 관음 의궤(儀軌)가 설해져 있음은 이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자가 이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다할 때 관세음보살은 반드시 그 앞에 몸을 나타내실 것이다. 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의 19응신(應身)이 설해지고 있고, 능엄경은 이것을 32응신으로 부연했음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밀교의 변화관음 또한 동일한 응신에 속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관세음(samanta-mukha, 普門)의 얼굴'은 어찌 경전에 설해진 것에 한정하랴. 우리가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갖가지 인상들도 관세음보살의 얼굴로 보아야 한다.
그럴 때 관세음보살은 부르는 자의 뜻을 살펴 그를 괴로움에서 건져줄 것임은 틀림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관세음보살은 어느 신격보다도 가장 믿을만한 진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상황이 급박하여 죽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관세음보살은 그를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면 된다.
이런 절대적인 신앙 관계 속에서 기적과 같은 영험이 나타날 수 있다. 못 고칠 병이 낫는다던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던가, 헤어진 사람을 만난다던가,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된다던가..... 불교에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지지만 관세음 신앙에 결부 된 것이 가장 다양하고 풍부하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자와 관세음보살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관계를 감응도교(感應道交)라 부른다. 전자는 '능히 느끼고(能感)', 후자는 '능히 응하는데(能應)', 그들이 서로 사귀기(道交) 때문이다[知禮述, 관무량수불경소묘종초 권 4, 大正 37/220/a]. 이런 감응도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중생이 먼저 관세음보살을 믿고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 능감(能感)이 없는 곳에 능응(能應)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먼저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타자(絶對他者)적인 관세음보살의 구제력에 의지하는 믿음만으로 시종일관해도 좋을까? 다른 종교라면 몰라도 불교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거든, 그러한 신앙과 함께 다시 선업(善業)을 힘써 닦지 않으면 안된다. 괴로움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신도 아니요, 운명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지은 악업이라고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모든 불,보살은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을 믿고 따른다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미타불의 발원(發願)과 그 성취를 절대적인 신앙의 근거로 삼는 정토신앙에서도 믿음과 함께 선업에 힘쓰고, 아함경이나 대승경전의 교리를 공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뜻을 무량수경의 3배(三輩)설과 관무량수경의 9품(九品)설에서 엿볼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무량수경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사람을 상,중,하 세 무리(三輩)로 가르고, 관무량수경은 그것을 다시 세분하여 아홉 품(九品)으로 가르고 있는데, 평소에 선업(功德)과 대,소승의 수행을 닦지 않다가, 임종에 이르러서야 아미타불을 찾는 사람은 극락세계에 가기는 가되, 최하위(무량수경의 下輩, 관무량수경의 下品下生)로 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뒤 무량수경은 다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실감나게 서술하고, 선업을 닦을 것을 누누히 권하고 있다. 그 일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이런 속에서도 덕(德)을 심고, 은혜를 베풀며, 법을 어기지 말라. 괴로움을 참고 노력하며, 일심으로 지혜를 닦아 교화에 힘쓰되, 선업을 선양하고 마음을 바로하라..... 이곳의 하루밤 계행은 극락세계의 백년에 맞먹고..., 이곳의 열흘밤 선업은 다른 부처 땅의 천년에 맞먹을 것이다... 내 너희 천신과 인간의 무리를 불쌍히 여겨 간절히 일러 선업을 닦게 하느니라.
선업을 행하기 어려운 악조건에서 선업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공덕이 되리라는 것이다. 관음 신앙은 이와 같이 선업과 불교 공부에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질병이나 재앙의 퇴치를 목적으로 행하는 관음다라니의 염송(念誦)에서도 비슷한 뜻을 살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못 고칠 병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이 아예 의약을 무시하고 종교적 힘에만 의지하려 하 거나, 또는 그 반대의 길을 취하려는 것을 본다. 이런 치우친 방향 또한 건전한 신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병의 효과적인 치료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환자의 강렬한 삶의 의욕과 희망(신앙)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다시 적절한 의약의 투여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천수관음의 치병합 약경(治病合藥經)이나 대비심다라니경(大悲心陀羅尼經)에는 관음 염송과 더불어 의약을 함께 사용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관음 신앙의 건전한 방향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앙이 기적이나 영험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영험을 얻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신앙과 회의(懷疑) 사이를 헤매고 있다. 불교의 업설(業說)은 신앙의 그런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괴로움의 인과(因果)를 뚜렷이 밝힌 합리적인 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업설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선업을 지어도 인간존재의 덧없음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성에서 다시 설해진 것이 아함경의 아집(我執)부정의 교설(四聖諦說)이요, 그런 아집 부정의 교설이 한층 더 철저해진 것이 대승불교의 반야(般若)교설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펴본 바와 같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그러한 대승의 반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보살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자는 다시 한걸음 더 들어가 아집과 분별망집(分別妄執)을 부정하는 철저한 수행(修行)에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사리불에게 심오한 반야교설을 베풀고, 관무량수경에서 대승행자(大乘行者)는 극락왕생의 최상위(上品上生)에 배속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관세음보살을 따르는 자가 어찌 단순한 신앙이나 선업에 머물러야 되겠는가.
관세음보살을 따르는 자가 이렇게 아집과 분별망집을 부정하는 철저한 수행에 힘쓸 때, 관세음보살은 그에게 이제 어떤 모습으로서 행자의 마음 밖에서 비추일까? 그럴 까닭이 없다. 분별망집이 공한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나와 남, 안과 밖, 부처와 중생.... 등, 일체의 차별이 없다. 내 마음이 곧 관세음이고, 관세음이 곧 내 마음이다. 따라서 밖에서 비치던 관세음보살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해입상응(解入相應)이라 한다. 밖에서 들어온 관세음보살(入)과 중생 본래의 마음(解)이 서로 하나가 된다(相應)는 뜻이다.
자기 마음 안에서 진정한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이런한 대승 공관(空觀)의 실천은 관세음보살의 '대비심다라니'를 외울 때도 마찬가지다. 천수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큰 자비의 마음은 평등한 마음이요, 함이 없는(無爲) 마음이요, 흐린 집착(染着)이 없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 곧 대비심 다라니의 모양(相貌)이니, 너희는 마땅히 이것에 의지해 수행하라.... 이 다라니를 외는 자는 마땅히 큰 깨달음의 마음을 내어(發廣大菩提心) 일체중생을 건지고자 서 원하고, 몸에는 계율을 지니고,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내라.... 내 그런 사람을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보살펴 지켜 주리라[千手陀羅尼經, 大正 20/108/a, "觀世音菩薩言 大慈悲心是平等心 是無爲心 是無染着心 是空觀心 是恭敬心 是卑下心 是無雜亂心 是無見取心 是無上菩薩心. 是當知 如是等心 卽是陀羅尼相貌. 汝當依此而修行之.... 觀世音言 若善男子 善女人 誦持此神呪者 發廣大菩提心 誓度一切衆生身 持齋戒. 於諸衆生起平等心 常誦此呪 莫令斷絶..... 我時當 以千眼照見千手護持."].
대비심다라니의 염송과 함께,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대승공관(空觀)의 실천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주술적인 힘만을 기대해서야 되겠는가.
반야의 완성으로 괴로움의 물리적(物理的)인 해결은 가능해 진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은 편안할 수가 없다. 뒤에 많은 동료 중생이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보살은 다시 동료 중생들의 괴로움을 크게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피안에서 차안에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깨달음이 완벽해진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자는 마침내는 바로 그 '관세음'보살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의 관세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부름에 능히 응하는 응신(應身)으로서의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화경 보문품의 19응신은 중생의 견지에서 볼 때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응현(應現)하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애초에 '보살을 가르치기 위한 법(無量義敎菩 薩法佛所護念)'이다. 따라서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보문품의 19응신은 보살들에게 그런 응신을 나타내 중생을 건지라는 간곡한 교시(敎示)로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관세음을 생각하고 부르라'는 말에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은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다. 절대적인 믿음에서 적극적인 선업에로, 거기서 다시 아집의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대승 공관(空觀)의 실천에로, 그리하여 또다시 큰 자비의 구제활동에로 심화될 것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생각한다(念)'는 말은 다른 종교의 '믿는다(信)'는 말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믿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절대적인 타자로서의 관세음보살을 우러러 공양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感應道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자기 마음 안에서 발견해야 하고(解入相應), 마침내는 자기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應化). 다른 종교의 '믿음'과는 엄청나게 다른 종교적 깊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믿어라'하는 것보다는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술어가 이상과 같은 뜻을 가졌기에 불교 교리에는 그말이 수없이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 들어온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1.부처 2.법 3.승가 4.보시 5.계 6.하늘의 여섯을 생각해야 하고(六念), 1.몸 2.느낌 3.마음 4.법의 네 곳을 생각해야 한다(四念處).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의 법수(法數)에도 '생각'이 항상 끼어 있다. 대승불교의 관음신앙, 정토신앙, 밀교신앙에도 '생각'이 핵심적인 개념이 되고 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타력(他力) 정토 신앙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치고 있지만, 그곳에서도 다음과 같은 설이 보이는 것이다.
모든 부처는 법계(法界)의 몸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 생각(心想) 속에 들어간다. 따라서 너희가 마음에 부처를 생각 할 때 그 마음이 곧 부처의 형상(三十二相)이다. 그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是心作佛), 그 마음이 곧 부처이다(是心是佛). 모든 부처의 깨달음의 바다 또한 마음의 생각 속에서 일 어난다. 그러니 마땅히 한 마음에 생각(念)을 묶어 그 부처를 밝게 볼 것이니라[觀無量壽經, 大正 12/343/a, "諸佛如來 是法界身 遍入一切衆生心想中. 是故汝等心想佛時 是心卽是 三十二想八十隨形好. 是心作佛 是心是佛. 諸佛正遍知海從 心想生. 是故應當一心繫念諦觀彼佛."].
그렇게 하여 부처를 보게 되면 시방(십방)의 모든 부처를 보게 되나니, “모든 부처를 보게 되기에 그것을 염불삼매(염불삼매)라 한다[觀無量壽經, 大正 12/343/b, ".....但當億想令心明見. 見此事者 卽見十方一切諸佛. 以見諸佛故名念佛三昧."].” '생각'이란 말이 어떤 깊이를 갖고 있는가를 뚜렷이 해주고 있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라'는 말이 이런 종교적 깊이를 가진 것으로 경전에 사용되고 있다면, 그 뜻에 따르는 자세로 불,보살이나 다라니를 염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불교학에는 관음신앙이나 정토신앙 또는 진언 염송의 '생각'을 단순히 '입으로 부르는 것(口稱)'에 한정시키려 한 사상이 있었고, 그런 사상이 오늘까지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염불(念佛), 칭명(稱名), 송주(誦呪), 창제(唱題) 등의 어느 하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밖의 모든 불교를 배격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한 사람들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오도(誤導)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관세음보살의 구제를 받더라도 확실하게 받게 할 것이지, 왜 그림자 같은 응신(應身)의 .험(靈驗)이나 기대하게 하는가. 극락세계에 가더라도 상품(上品)이나 중품(中品)으로 가게 할 것이지, 왜 하품 중에서도 최하등(下品下生)으로 가게 하는가. 다라니를 외더라도 지혜를 얻게 할 것이지, 왜 저속한 주술에나 빠지게 하는가. 그들은 불교의 심오한 교설을 좁은 소견으로 은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저속한 타력(他力) 신앙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은 하루 속히 청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생각(念, smrti)이라는 말 속에 부처님이 정성드려 시설(施說)해 놓으신 미묘한 신앙의 구조와 깊이를 온전히 살려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은폐하거나 손상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확고한 믿음의 힘을 주어 절망적인 괴로움을 헤쳐 나가는 밝은 희망의 빛이되게 할 것이다.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라. 그러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불교경전을 읽다 보면 수많은 보살이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와 친숙한 분중의 한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십니다.
법상으로 보면 지장보살은 세간법인 인과법과 관련되고 관세음보살은 출세간법인 오온사제와 공과 관련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관세음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행하실때 살펴보시니 다섯가지 근간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성품이 모두 비었음(공)을 보셨는니라'라고 시작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관세음 보살 신앙의 바탕은 법화경 보문품에서 인간생활에서 겪는 절망적인 극한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지장신앙과 함께 우리 한국불교의 큰 신앙의 대상이된 관세음보살에 대하여법상측면과 신앙측면 모두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기도중에 관세음 보살을 명호하지만, 대부분 관세음 보살에 대하여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관세음 보살에 대하여 보다 더 정확이 그 분의 뜻을 알고 기도한다면
보다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본 글은 "자비 크시사 누리 건지시는 관세음보살, 고익진 저, 일승보살회 교제용"입니다. 갈무리 하시어 출력해봄도 좋지요.
1.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라.
뭇생류중에서 인간으로 생을 받는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지상의 어느 생류보다도 인간은 복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음과 건강이 함께 할 때 인생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다. 높은 산봉우리를 정복하고 넓은 바다를 가르는 젊음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즐겁게 한다. 젊음이 있기에 세상은 온통 아름답고, 곳곳에 노래와 춤이 아우러져 흐른다.
그러나 그런 젊음과 건강에 왜 추한 늙음과 병이 찾아들어, 마침내는 저 막막한 죽음의 어둠 속에 사라지게 하는가. 지상에 생을 받는 자로서 영원한 젊음을 누린 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예수도 석가도 현실적으로는 모두 돌아가고 말았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여도 영원한 젊음과 건강은 실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젊음과 건강은 한때의 꿈이요, 마침내 괴로움으로 끝날 덧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음과 건강에 못지 않게 진실한 사랑 또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내가 비록 불행하게 되어도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는 한없이 그리운 것이다. 진실한 사랑만 있으면 인생이 어찌 외로다 하랴. 문학작품이 재산이나 권리보다는 사랑을 즐겨주제로 삼음은 이 때문 이리라.
그러나, 그러한 사랑에도 왜 쓰라린 헤어짐이 찾아드는 것일까? 영원히 맺지 못할 사랑의 애달픔.... 설혹 맺어졌다 해도 이내 떠나가는 이별의슬픔...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을 함께산다 하여도 죽음에 임해서는 별 수 없이 헤어지고 말 것이다. 사랑 또한 영원한 가치라고는 할수는 없다.
헤어짐이 괴로움이라면 만남은 행복한 것일까? 이것 또한 일률적으로는말할 수는 없다.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즐겁지만 우리가 매일 만나야 할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저 강인한 인상들, 오만한 태도, 간사한 웃음, 타사적인 접근.... 남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마음 먹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뿐이다. 만남 또한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도 정말 힘이 든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자기 혼자 힘으로 살아갈 힘을 가졌건만, 인간은 왜 나면서부터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일까, 아침 저녁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 일을 해도 일을 해도 항상 부족한 살림.... 서로 속이고 짓밟는 아귀다툼에서 패배하는 날이면 사회의 영원한 낙오자가 되고 만다. 설혹 성공하여 넉넉한 의식주를 확보하고 부귀한 권세를 얻었다고 하여도 그것이 또 얼마나오래가는 것인가. 인생은 참으로 막막한 괴로움의 바다라 하지 않을 수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다. 무엇을 위해 살고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젊음과 사랑을 주었으면 그것을 영원히 누리게 할것이지, 왜 이렇게 늙음과 헤어짐이 있게 하는가? 신의 벌이라면 가혹한 벌이요, 운명의 장난이라면 너무나 잔인한 장난이다. 또한 우리 마음의 무지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도 너무나도 어리석은 무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인간의 이런 괴로움을 한없이 괴로와 하시고, 그 근본적인 해결에 전생애를 바치신 분이라고 해도 좋다. 불교의 기초교설이 풍부하게 간직된 아함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수없이 되풀이 되고있다.
어떤것을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1) 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2) 늙고
3) 병들고
4) 죽는 것이 괴로움이다.
5)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6) 미움과 만나는 것이 괴롭움이고
7)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8)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근간(오취온)이 괴로움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인간의 절망적인 괴로움이 여덟가지 항목으로 잘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8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젊고 건강하고 살아 있는 것이즐겁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만나고 미운 사람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는 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인생의 어두운 측면에서 보다는 밝은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우리는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 하는데에 있다.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져 쓰라린 환멸만을 남겨주는 데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함경은 다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영원한 가치)'라고 할 수 없다" (삼법인설). 불교에서 인생을 괴로움이라고 단정함은 이런 현실의 엄현한 사실 때문이다. 일부러 현실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고자 한것은 아니다.
관세음보살 신앙의 바탕이 되는 법화경 권7 보문품에는 인간이 실재 생활 에 겪게되는 절망적인 극한상황이 다시 다음과 같이 나열되고 있다.
1) 큰불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타 죽게 되었을 때
2) 홍수가 져 세찬 물살에 떠내려갈 때
3)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 죽게 되었을때
4) 칼이나 몽둥이를 든 사람이 가해하고자 할 때
5) 무서운 귀신이 나타나 괴롭힐 때
6) 죄를 지어 또는 짓지 않고도 형틀에 묶이게 되었을 때
7) 장사하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도적들이 들끓는 험한 길을 지나게 될 때.
8) 음욕이 치열하게 일어날 때
9) 노여움이 불길처럼 일어날 때
10) 어리석음이 통탄스러울 때
11)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아들.딸을 바랄 때
12) 잘살던 살림이 갑자기 망할 때
이와 같은 열두 가지 상황은 법화경 보문품이 설해졌던 당시 사회의 두 드러진 재난을 열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찌 그뿐이랴. 그 밖에도 많은 재난이 있다. 따라서 그 열두가지는 몇 가지 예로 전체를 포섭하는 표 현양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슷한 사고와 재난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하여 뉴스에 보도되고 있다. 결코 남의 일만 이 아니다. 언제 자기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재난들일 것이다.
아미타불의 청정한 서쪽 극락세계를 설해주는 무량수경에는 이 세상의 괴 로움이 다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은 각박하여 급하지 않는 일에 아귀다툼하고, 그런 다툼 속에서 애타게 일하고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남녀.노소.존비 가릴 것 없이 재산을 걱정하고, 재산이 있건 없건 모두 노심초사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밭이 있으면 밭을 걱정하고, 집이 있으면 집을 걱정하고, 가축.노비.금전.가구의 복.음식 등을 걱정한다. 그런 걱정에 수재.화재.도난.빚 등의 걱정이 겹치고, 긴장이 쌓여 목숨이 끊어져 떠나가도 함께 가 줄 사람조차 없다.
부귀를 누리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이런 괴롱움이 있어, 추울 때나 더울때나 마음 놓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은 또 궁핍한 나머지 항상 모자라 한다. 밭이 없으면 밭 갖기를 걱정하고, 집이 없으면 집 갖기를 걱정하고, 가축.노비.금전.가구.의복.음식 등을 갖고자 걱정한다. 하나를 얻으면 다시 더 바라고, 그것을 얻으면 또 더 바래, 끝없는 궁핍에 허덕여,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마음 놓지 못한다. 그러다가 목숨을 잃으면 선한 일을 배본 적이 없 이 어느 길에 떨어질지를 알지 못한다."(무량수경 권하, 대정 11.274. b~c)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같이 겪는 세상의 괴로움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았지만, 불교는 다른 종교에서는 예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에 대한 의식이 강렬하다. 기독교가 인간의 죄에 대 한 의식이 강하고, 유고가 도덕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면, 불교는 괴로움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괴로움에 던져진 인간을 불교는 다시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 속에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절망적인 존재로 보는가?
그렇지는 않다. 불교는 우리에게 다시 괴로움을 극복할 밝은 희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 그것을 멸하는 수행의 길이 아함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 자세하게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수행의 길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히려면 모든 존재의 구조를 철저히 연구해야 하고 그에 입각한 수행은 꾸준한 노력 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이 아니면 실감하기 어렵다. 바쁜 세 상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겐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런 수행의 여유가 없는 절박한 상황에선 어떨까? 법화경 보문품에 나열된 열두 가지 상황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 있는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죽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 보문품은 그런 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라."고 한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이 곧 " 그 음성을 듣고 그들을 모두 위험과 괴로움으로붙터 벗어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무량 백천억 중생이 갖은 괴로움을 겪어도 관세음보살에 관해 듣고 한맘 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듣고 모두 벗어나게 해주시 리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자는 불에 들어가도 불이 태우지 못하나 니, 그 보살의 위신력 때문이다."(법화경 권7.보문품)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지 않을 수 없는 절망적인 사람에겐 꿈만 같은 희망 을 주는 말씀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관세음보살 을 부르는 것은 이 경전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 보문품을 일명 관음경이라고도 부른다.
아미타불의 서쪽 극락세계를 설해주는 무량수경과 같은 계통의 경전으로 관무량수경이 있는데, 그곳에는 그런 극한 상황에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라고 설하고 있다.
" 5역(五逆), 10악(十惡)과 같은 갖은 악업을 지은 중생은 마땅히 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괴로음을 받으리라. 그런 어리석은 자가 죽음에 이르러 다행 히 착한 벗을 만나, 그로부터 법을 듣고 부처님을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미 괴로움이 절박하여 부처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이 때 착한 벗이 이르기를 '부처님을 생각할 수 없거든 나무아미타불을 지 심(至心)으로 불러라.'하고 그가 지심으로 소리를 내어 끊어지지 않게 열 생각(十念)을 갖추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부처님의 이름을 부른 까닭 에 생각 생각에 80억겁 생상의 죄가 없어지리라. 그리하여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 해둘레(日輪)와 같은 금색 연꽃이 자기 앞에 나타남을 보고 한 생각 사이에 극락세계에 왕생케 되리라."(관무량수경, 대정 112.346.a)
무량수경에 의하면, 극락세계에 가려면 최소한 1) 깨달음(보리)을 얻겠다는 마음 일으키고(발심), 2) 열번이라도 아미타불을 지심으로 믿고 생각해야 한다(十念)는 두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그러나, 이 관무량수경에서는 그렇지 못한 죄악중생이라도 열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절박한 임종에 있는 죄악 중생에게 이 또한 커다란 희망을 주는 말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아미타불 신앙도 관세음보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요,그 연장이라 말해도 좋다.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두 보살을 모든 경전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라고 설하고 위의 관무량수경의 경문에도 곧이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연꽃 속에서 12대겁을 채우면 연꽃이 피고, 연꽃이 필 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곳에 이르러 큰 슬픔(大悲)의 음성으로 모든 법의 실상을 설해 죄악의 법을 멸해주시리라. 그러면 그는 그것을 듣고 환희하여 깨달음(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리라(발심)"(관무량수경., 대정 12.346.a)
중생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는 것은 관세음과 대세지 두 보살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세음보살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경전은 '큰 우정과 큰 슬픔(대자대비)'의 대표적인 보살을 관세음으로 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징이 풍부한 밀교 계통 경전에는 관세음보살의 그러한 세상을 건지는 기능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관세음보살의 분신을 발생하고,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가지 진언과 의궤(儀軌)가 설해지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불러도 물러서지 않는 단계(불퇴전지不退轉地)에 오르고 모든 병과 장애와 두려움을 떠나고 죄업을 소멸하리라. 하물며 관세음보살이 설한 진언을 지니고 읽고 행함에 있어서랴. 마땅히 알라. 그는 깨달음을 얻음이 마치 손바닥에 있는 것과 같으리라."(십일면신주심경, 대정20.152.c)
밀교경전에 설해진 그러한 관세음보살의 진언은 너무나 수가 많고 복잡하여 간단히 소개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예송하는 천수천안관세음경의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는 그 중의 하나로서, 그 내용은 뒤 '2절 관세음보살은 어떤 보살인가' 에서 소개하겠거니와,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생각한 뒤 이 대비심다라니를 외면 다음과 같은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 오랜 생사의 중죄가 멸하고,
2) 뜻하는 부처님의 땅에 태어나고,
3) 3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4) 무량한 삼매와 변재(辯才)를 얻고
5) 구하는 바를 얻고,
6) 뜻대로 남자의 몸을 받고,
7) 참회할 길 없는 파법(破法)의 죄를 멸하리라"는 것 등이다.
뿐만 아니라 그 진언을 외우는 자는 15종의 좋은 생을 받고, 15종의 나쁜죽음을 안받는다고 한다. 그 중 15종의 나쁜 죽음은
"1) 굶어 죽는 것
2) 형벌로 죽는 것
3) 원수 손에 죽는 것
4) 전쟁에서 서로 죽이는 것
5) 짐승에게 물려 죽는 것
6) 뱀에게 물려 죽는 것
7)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 죽는 것
8) 독약에 의해 죽는 것
9) 벌레 죽에 죽는 것
10) 미쳐 죽는 것
11)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것
12) 악인 때문에 죽는 것
13) 악귀 때문에 죽는 것
14)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는 것"등이다.(上揭經, 대정 20.107.b)
이것은 관음경에 설해진 극한상황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훨씬 더 확충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과 함께 그의 본사(本師)이신 아미타불을 생각하라는 것은 아미타불 신앙까지 그 속에 종합하고자 한것임을 알 수 있다. 밀교 경전은 인도 대승불교의 후기에 성립한 것이므로,그런 종합적인 색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교에서 '진언'을 중시하게된 것도 관음경이나 무량수경에서 설하고 있는 '이름부르기'가 진언의형태로 발전해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밝은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대승불교의 여러 교설은 모두 법화경 보문품의 관세음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 믿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관세음이라는 보살은 어떤 분이기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하나만으로 절망적인 괴로움이 저절로 해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법화경은대승경전에서 믿음과 절대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경전이다 "부처님이 이룬 희유하고 난해한 법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시나니, 그 법에 큰 믿음을 낼지니라."라고 설하고 있으며(법화경 제 1권 방편품), 보문품에도 "괴로움과 죽음에 임해 의지할 바는 오직 관세음이라는 것을 생각생각에 의심치 말라" 고 설하고 있다.(상게경 권 7 보문품, 대정 9.58.a)
무량수경에는 "만일 어떤 사람이 죄와 복은 믿지만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지혜를 의심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란다면, 그곳에 왕생하더라도 그의심 때문에 궁전 같은 곳에 갇혀 5백세 동안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설해있다. 앞에 소개한 밀교의 천수경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비심대다라니를 외면 어떤 중죄라도 없어지지만, 다만 한가지 그 진언에 의심을 일으킨 자는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어있다.(천수다라니경, 대정 20.107.a)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절대성은 다른 종교에서도 다같이 설하고 있다. 가령 기독교를 예를 들면, 신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요,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이 신을 알고자 하거나 되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요 죄악이다. 죄를 범한 인간은 신의 용서를 바라고 그 구원을 전적으로 믿을뿐이라고 한다. 믿음의 절대성이 관음신앙에 못지 않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덮어놓고 믿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사람을 잘못 믿었다가 화를 입는 경우를 흔히 보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광신자에 의해 오도되고 있는가?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재산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믿을 만한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혜에 의해 뒷바침 될 때 믿음은 비로소 건전한 방향을 잡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전부라고 하지 않는다. 깨달음에 들어가는 길목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법화경은 믿음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경전이지만, 불교에 들어온 자가 부처님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대의 교만이라고 설하고 있다. 기독교의 교만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화엄경 또한 보살의 길은 맨 먼저 믿음에서 시작하여 (10信), 10주(住), 10행(行), 10회향(廻向), 10지(地)를 거쳐 깨달음에서 완결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관음신앙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단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영험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도대체 어떤 보살이기에 그런 힘을 가지고 계신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그럴만한 진실성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은 한결 더 확고해지고 순수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관세음보살은 어떤 보살인가.
관세음보살은 우선 불교경전에 괴로움의 근본을 다한 반야(지혜)의 대표적인 보살로 설해지고 있다. 앞서 우리는 괴로움의 양상에 대해 살펴본 바 있거니와 그런 괴로움은 인간에게 왜 있게 되는가? 신의 벌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인간의 무지 때문인가. 불교는 물론 맨 마지막 경우로 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을 간단히 제시할 수는 없다. 불교의 전체 교리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그에 입각해서 수행해 보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의 전개상 필요한 몇 마디 말은 불가피할 것 같다.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나’(불변의 주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렇게 덧없는 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다. ‘나’(不變)라고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변했다가는 ‘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에 변화가 생기면 그 영향을 받아 ‘나’의 물질적인 바탕은 변하고자 한다. 물질적인 것(色)은 외부의 대상이건 내부의 신체적이건 간에 자연법칙적 인과율(因果律)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의지(意志)적인 아집(정신)은 자신의 존속을 위해 자연적인 변화(신체)에 대해 역작용(逆作用)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역작용은 힘이 들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힘드는 것이 바로 괴로움(苦)이다.
따라서 중생은 이런 안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밖으로 업(활동)을 일으키게 된다. 괴로움을 주는 대상을 미워하고 편안함을 주는 대상을 사랑한다. 그런 업(원인)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과보(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을 위한 악업(惡業)에는 괴로움이... . 따라서, 금생(今生)에 받지 못한 과보는 내생(來生)에라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업과 과보의 인과(因果)관계는 과거.현재.미래의 3세(三世)에 걸쳐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3세 인과(因果)를 깨친자는 스스로 악업을 끊고 선업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 남을 생존 경쟁적 적대자로 보지 않고, 자신의 안락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동반자로 보게 된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지 않고 한없이 베풀어 주려(布施) 한다. 이런 우정(友情)이 곧 자비(慈悲)라는 말 속의 그 ‘자(慈)’이다. 그러나 이런 깨침이 없는 자는 어떨까? 어두운 무지속에서 갖은 악업을 지을 것이고, 악업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른다. 그리하여 절망적인 괴로움의 길을 더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절망적인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무엇인가는 이제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 바로 자기 마음속의 무지와 밖으로 향한 악업인 것이다. 동시에 그런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도 물을 필요가 없다. 무지와 악업을 멸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고(千古)의 베일에 가렸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다. 인류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 문제로 번민해왔던가. 불교가 제사(祭祀)나 기도(祈禱) 보다도 선업을 강력하게 권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의 문제가 완전히 풀릴 것인가. 인간의 선업에는 한계가 있다. 저 광막한 우주와 무량한 생류 속에 인간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언젠가는 덧없음을 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업(業)의 이런 한계성을 극복할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럴 경우, 안으로는 눈을 돌려 아집(我執)이라는 것에 주목하게 될 것은 당연한 순서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아집으로 말미암아 안에 괴로움이 생겼고, 그 괴로움을 덜려고 밖으로 활동을 일으킨 것이 선.악(善惡)의 업이기 때문이다.
아집은 분명히 잘못된 집착이다. 모든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나’라고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체(實體)가 없는 허망한 것을 집착한 망집(妄執)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망집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이 발생하고 그로 말미암아 생사의 괴로움에 헤매고 있다면, 어찌 그것을 그대로 놓아 두랴. 철저하게 망집을 부정하여(無我實踐) 참다운 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불교의 교리는 세속적인 교설에서 다시 아집 부정의 해탈(解脫)의 교설로 발전하고 있다.
아집을 버리고 담다히 바라보는(사[捨]) 경계, 그것을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괴로운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해탈(解脫)이라고도 부르고, 뜨거운 번뇌의 불길이 꺼졌다고 해서 열반(涅槃)이라고도 부른다. 아함경의 궁극적으로 설하는 종교적 이념은 바로 이런 열반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열반을 다시 ‘절대적인 실체’로 집착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 또한 일종의 아집이요, 망집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여란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생사’라는 것이 있으므로 그에 따라 있게 된, 일종의 상대적인 진리이다. 불교술어로 말하면 ‘연생(緣生) 한 법’이다. 따라서 그런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집착한다면 그것을 어찌 망집이라 하지 않겠는가.
망집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른다. 앞서 우리는 아집에서 괴로움이 발생케 되는 이유를 간단히 살펴본 일이 있지만, 그런 원리가 이 새로운 망집에도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생사와 열반 등을 분별(分別)하는 망집을 부정한느 교설이 다시 베풀어지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바로 이런 자각에서 일어난 불교라고 해도 좋다. 대승경전 초기에 성립한 금강경(金剛經)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은 어떻게 깨달음에 마음을 내야 하는가(發心). 일체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되,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고 보라. 왜냐하면 보살에게 조금이라도 아집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별망집을 부정하는 대승보살의 행은 끊임없이 게속될 수 밖에 없다. 어떤 경계를 얻으면 그것 또한 분별망집이 됙 때문이다, 얻음도 없고 얻음 아닌 것도 없다. 중생은 본래부터 청정(淸淨)하다. 모든 법은 이렇게 자성(自性, 아집)이 공(空)해 버리지만, 그러나 이러한 공은 허무나 공간과 같은 개념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그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한없이 청정한 법계를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혜를 반야(般若)라 하고, 그런 반야는 궁극적으로 이 세계를 초월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라 한다. 반야가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뜻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은 이런 반야의 완성에 의해 비로소 해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승불교는 방대한 양의 반야경전(般若經典)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이 공관(空觀)의 실천을 통해 피안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이 괴로움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볼 수는 없다. 왜 그런가? 자기는 비록 벗어났지만, 무수한 동료 중생들이 뒤에서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와하는데 어찌 자기만이 행복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시 괴로운 세계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동료 중생들이 건지는 데 몸을 바칠 수 밖에 없게 된다. 보살의 이런 마을을 큰 우정(大慈)이요, 큰 슬픔(大悲)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피안에서 차안(此岸)에 돌아오는 그런 과정에서 보살의 깨달음은 지극히 바르고 원만한 것이 된다. 보살은 피안에 이르러 깨달은 바가 없지 않지만, 그러한 깨달음은 피안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런 깨달음의 빛으로 다시 차안에 돌아와 차안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전체적인 법의 실상(實相)이 요연(了然)해질 것이다. 이런 ‘다시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보살은 얻게 되고,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여래(如來)요, 부처라고 부르레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법화경은 불교를 더러운 땅(차안)에 피는 하얀 연꽃에 비유하고, 불교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 땅(佛國土)을 장엄(莊嚴)하고 중생을 가르칠 것이 모든 보살의 사명(수기,授記)으로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중층(重層)적으로 심화되는 불교 교리는 법화경의 이런 교설로 일단 체게적인 골격이 갖추어진다. 화엄경, 무량수경 등 그 밖의 교설들은 이상 간단히 소개한 교리조직을 바탕으로 그것을 부연 응용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이런 불교 교리 체계에서 반야교설을 대표하는 보살로 설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방대한 반야경의 핵심을 따낸 반야심경은 다음과 같은 서두로 시작되고 있다.
거룩한 관자재(觀自在 : 관세음)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 바라밀다에 행하하실 때 자세히 내려다보시니 다섯 가지 근간[五蘊]이 있는데, 그들은 자성이 모두 공함을 보셨느니라.[梵文 般若心經에 의함]
뿐만 아니라 그 뒤의 본문은 관자재보살이 사리불에게 반야의 진리를 설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반야심경 또한 일종의 관음경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방대한 반야경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성립 또한 이른 것으로는 볼 수 없다(4세기 경 성립). 따라서 반야심경에 관세음보살이 주인공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곧 반야의 대표적인 보살이라고 단정함은 속단이라고 할지 모른다. 반야교설 발전의 근본이 되는 소품반야경에는 관세음의 이름은 보이지도 않고 대신 살다바륜(薩陀波崙)과 담무갈(曇無竭)보살이 등장하고 있다.[소품반야경 권 10 살다바륜품 ; 동담무갈품] 그러나 소품반야경의 그 두 보살 가운데서 전자는 반야를 구하는 자로, 후자는 반야를 설하는 자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반야를 직접 실천했던 자요 지금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하는 자로 나타나, 한 몸에 그두 측면이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자재라는 이름은 그가 반야의 대표적인 보살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관자재는 범어로 'avalokitesva-ra'로 되어 있는데, 'avalokita'와 'isvara'로 분석된다. 그 중에서 전자는 'avalokayati(내려다 본다)'라는 말의 과거분사(형용사)이고, 후자는 '가진 임(主)', '다스리는 임'이라는 명사이다. 따라서 '내려다뵌 임'이라는 뜻이 되지만, 범어에서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전용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내려다뵌(과거분사)'은 '내려다본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이렇게 해석할 경우 'isvara'라는 말과 잘 어울려 '내려다본 것을 다스리는(또는 가진) 임'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 '내려다본 것'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위에 인용한 반야심경의 서두에 "관자재보살은 자세히 내려다 보시니 다섯 가지 근간이 있다."는 구절이 보인다. '내려다본. 다(觀)'는 말이 서로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려다본 것'은 '다섯 가지 근간(五蘊)'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섯 가지 근간은 아함경에서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근간적인 부분, 곧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가리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것(一切), 모든 법(諸法), 이 세계(世間)를 가르킨다. 반야심경에서도 같은 뜻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한 다섯 가지 근간의 세계는 중생들의 분별망집이 행해지고, 그 때문에 절망적인 괴로움을 겪고 있는 곳이다. 그러한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멸하는 길은 그런 분별망집이 공함을 보고 그것을 철저하게 타파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은 곧 이어 "그들은 자성이 공함을 보셨다."는 말이 따르고 한역(漢譯) 심경은 다시 그 뒤에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셨다(度一切苦厄)."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은 일찍이 이러한 반야의 공관(空觀)을 실천하셨다. 반야심경의 서두는 관세음보살의 옛날 행을 서술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반야심경의 본문)은 어떤가? 피안에서 다시 차안에 돌아와 사리불에게 반야의 교설을 베풀고 계시는 것이다. 사리불은 아함경에서 가장 지혜가 수승한 부처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는 아직도 괴로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일체 중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내려다본 것'이라는 말에 '다스리는 임'이라는 말이 합성된 것은 그 보살이 이러한 차안에 돌아와 반야교설을 베풀어 중생들을 건지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관자재'라는 범어 이름은 그가 반야 교설의 대표적인 보살이라는 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 큰 반야와 큰 자비의 실천자로서의 그는 중생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그것을 다스리고(교화) 계시며, 중생들은 일심으로 그를 우러러 믿고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괴로운 세계의 임이요, 주(主)이시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을 소유하고 다스리는 신이 '하늘-임(天主)'이라면, 그런 하늘-임까지를 포함한 다섯 가지 근간(괴로움)의 세계를 소유하고 다스리는 보살이 바로 '관자재'라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분석되는 관자재의 범어 이름이 한자로는 관자재(觀自在) 또는 관세음(觀世音)으로 번역되어 있다. 전자는 '관(觀)'자를 능동태(能動態)로만 보지 않으면 어느 정도 원어에 가깝다 하겠지만[法華經 普門品에 '觀其音聲'이라는 말이 있어 '觀'字는 '본다'는 能動態의 뜻으로 보통 취하고 있지만 잘못이다. '본 바(所觀)'라는 過去受動分詞이다], 후자는 어떻 게 된 일인가? 학자들은 옛 범어 원전 속에 'avalokita(내려다 본)-svara(소리)'라는 말이 발견되므로[1927년 東 터키스탄 지방에서 발굴된 보문품의 梵語古寫本斷簡에 그런 범명이 뚜렷하게 보인다(觀世音菩薩の硏究 p.10).] 관세음은 그것을 번역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법화경 보문품에도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보고(觀) 해탈시켜 준다."는 말이 보이므로, 의미상으로도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혼성범어(混成梵語)에서는 'avalokitesvara'가 'avalokita- svara'로 철자(綴字)되기가 쉬운 일이며,[佛敎混成梵語(Buddhist Hybrid Sanskrt)에서는 sibilant는 흔히 교체되고, 모음 sandhi법칙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현 범본 법화경을 조사해 본 결과 '즉시 그 음성을 보고[卽時觀其音聲]'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법화경을 번역하면서 뜻을 보충하기 위해 써 넣은 것임에 틀림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음성은 듣는 것4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세음이라는 번역은 문제성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세음'이라는 이름은 오랜 신앙의 역사 속에 뿌리 를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자재'보다는 오히려 더 사람 들에게 친숙해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한낱 이름을 갖고 왈가왈 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관세음이건, 관자재이건, '내려다본 것의 임'이건 신앙의 대상은 다같이 그 '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은 그밖에도 대비성자(大悲聖者), 시무외자(施無畏者), 원통대사(圓通大士), 남해대사(南海大士), 천광명(千光明) 등의 많음 것이 있고[聖觀自在菩薩一百八名經(대정 20, 69-70)에는 관세음의 108종 이름이 梵音陀羅尼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이름과 분신(分身)이 나올 수 있다[三國遺事 卷 5 廣德嚴莊의 廣德의 妻는 관세음 19應身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상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살펴 보았거니와, 그런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세계에 활동할 때 설법과 방편은 어떻게 하는가?" 법화경 보문품(관음경)은 다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어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건져 주신다고 설하고 있다.
1.부처(佛) 2.벽지불 3.성문(聲聞) 4.범왕(梵王) 5.제석천(帝釋天)
6.자재천(自在天) 7.대자재천(大自在天) 8.천대장군(天大將軍)
9.비사문(毘沙門,四天王) 10.소왕(小王) 11.장자(長者) 12.거사(居士)
13.재관(宰官) 14.바라문(婆羅門) 15.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 (優波塞),우바이(優婆夷) 16.장자,거사,재관,바라문의 부녀(婦女)
17.동남(童男),동녀(童女)
18.천(天),용(龍),차(夜叉),건달바,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인비인(人非人) 19.집금강신(執金剛神)
모두 19항목에 이르고 있는데, 이것을 관세음의 19응신(應身)이라 부른다. 보문품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능엄경 권 6은 그것을 다시 가감,부연하여 32응신(應身)을 세우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능엄경 권 6(大正 19,128/c-129/a)의 32 應身은 다음과 같다.
1.佛 2.獨覺 3.緣覺 4.聲門 5.梵王 6.帝釋 7.自在天 8.大自在天
9.天大將軍 10.四天王 11.四天王太子 12.人王 13.長者 14.居士 15.宰官 16.婆羅門 17.比丘 18.比丘尼 19.優婆塞 20.優婆夷 21.女主,國夫人,
命婦,大家 22.童男 23.童女 24.天 25.龍 26.藥叉 27.건달바 28.阿修羅 29.緊陀羅 30.摩呼羅伽 31.人 32.非人,有形,無形,有想,無想].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부르는 곳은 어디나 찾아가신다. 하늘이건 인간이건 심지어는 귀신의 세계까지.... 그리하여 그들을 건질 수 있는 최선의 형상을 취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생은 그를 일심으로 공양치 않으면 안 된다[法華經 卷7 普門品, 大正 9/57/b, "以種種形遊諸國土度脫衆生.是故 汝等 應當一心供養觀世音菩薩."]."고 보문품은 말을 맺고 있다. '공양'이라는 말은 다른 종교의 공희(供犧)나 제사에 해당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최고의 신을 법화경에서는 관세음으로 대신해 주고 있음을 뜻한다.
반야심경과 보문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관세음의 성격은 그 밖의 경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해심밀경(解深密經) 권 4 지 바라밀다품(地婆羅密多品)은 보살의 10지(地)와 6바라밀(婆羅密)을 설해주고 있는데, 그것이 관자재보살과 부처님의 문답으로 진행되고 있다. 관자재의 반야적 측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 제 34 입법계품(入法界品)에는 55선지식[善知 識, 두번씩 만나는 사람이 있으므로 실지로는 53명]이 선재(善財) 동자의 보살행을 지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제 28번째 선지식으로는 '큰 슬픔의 법문과 광명의 행(大悲法門光明之行)'을 설하는 관세음보살이 등장한다[華嚴經 卷 51 入法界品, 大正 9/718/b, "善男子 我已成就大悲法 門光明之行 敎化成熟一切衆生 隨所應化善現其前."]. 관세음의 자비적 측면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법화경은 보살들께 지상의 부처나라를 장엄(莊嚴)하여 중생들을 가르칠 것을 수기(授記)하고 있음은 앞서 말한 바가 있다. 그러한 부처 땅은 보살 때의 발원(發願)에 따라 장엄의 양상이 달라진다. 대승경전에 설해지는 여러가지 정토(淨土)는 그런 발원에 의해 장엄된 과보(果報)의 땅[報土]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토는 부처님 수만큼이나 많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안락하기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쪽 극락세계(極樂世界)이다.
그런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설하는 경전에서 관세음은 다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대세지 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을 좌우에서 모시는 두 협시(脇侍) 보살의 하나로 나타난다. 우리들이 속해 있는 세계를 불교는 사바(娑婆)세계라 하는데, 법화경 보문품은 관세음의 구제활동을 분명히 사바세계의 일로 하고 있다. 사바는 극락세계가 아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이 그런 극락세계의 대표적인 보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은 사바에서 극락세계로 적(籍)을 옮겨간 것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관세음보살의 큰 슬픔과 구제 활동이 정토신앙의 형태로 확장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바는 참으로 괴로움 투성이다. 궁핍한 자원, 폭발적인 중생, 극심한 경쟁, 들끓는 죄악,수많은 질병.... 그 속에서 절망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어떤 곳에 태어나길 바랄까(願生)? 모든 종교는 천당이나 지옥과 같은 사후 세계를 설해주고 있다. 불교또한 업설에서 육도(天, 人, 修羅, 餓鬼, 畜生, 地獄) 윤회를 설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곳은 괴로움을 완전히 다한 곳이 아니다. 천당이나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덧없음을 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극락세계는 어떤가? 땅이 황금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물자가 풍족하고 영원한 수명과 광명이 넘치고 있다. 불보살이 주야로 법을 설해 누구나 쉽게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다. 사바세계나 사후 천국과 비교할 때 꿈만 같은 곳이다. 죽음에 닥친 자가 어찌 그런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부처님이 그런 사람들(願生者)을 위해 특별히 장엄해준 부처나라라 볼 수 있다. 무량수경의 삼배(三輩) 중생이나 관무량수경의 구품(九品) 중생 같은 왕생자는 모두 임종(臨終)을 계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극락세계가 그렇게 수승한 곳으로 주장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만일 그럴 만한 근거를 제시함이 없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극락세계의 장엄은 한낱 미사여구(美辭麗句)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믿을 만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근거를 찾을 경우 반야바라밀다를 떠나 어디서 찾을 것인가? 관세음보살은 바로 그런 반야바라밀다를 대표하는 보살이 다.극락세계의 장엄에 관세음보살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있다.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관세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정토 교설(淨土敎說)은 그것 자체가 관세음 신앙의 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큰 지혜 큰 자비의 실천자요, 괴로운 세계의 임이신 관세음 보살은 이제 이렇게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활동무대를 넓히고 있는데, 밀교경전에서는 다시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시는가? 우선 몸의 형태부터가 기괴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성관음(聖觀音. Aryalokitesvara bodhisattva)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Cintamanicakra bodhisattva)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Ekadasamukha bodhisattva)
불공견색관음(Amoghapasa bodhisattva)
천수관음(千手觀音. Sahasrabhuja bodhisattva)
마두관음(馬頭觀音. Hayagriva bodhisattva)
준지관음(Cundi bodhisattva)
청경관음(靑頸觀音. Nilakantha bodhisattva)
[大正藏經 卷 20에 수록된 觀自在菩薩 관계 경전 등에 散說되고 있다]
얼굴이나 눈, 손, 팔, 지니는 물건 등의 수와 모양이 기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관세음의 특징적인 의지와 활동을 구체적으로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여의륜관음의 여의보주(如意寶珠)는 모든 뜻을 성취시켜 주는 구슬로서 중생들의 욕구를 충분하게 만족시켜 주는 관세음의 능력에 통하는 바가 있다. 불공견색관음의 견색은 전쟁에 쓰는 올가미로서 중생을 붙잡는데 실패함이 없는(不空) 관세음보살의 큰 자비를 생각케 한다. 천수관음이 가진 일 천의 손과 일천의 눈은 관세음보살이 뭇 중생을 낱낱이 보고 낱낱이 건져 주는 활동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관음의 발생(5 - 6세기 경)을 단순한 조형 예술적(造形藝術的) 동기에서라고 만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당시 인도에서 신앙되고 있던 힌두이즘(Hinduism)의 신들을 관세음화(化)하려는 것에 보다 근본적인 동기가 있었지 않았나 느껴진다. 십일면관음은 인도의 십일황신(十一荒神. E-kadasarudra)에 기원을 두고, 불공견색관음의 아모가(Amogha)는 시바(Siva)신의 별명이요, 견색(pasa)은 두루가(Druga) 여신이 지닌 무기였다. 마두관음은 리그베다(Rg-veda)의 마사(馬詞. Asvamedha)에서 유래한 것 같고, 준제관음의 춘디(Cundi)는 두루가 여신이 나타내는 화신(化身)의 하나와 이름이 같다. [觀世音菩薩의 硏究, 第 12章 七觀音의 分化. pp.105 - 106 참조할 것. 단 그곳에는 靑頸觀音에 대한 해설이 빠져 있다.] 청경관음의 청경(nila-kantha)은 공작(孔雀)새를 가르키지만, 이 또한 사바 신의 한 별명인 것이다.
힌두이즘의 신들을 관세음화(化)한다는 것은 관세음의 활동 영역이 다시 더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활동 무대를 넓힌 관세음은 이제는 다른 종교에도 눈을 돌려 그들까지 건져주려는 큰 자비를 발휘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관세음의 분화(分化)는 힌두이즘에 한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관음신앙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되고, 중국에서 다 시 한국,일본 등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변화관음을 발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양류(楊柳), 용두(龍頭), 백의(白衣), 엽의(葉衣), 어람(魚藍), 수월(水月), 합리 등의 삼십삼 관음[觀世音菩薩의 硏究, 第 13章 三十三體의 應化 참조할 것. 전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楊柳 2.龍頭 3.持經 4.圓光 5.遊戱 6.白衣 7.蓮臥 8.瀧見 9.施藥 10.魚藍 11.德王 12.水月 13.一葉 14.靑頸 15.威德 16.延命 17.衆寶 18.岩戶 19.能靜 20.아뇩 21.阿磨提 22.葉衣 23.유리 24.多羅尊 25.합리 26.六時 27.普悲 28.馬郞婦 29.合掌 30.一如 31.不二 32.持蓮 33.灑水(中國에서 日本에 걸쳐 民間에 행해진 관음신앙을 개관한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형태적 분화(分化) 외에 다시 관세음보살은 밀교경전에서 가장 많은 진언(眞言),다라니(陀羅尼)를 설하고 있는 보살이다. 보현(普賢), 금강수(金剛手), 미륵(彌勒), 문수(文殊) 등도 진언을 설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수량면에서 관세음보살의 진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천전다라니(千轉陀羅尼), 보현다라니(普賢陀羅尼), 소복독해다라니(消伏毒害陀羅尼), 육자신주다라니(六字神呪陀羅尼),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 십일면신주다라니(十一面神呪陀羅尼), 대준제다라니(大准提陀羅尼), 여의륜다라니(如意輪陀羅尼), 불공견색다라니 등.
이 중 불교에서 조석으로 염송하고 있는 것은 천수경의 '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이다. 그러나 한자음이 변하여 원음과 너무 떨어진 감이 있어,다음에 원음과 뜻을 실어 둔다.
범문 천수관음대비심다라니
[梵文千手觀音大悲心陀羅尼(神妙章句)]
namo ratna-trayaya(三寶에 귀의합니다).
nama aryavalokitesvaraya bodhisattvaya mahasattvaya mahakarunikaya(聖觀自在菩薩 마하살 大悲主에게 귀의합니다) omsarva-bhayesu trana-karaya(一切 恐怖에서 守護해 주시는 이에게). tasmai namah-krtva imam aryavalokitesvara-bhasitam nilakantha-namahrdayam avartayisyami(그에게 귀의하여 이 聖觀自在보살이 설하신 靑頸이라는 心呪를 지송하리니) sarvartha-sadhanam subham ajeyam sarva-bhutanam bha vamarga- visuddhakam(일체의 所願을 成就하는 것이며, 勝妙 한 것이며, 일체 衆生의 生死路를 淨化하는 것이옵니다).
tad-yatha(그것은 다음과 같다). om aloke alokamatiloka-tikrante(옴 非世間에, 非世間,出世間의 超越에). hehe hare. maha-bodhisattva(大菩薩). smara smara. hrdaya(心呪). kuru kuru. karma-sadhana-sadhana(業의 成就成就). dhuru dhuru. niyantr mahaniyantr(調御者 大調御者). dhara dhara. dhatr-indresvara(持世 自在主神). cele cele. mala vimalamala(垢 離垢無垢). budhi ehyeye. lokesvara raga-visa-vinasana dvesa-visa-vinasana moha-visa-vinasana(世自在 欲毒消滅 瞋毒消滅 痴毒消滅). horu horu mala horu hare. padma-nabha(蓮華船). sara sara siri siri suru suru. budhya budhya(悟로 悟로). bodhaya bodhaya(覺에로 覺에로) maitreya-nila-kantha(慈氏靑頸菩薩) kama-sudarsana(愛善見)prahlada- manah(觀喜心) svaha. nila-kanthaya(靑頸보살에게) svaha. varaha-mukha- sinha-mukhaya(豚面獅子面보살에게) svaha. padma-hastaya(連華手보살에게) svaha. cakrayudh-aya(輪戰보살에게) svaha. sankhasabda-vibodhaya(螺聲覺보살에게) svaha. maha-lakuta-dharaya(持棒보살에게) svaha. vyaghara- carma-nivasanaya(着虎皮보살에게) svaha. namo ratna-trayaya(三寶에 귀의합니다). nama aryavalokitesvaraya(聖觀自在보살에게 귀의합니다) svaha.
나모 라트나 트라야야. 나마 아랴발로키테스바라야 보디삿트바야 마하삿트바야 마하카루니카야. 옴 사르바 바예수 트라나 카라야. 타스마이 나마 크리트바 이맘 아랴발로키테스 바라 바시탐 닐라칸타나마흐리다얌 아바르타이샤미 사르바아 르타사다남 수밤 아제얌 사르바부타남 바바마르가비수다감. 타드야타. 옴 알로케 알로캄 아틸로카아티크란테. 헤헤 하레 마하보디삿트바. 스마라 스마라 흐리다야. 쿠루 쿠루 카르마사다나사다나. 두루 두루 니얀트리 마하니얀트리. 다라 다라 다트린드래스바라. 찰라 찰라 말라 비말라 아말라. 부디 에혜혜. 로케스바라 라가비사비나사나 드베사비사비나사나 모하비사비나사나. 호루 호루 말라 호루 하레 파드마나바. 사라 사라 시리 시리 수루 수루 부댜 부댜 보다야 보다야 마이트레야닐라칸타 카마수다르사나 프라흘라다마낫 스바하. 닐라칸타야 스바하. 바라하무카싱하무카야 스바하. 파드마하스타야 스바하. 차크라유다야 스바하. 상카사브다비보다야 스바하. 마하라쿠타다라야 스바하. 뱌그라차르마니바사나야 스바하. 나모 라트나 트라야야. 나마 아랴발로키테스바라야 스바하.
이런 밀교의 진언,다라니는 법화경 보문품에서 '관세음을 생각하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라.'는 교설에 근거를 두고 발전한 것임을 전술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다른 종교의 주술(呪術)을 관음신앙 속에 포섭하고자 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변화(變化)관음이 힌두이즘(Hinduism)의 신들을 불교화하려고 했던 것처럼 관음다라니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 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이제 민간의 주술(呪術)신앙에까지 깊이 침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세음보살의 지혜와 자비와 활동을 되돌아볼 때 그를 이제 어지 한낱 보살이라고만 보겠는가? 부처가 아니고는 도저히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관세음보살의 19응신이나 32응신 속에는 '부처의 몸'이 들어 있다. 따라서 관세음은 이미 부처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관세음삼매경(觀世音三昧經)에도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부처님이 아난(阿難)에게 이르시길, "내 이제 진실을 말하노니 거짓이 아니니라. 관세음을 생각컨대, 그는 나보다 앞서 성불하여 이름을 정법명(正法明)여래라 하였느니라."
그런데도 관세음은 여전히 보살로 활동하고 있다. 관음수기경(觀音授記經)에는 그가 아미타불에 이어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까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남자여,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겁(劫)이 되면, 아미타불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리라.... 아미타불의 정법(正法)이 멸한 뒤 한밤을 지나 새벽 빛이 틀 무렵, 관세음보살은 칠보(七寶)로 된 보리수 아래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이름을 보광공덕산왕(普光功德山王)여래라 하리라.
관세음보살은 이미 부처가 되었으면서도 이렇게 보살로 남아 있고 수기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천수경은 다음과 같은 해명을 베풀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위신(威神)의 힘은 이미 과거 무량한 겁에 성불하여 이름을 정법명(正法明)여래라 하였건만, 큰 슬픔과 발원의 힘으로 일체 보살을 일으키고 일체 중생을 안락하게 성숙시키고자 현재 보살로 있는 것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공경하고 공양하고 진심으로 그 이름을 불러라. 무량한 복을 얻고 무량한 죄를 멸하여, 목숨이 다해서는 아미타불의 나라에 가게 되리라[千手陀羅尼經, 大正 20/110/a, "善男子 此觀世音菩薩不可思議威神之力 已於過去無量劫中 已作 佛竟 號正法明如來. 大悲願力 爲欲發起一切菩薩 安樂成熟衆 生故現作菩薩. 汝等大衆....皆應恭敬莫生輕慢. 一切人天堂須 供養專稱名號 得無量福滅無量罪 命終往生阿彌陀佛國."].
관세음보살이 부처의 몸이면서 보살로 있는 것은 중생을 건지려는 큰 슬픔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의 몸으로는 중생의 몸을 건질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교리적으로 볼 때, 보살의 반야바라밀다와 부처의 깨달음 중에서, 중생의 괴로움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것은 전자이다. 후자는 반야를 완성하여 피안에 이른 보살(不退轉 보살)이 다시 추구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의 괴로움을 건지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 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자가 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볼 때, 관세음보살은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큰 반야와 큰 자비의 실천자요, 괴로운 세계(五蘊 : 다섯 근간)의 구세주요, 극락세계의 안내자요, 다른 종교의 너그러운 포용자요, 중생과 괴로움을 함께 하려고 부처의 자리까지 박찬 구원(久遠)의 보살인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때마다 인간들은 하늘이나 신을 우러러 구원을 빌어 왔다. 그런 신앙의 대상을 찾을 경우, 관세음보살보다도 더한 종교적 신격(神格)을 찾을 수 있을까? 불교 경전에 설해진 숱한 불,보살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종교의 천신들 중에서도 그에 견줄 만한 대상은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구제력(救濟力)은 아무 종교에서나 터무니없이 서술하고 주장할 수 있는 종교적 가설(假設)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앞서 간단히 소개했지만 불교는 괴로움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하여 그 근본 원인과 해결의 길을 밝히고 있다. 관세음 신앙은 그런 지(知)적인 보편성을 지닌 반야바라밀다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관세음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면 어떤 괴로움도 벗어나리라."는 법화경 보문품의 설은 믿을 만한 진실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하고 싶다.
3. 생각하고 부르는 마음의 자세
'믿을 만한 진실성'이 있다면 괴로울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즐거울 때도 관세음보살을 지심으로 생각하고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누구나 불행은 언제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덮어놓고 생각하고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는데 어떤 방법이나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인가. 관세음 신앙에는 심오한 반야사상이 깔려있다. 덮어놓고 믿으면 된다는 그런 식의 신앙이 아니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되 그것을 어떤 마음자세로 행해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은 누구나 살기 위해서는 아는 새 모르는 새 욕심을 내고 악을 짓게 마련이다. 악업에서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고, 괴롭기 때문에 다시 악을 짓게 된다. 그리하여 끝없는 죄악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죄악 중생이 어쩌다가 착한 벗으로부터 관세음보살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의 구원을 받고자 한다하자. 그런 사람은 캄캄한 마음의 치암(痴暗) 때문에 관세음보살을 전혀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큰 소리로, 낮은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 그런 부름(念誦)을 한결같이 하는데 염주(念珠)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절대적인 구세주(救世主)로 믿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에서 절대적인 신앙을 강요하고 있듯이. 이때의 관음신앙도 절대성을 띠어야 한다. 밀교에서 여의륜,십일면,불공견색,천수천안.... 등의 절대적인 신격의 변화(變化) 관음을 설하고, 많은 주술적(呪術的) 관음 다라니를 설하고 있음은 이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이 이렇게 절대적인 신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기에, 관세음보살께 공양(供養)하는 것도 필요하다. 보문품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여러나라에 다니며 중생을 건지시나니, 너희는 마땅히 일심으로 그 에게 공양하라." '공양'이라는 말은 값진 것을 바치는 것을 뜻한다. 다른 종교의 '공희(供犧)'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관세음살의 탱화(幀畵)나 조상(彫像)이 있으면 그 앞에 나아가 공양하고 참회,기도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밀교 경전에 많은 관음 의궤(儀軌)가 설해져 있음은 이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자가 이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다할 때 관세음보살은 반드시 그 앞에 몸을 나타내실 것이다. 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의 19응신(應身)이 설해지고 있고, 능엄경은 이것을 32응신으로 부연했음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밀교의 변화관음 또한 동일한 응신에 속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관세음(samanta-mukha, 普門)의 얼굴'은 어찌 경전에 설해진 것에 한정하랴. 우리가 매일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갖가지 인상들도 관세음보살의 얼굴로 보아야 한다.
그럴 때 관세음보살은 부르는 자의 뜻을 살펴 그를 괴로움에서 건져줄 것임은 틀림없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관세음보살은 어느 신격보다도 가장 믿을만한 진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상황이 급박하여 죽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관세음보살은 그를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면 된다.
이런 절대적인 신앙 관계 속에서 기적과 같은 영험이 나타날 수 있다. 못 고칠 병이 낫는다던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던가, 헤어진 사람을 만난다던가,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된다던가..... 불교에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지지만 관세음 신앙에 결부 된 것이 가장 다양하고 풍부하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자와 관세음보살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관계를 감응도교(感應道交)라 부른다. 전자는 '능히 느끼고(能感)', 후자는 '능히 응하는데(能應)', 그들이 서로 사귀기(道交) 때문이다[知禮述, 관무량수불경소묘종초 권 4, 大正 37/220/a]. 이런 감응도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중생이 먼저 관세음보살을 믿고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 능감(能感)이 없는 곳에 능응(能應)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이 먼저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타자(絶對他者)적인 관세음보살의 구제력에 의지하는 믿음만으로 시종일관해도 좋을까? 다른 종교라면 몰라도 불교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거든, 그러한 신앙과 함께 다시 선업(善業)을 힘써 닦지 않으면 안된다. 괴로움을 초래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신도 아니요, 운명도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지은 악업이라고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모든 불,보살은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을 믿고 따른다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미타불의 발원(發願)과 그 성취를 절대적인 신앙의 근거로 삼는 정토신앙에서도 믿음과 함께 선업에 힘쓰고, 아함경이나 대승경전의 교리를 공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뜻을 무량수경의 3배(三輩)설과 관무량수경의 9품(九品)설에서 엿볼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무량수경은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사람을 상,중,하 세 무리(三輩)로 가르고, 관무량수경은 그것을 다시 세분하여 아홉 품(九品)으로 가르고 있는데, 평소에 선업(功德)과 대,소승의 수행을 닦지 않다가, 임종에 이르러서야 아미타불을 찾는 사람은 극락세계에 가기는 가되, 최하위(무량수경의 下輩, 관무량수경의 下品下生)로 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뒤 무량수경은 다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실감나게 서술하고, 선업을 닦을 것을 누누히 권하고 있다. 그 일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이런 속에서도 덕(德)을 심고, 은혜를 베풀며, 법을 어기지 말라. 괴로움을 참고 노력하며, 일심으로 지혜를 닦아 교화에 힘쓰되, 선업을 선양하고 마음을 바로하라..... 이곳의 하루밤 계행은 극락세계의 백년에 맞먹고..., 이곳의 열흘밤 선업은 다른 부처 땅의 천년에 맞먹을 것이다... 내 너희 천신과 인간의 무리를 불쌍히 여겨 간절히 일러 선업을 닦게 하느니라.
선업을 행하기 어려운 악조건에서 선업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공덕이 되리라는 것이다. 관음 신앙은 이와 같이 선업과 불교 공부에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질병이나 재앙의 퇴치를 목적으로 행하는 관음다라니의 염송(念誦)에서도 비슷한 뜻을 살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못 고칠 병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이 아예 의약을 무시하고 종교적 힘에만 의지하려 하 거나, 또는 그 반대의 길을 취하려는 것을 본다. 이런 치우친 방향 또한 건전한 신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병의 효과적인 치료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환자의 강렬한 삶의 의욕과 희망(신앙)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 다시 적절한 의약의 투여가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천수관음의 치병합 약경(治病合藥經)이나 대비심다라니경(大悲心陀羅尼經)에는 관음 염송과 더불어 의약을 함께 사용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관음 신앙의 건전한 방향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앙이 기적이나 영험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영험을 얻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신앙과 회의(懷疑) 사이를 헤매고 있다. 불교의 업설(業說)은 신앙의 그런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괴로움의 인과(因果)를 뚜렷이 밝힌 합리적인 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업설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선업을 지어도 인간존재의 덧없음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성에서 다시 설해진 것이 아함경의 아집(我執)부정의 교설(四聖諦說)이요, 그런 아집 부정의 교설이 한층 더 철저해진 것이 대승불교의 반야(般若)교설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펴본 바와 같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그러한 대승의 반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보살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자는 다시 한걸음 더 들어가 아집과 분별망집(分別妄執)을 부정하는 철저한 수행(修行)에 힘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사리불에게 심오한 반야교설을 베풀고, 관무량수경에서 대승행자(大乘行者)는 극락왕생의 최상위(上品上生)에 배속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관세음보살을 따르는 자가 어찌 단순한 신앙이나 선업에 머물러야 되겠는가.
관세음보살을 따르는 자가 이렇게 아집과 분별망집을 부정하는 철저한 수행에 힘쓸 때, 관세음보살은 그에게 이제 어떤 모습으로서 행자의 마음 밖에서 비추일까? 그럴 까닭이 없다. 분별망집이 공한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나와 남, 안과 밖, 부처와 중생.... 등, 일체의 차별이 없다. 내 마음이 곧 관세음이고, 관세음이 곧 내 마음이다. 따라서 밖에서 비치던 관세음보살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해입상응(解入相應)이라 한다. 밖에서 들어온 관세음보살(入)과 중생 본래의 마음(解)이 서로 하나가 된다(相應)는 뜻이다.
자기 마음 안에서 진정한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이런한 대승 공관(空觀)의 실천은 관세음보살의 '대비심다라니'를 외울 때도 마찬가지다. 천수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큰 자비의 마음은 평등한 마음이요, 함이 없는(無爲) 마음이요, 흐린 집착(染着)이 없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 곧 대비심 다라니의 모양(相貌)이니, 너희는 마땅히 이것에 의지해 수행하라.... 이 다라니를 외는 자는 마땅히 큰 깨달음의 마음을 내어(發廣大菩提心) 일체중생을 건지고자 서 원하고, 몸에는 계율을 지니고,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마음을 내라.... 내 그런 사람을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보살펴 지켜 주리라[千手陀羅尼經, 大正 20/108/a, "觀世音菩薩言 大慈悲心是平等心 是無爲心 是無染着心 是空觀心 是恭敬心 是卑下心 是無雜亂心 是無見取心 是無上菩薩心. 是當知 如是等心 卽是陀羅尼相貌. 汝當依此而修行之.... 觀世音言 若善男子 善女人 誦持此神呪者 發廣大菩提心 誓度一切衆生身 持齋戒. 於諸衆生起平等心 常誦此呪 莫令斷絶..... 我時當 以千眼照見千手護持."].
대비심다라니의 염송과 함께,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대승공관(空觀)의 실천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주술적인 힘만을 기대해서야 되겠는가.
반야의 완성으로 괴로움의 물리적(物理的)인 해결은 가능해 진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은 편안할 수가 없다. 뒤에 많은 동료 중생이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보살은 다시 동료 중생들의 괴로움을 크게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피안에서 차안에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깨달음이 완벽해진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자는 마침내는 바로 그 '관세음'보살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의 관세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부름에 능히 응하는 응신(應身)으로서의 관세음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화경 보문품의 19응신은 중생의 견지에서 볼 때는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응현(應現)하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애초에 '보살을 가르치기 위한 법(無量義敎菩 薩法佛所護念)'이다. 따라서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보문품의 19응신은 보살들에게 그런 응신을 나타내 중생을 건지라는 간곡한 교시(敎示)로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관세음을 생각하고 부르라'는 말에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은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다. 절대적인 믿음에서 적극적인 선업에로, 거기서 다시 아집의 철저한 부정을 뜻하는 대승 공관(空觀)의 실천에로, 그리하여 또다시 큰 자비의 구제활동에로 심화될 것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생각한다(念)'는 말은 다른 종교의 '믿는다(信)'는 말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믿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절대적인 타자로서의 관세음보살을 우러러 공양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感應道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자기 마음 안에서 발견해야 하고(解入相應), 마침내는 자기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應化). 다른 종교의 '믿음'과는 엄청나게 다른 종교적 깊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을 '믿어라'하는 것보다는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술어가 이상과 같은 뜻을 가졌기에 불교 교리에는 그말이 수없이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 들어온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1.부처 2.법 3.승가 4.보시 5.계 6.하늘의 여섯을 생각해야 하고(六念), 1.몸 2.느낌 3.마음 4.법의 네 곳을 생각해야 한다(四念處).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의 법수(法數)에도 '생각'이 항상 끼어 있다. 대승불교의 관음신앙, 정토신앙, 밀교신앙에도 '생각'이 핵심적인 개념이 되고 있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타력(他力) 정토 신앙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치고 있지만, 그곳에서도 다음과 같은 설이 보이는 것이다.
모든 부처는 법계(法界)의 몸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 생각(心想) 속에 들어간다. 따라서 너희가 마음에 부처를 생각 할 때 그 마음이 곧 부처의 형상(三十二相)이다. 그 마음이 부처를 만들고(是心作佛), 그 마음이 곧 부처이다(是心是佛). 모든 부처의 깨달음의 바다 또한 마음의 생각 속에서 일 어난다. 그러니 마땅히 한 마음에 생각(念)을 묶어 그 부처를 밝게 볼 것이니라[觀無量壽經, 大正 12/343/a, "諸佛如來 是法界身 遍入一切衆生心想中. 是故汝等心想佛時 是心卽是 三十二想八十隨形好. 是心作佛 是心是佛. 諸佛正遍知海從 心想生. 是故應當一心繫念諦觀彼佛."].
그렇게 하여 부처를 보게 되면 시방(십방)의 모든 부처를 보게 되나니, “모든 부처를 보게 되기에 그것을 염불삼매(염불삼매)라 한다[觀無量壽經, 大正 12/343/b, ".....但當億想令心明見. 見此事者 卽見十方一切諸佛. 以見諸佛故名念佛三昧."].” '생각'이란 말이 어떤 깊이를 갖고 있는가를 뚜렷이 해주고 있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부르라'는 말이 이런 종교적 깊이를 가진 것으로 경전에 사용되고 있다면, 그 뜻에 따르는 자세로 불,보살이나 다라니를 염송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불교학에는 관음신앙이나 정토신앙 또는 진언 염송의 '생각'을 단순히 '입으로 부르는 것(口稱)'에 한정시키려 한 사상이 있었고, 그런 사상이 오늘까지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염불(念佛), 칭명(稱名), 송주(誦呪), 창제(唱題) 등의 어느 하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밖의 모든 불교를 배격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한 사람들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오도(誤導)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관세음보살의 구제를 받더라도 확실하게 받게 할 것이지, 왜 그림자 같은 응신(應身)의 .험(靈驗)이나 기대하게 하는가. 극락세계에 가더라도 상품(上品)이나 중품(中品)으로 가게 할 것이지, 왜 하품 중에서도 최하등(下品下生)으로 가게 하는가. 다라니를 외더라도 지혜를 얻게 할 것이지, 왜 저속한 주술에나 빠지게 하는가. 그들은 불교의 심오한 교설을 좁은 소견으로 은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저속한 타력(他力) 신앙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은 하루 속히 청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생각(念, smrti)이라는 말 속에 부처님이 정성드려 시설(施說)해 놓으신 미묘한 신앙의 구조와 깊이를 온전히 살려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은폐하거나 손상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확고한 믿음의 힘을 주어 절망적인 괴로움을 헤쳐 나가는 밝은 희망의 빛이되게 할 것이다.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라. 그러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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