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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중관

작성자법흥|작성시간16.04.03|조회수14 목록 댓글 0

반야중관(般若中觀)



<반야경>에서는 "모든 보살마하살은 무주(無住)를 방편(方便)으로 삼아 반야바라밀다에 안주(安住)해야 한다."라고 하여, <반야경>의 가르침이 곧 '무주'를 방편으로 한 가르침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반야경>이야말로 '무주'를 가장 강조하고 있고, '무주'는 <반야경>에서 그 참된 의미가 밝혀진다.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이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이하 <대반야경>이라 약칭)을 보면, '무주(無住)', '불주(不住)' 혹은 '무소주(無所住)'라는 구절이 나타나는 문맥의 형태가 몇 가지로 정해져서 수백 번 반복하여 나타나는데, 이 <반야경>의 무주를 논리적으로 간략히 정리하여 그 요점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곧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이다. 여기서는 <반야경>과 <중론>을 비교하면서 <반야경>과 <중론>의 무주를 함께 살펴보겠다.



①반야바라밀다의 해명

"선현아, 이와 같이 대승은 전혀 머묾이 없다. 까닭이 무엇인가? 일체법은 모두 머묾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머물 곳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선현아, 그리하여 이 대승은 머물러도 머묾이 없다. 선현아, 진여자성은 머무는 것도 아니고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닌 것처럼, 대승 역시 그러하여 머무는 것도 아니고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진여자성에는 머묾도 없고 머물지 않음도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선현아 진여자성이라고 하지만 진여자성은 공(空)이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도 역시 이와 같다. 비록 반야바리밀다에는 머물지만 여래와 마찬가지로 일체법에는 전혀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지도 않다. 까닭이 무엇인가? 사리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비록 반야바라밀다에는 머물지만 색에는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지도 않으며 내지 모든 상(相)과 지(智)에도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지도 않다. 무슨 까닭인가? 사라자여 색(色)등의 모든 법에는 2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사리자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에서 이렇게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지도 않는 모습을 따르니 머묾 없음으로써 방편을 삼아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일체법에는 단지 명상(名相)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명상은 다만 가짜로 시설된 것이고 명상의 본성은 공(空)이다. …모든 명상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머묾도 없고 달라짐도 없지만 시설(施設)할 수는 있다."



이름[名]이든 모습[相]이든 본성(本性)이든 지혜(智慧)든 일체의 만법(萬法)은 모두 머묾도 없고 머묾 아님도 없다(머무는 것도 아니고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일체법은 모두 이름과 모습으로서 가짜로 시설된 것으로서,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공(空)이기 때문이고, 분별되는 두 모습[二相]이 없기 때문이다.



대승(大乘)의 수행자는 이와 같이 머묾 없음에 머무는데,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에 머무는 것이고,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는 것이고, 생사에서 빠져나와 해탈하는 것이고, 의지할 것 없는 대열반에 드는 것이다.



이것은 시설)된 만법은 연기된 모습으로서 가명(假名)이요 가상(假相)이고 공(空)이므로, 분별을 따라 망상에 머물지 말고 중도(中道)에 머물라고 하는 <중론>의 가르침과 동일한 내용이다. 다만 여기서는 중도라는 말 대신에 반야바라밀다라든가 대승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반야바라밀다에 머문다[住般若波羅蜜多].'혹은 '머물러도 머묾이 없다[住無所住].'고 하는 것이 곧 중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은 '머묾도 없고 머물지 않음도 없다[無住無不住].' 혹은 '머묾도 아니고 머물지 않음도 아니다[非住非不住].'라고 표현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은 곧 '머묾'과 '머물지 않음'이라는 분별된 2상(相)에 머물지 말고, 분별된 2상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



<중론>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희론(戱論)을 적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법의 진여자성은 있는 것이 없는[無所有] 공(空)이고 2상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만법은 다만 이름과 모습으로 시설된 (=분별된, 연기된) 가짜이어서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머묾 없음에 머무는' 반야바라밀다의 논리적 형식은 '머묾도 없고 머물지 않음도 없다[無住無不住].' 혹은 '머묾도 아니고 머물지 않음도 아니다[非住非不住].'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논리는 한 개념과 그 모순개념을 동시에 부정해 버림으로써 모든 분별사유의 길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앞서는 석가모니에 의하여 무기설(無記說)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분별사유를 해체시키고 있지만, 더욱 적극적으로는 뒷날 나가르주나가 <중론>에서 이 논리적 형식을 활용하여 모든 사유를 해체시킴으로서 만법의 공성(空性)을 깨닫도록 가르치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곧 만법이 연기된 존재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만법은 다만 이름과 모습일 뿐인데, 이름과 모습은 상대적인 분별을 통해서만 제각각의 이름과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모든 이름과 모습은 분별되는 2상의 상호 의존관계 속에서만 드러나는데, 2상이 상호 의존하여 드러나는 것이 곧 우리의 분별사유이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습으로 드러나는 만법은 제각각의 독자적 자성(自性)은 공(空)으로서 있는 것이 없고, 다만 우리의 분별사유 속에서만 그러한 이름과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통 상의상대(相依相待)의 연기라고 부른다. 만법은 연기된 존재일 뿐이고, 그 자성은 공이다. 그러므로 분별 쪽으로 나아가면 만법이 연기되어 시설되고, 연기되어 시설된 만법은 자성이 공이어서 허망한 가짜인 이름과 모습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분별망상에서 해탈하여 머묾 없음에 한결같이 머무는 것이고 반야바라밀다에 머무는 것이고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의 실천은 곧 머묾 없음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경>에서 '무주(無住)', '비주(非住)' 혹은 '무소주(無所住)'라는 표현은, 한편으로는 '머묾도 없고 머물지 않음도 없다[無住無不住].' 혹은 '머묾도 아니고 머물지 않음도 아니다[非住非不住].'라는 연기를 나타내는 논리적 표현 속에서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머묾 없음에 머무는 것[住無所住]이 곧 반야바라밀다에 머무는 것[住般若波羅蜜多]이라고 하여, 연기를 깨달아 해탈한 중도인 반야바라밀다를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이것은 앞서 <아함경>에 나타난 '무주(無住)'가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연기의 논리적 표현으로서의 '무주무부주(無住無不住)'를 주로 이용하고 있지만, 이렇게 연기법을 밝히는 목적은 세속제와 승의제의 중도가 법의 본성이기 때문에 결국 머묾 없음에 머문다는 '주무소주(住無所住)'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반야바라밀다에 머무는 것은 곧 머묾 없음에 머무는 (머물러도 머묾이 없는) 중도이다. 이처럼 <반야경>에서의 반야바라밀다는 <중론>에서는 중도로 표현되고 있다.



②반야바라밀다의 다양한 표현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첫머리 귀경게(歸敬偈)에서 이른바 8불중도(不中道)를 노래하여, 이러한 좋은 연기법을 말씀하셔서 모든 희론을 소멸시키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절한다고 한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27장에 걸쳐 불교의 교리에 나타나는 다양한 경우의 이름들을 연기법을 통하여 해체하여 그 공성(空性)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해체, 거래(去來)의 해체, 주부주(住不住)의 해체, 유무(有無)의 해체, 성괴(成壞)의 해체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반야경>에서도 이러한 개념들을 해체하여 그 본성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연기를 설하여 분별을 해체하는 이러한 문맥 속에 '무주', '비주', '부주' 등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만, 결국 그 가르치는 바는 중도의 공성을 드러내려는 것이며, 곧 반야바라밀다를 표현하는 것이다.



몇몇 사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무위(無爲)란 무생(無生), 무주(無住), 무이(無異),무멸(無滅)을 일컫는다. 이러한 무위는 무위가 공(空)이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들이 가진 큰 마음은 무거(無去), 무래(無來), 무생(無生), 무멸(無滅), 무주(無住), 무이(無異),무대(無大), 무소(無小)이다. 무슨 까닭인가? 마음의 자성(自性)에는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거(非去),비래(非來), 비생(非生), 비멸(非滅), 비주(非住), 비이(非異), 비대(非大), 비소(非小)이다."



"이와 같은 아견(我見)은 부재내(不在內), 부재외(不在外), 부재양간(不在兩間), 도무소주(都無所住)이다."



"깊은 반야바라밀다는 2상(相)을 멀리 여의고 머묾 없음에 머문다[住無所住]. …깊은 반야바리밀다도 부주유법(不住有法), 부주무법(不住無法)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머묾은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③반야바라밀다의 실천

"또 다시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머묾 없음으로 방편을 삼기 때문에 어떤 법도 얻을 것 없는 가운데 머문다."



<대반야경>의 이 구절은, <반야경>이 '무주(無住)'를 방편으로 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며,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어떤 법도 얻을 것 없는 가운데 머문다[住一切法無所 得中]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이 구절은 같은 <반야경> 계통인 <반야심경(般若心經)>과 <금강경(金剛經)>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에 의존하여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른다고 하였고, <금강경>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내면,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보살은 법에 머묾 없이 보시해야 한다."라거나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 역시 '무주'를 방편으로 하여 제법(諸法)의 공성(空性)인 반야바라밀다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반야심경>에서는



"사리자여, 이 모든 존재는 공(空)인 모습이므로,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그러므로 공(空) 속에는 색도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의식도 없으며,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존재도 없으며, 안계에서 의식계까지도 없으며,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어 죽음도 없고 늙어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



라고 하여, 모든 분별개념을 해체하는 희론적멸(戱論寂滅)을 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대반야경>에서 대승(大乘)과 반야바라밀다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며,<중론>에서 8불중도의 연기법을 통하여 가르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인 것이다.



한편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무릇 상(相)으로 있는 것들은 모두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는 구절이나, "법상(法相)도 없고 법상 아님도 없다."라는 구절이나, "여래가 말하는 법은 모두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라는 구절이나, "이 실상(實相)이란 것은 실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이름이 실상이다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구절들이 모두 분별심 속에서 연기하여 발생하는 허망한 명상(名相)의 자성은 공(空)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반야경>이나 <중론>과 마찬가지로 <반야심경>과 <금강경>도 '무주'를 방편으로 하여 제법의 공성을 깨닫는 반야바라밀다의 실행을 가르치고 있다.다만, 방편으로서의'무주'를 강조하거나, 마땅히 머묾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거나,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야 한다고 할 경우에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④무소주삼마지(無所住三摩地)

<대반야경>에는 '무소주삼마지(無所住三摩地)'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 삼매에서는 어떤 법에도 머물 곳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바로 머묾 없음에 머문다는 반야바라밀다를 말하는 것이다. 즉, 반야바라밀다를 달리 무소주삼마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반야경>을 나가르주나가 주석하여 쓴 논서라고 하는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무소주삼마지'란 말 대신에'무주삼매(無住三昧)', '무주처삼매(無住處三昧)'라고 부르고 있다. 이 '무주처삼매'는 뒷날 유식학의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으로 연결된다.



<무주(無住)/ 김태완 무심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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