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을 꼽으라면 세종이나 정조보다 먼저 송시열의 이름이 나와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왕이 아니었다. 군대를 지휘한 장수도 아니었다. 법을 만든 재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200년 정치의 방향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 영향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조선이 현실을 외면하고 명분에 집착하며, 정치가 국가 운영이 아니라 정통성 경쟁으로 변해가는 과정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 송시열은 흔히 조선 최고의 유학자, 노론의 영수, 대의명분을 지킨 충신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역사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는 조선을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정치가였고, 사상과 명분을 무기로 정치를 장악한 인물이었다. 필자가 그를 "정치가 송시열"로 규정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그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정치 권력을 조직하고 유지한 사람이었다.
송시열을 이해하려면 병자호란부터 봐야 한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참패였다. 국력은 청나라에 미치지 못했고 명나라는 이미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많은 국가들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달랐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사실상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이 되었지만 그의 머릿속 세계는 여전히 명나라 중심 질서에 머물러 있었다.
문제는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국가 운영이었다. 정치가는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송시열은 현실보다 명분을 우선했다. 국력보다 의리를, 생존보다 체면을 앞세웠다. 그것은 학자의 자세일 수는 있어도 국가 지도자의 자세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벌론이다.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은 북벌이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경제력도 군사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송시열은 북벌을 정치의 중심 구호로 만들었다. 흔히 북벌이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고 말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국가는 상징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백성은 상징으로 먹고살지 않는다.
조선은 북벌을 외치는 동안 군사혁신에도 실패했고, 상공업 육성에도 뒤처졌으며, 국제질서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능력도 키우지 못했다.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명분 경쟁에 매달리는 사이 국가는 점점 더 정체되었다. 북벌은 실현되지 못한 계획이 아니라 애초에 실현될 수 없는 구호였다.
예송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교과서에서는 상복 기간을 둘러싼 논쟁 정도로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수십 년 동안 국가 역량을 소모한 정치투쟁이었다.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고 경제를 회복해야 할 시기에 조선의 최고 엘리트들은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는지 3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싸웠다.
물론 그 이면에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조선 정치가 더욱 생산적이 되었는가. 백성의 삶이 나아졌는가. 국방력이 강화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예송은 국가 운영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정통성을 독점하기 위한 경쟁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송시열이 단순히 한 사람의 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거대한 정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전국의 사림을 연결했고, 자신의 학맥을 중심으로 인재를 육성했다. 언뜻 보면 훌륭한 교육 활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보면 특정 사상이 국가 운영을 독점하는 체제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노론은 단순한 정파가 아니었다. 하나의 정치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집단이었다. 자신들이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사고방식이 점차 강해졌다. 정치는 타협과 조정의 기술인데, 노론 정치에서는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정통과 비정통으로 구분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송시열은 그 문화의 출발점에 있었다.
윤증과의 갈등도 이를 보여준다. 후대에는 회니시비라는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본질은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가 나타나면 그것은 학문적 토론이 아니라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고, 조선 정치는 더욱 치열한 정파 경쟁 속으로 빠져들었다.
숙종과의 충돌은 송시열 정치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송시열은 왕보다 명분을 더 중시했다. 물론 원칙을 지키는 자세 자체는 존중할 만하다. 그러나 국가는 원칙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대응도 필요하다. 숙종은 현실 정치의 필요에 따라 움직였고, 송시열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은 사약을 받았다. 흔히 이를 충신의 비극으로 묘사하지만, 다른 시각도 가능하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수정하지 못했고, 변화하는 정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은 강인함일 수도 있지만 경직성일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의 죽음 이후였다. 살아 있는 송시열보다 죽은 송시열이 더 큰 힘을 갖게 되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정치적 성인으로 만들었다. 그의 말은 비판할 수 없는 권위가 되었고, 그의 학설은 정통성의 기준이 되었다. 정치가 살아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작업이라면 이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었다.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사상이 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상이 권위로 굳어지고 권위가 정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생각은 설 자리를 잃는다. 조선 후기 노론 일당 지배 체제가 형성된 배경에는 바로 이 문제가 있었다.
송시열을 조선을 구한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학자였고 강한 책임감을 가진 정치가였다. 그러나 역사적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는 현실보다 명분을 우선하는 정치문화를 강화했고, 정통성 경쟁을 국가 운영보다 중요한 문제로 만들었으며, 학문적 권위를 정치 권력으로 연결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조선 후기의 당쟁은 송시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조선의 몰락 역시 한 사람의 책임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이 점점 더 현실 문제보다 명분 논쟁에 몰두하고, 국가 경쟁력보다 정치적 정통성에 집착하게 되는 과정에서 송시열이 차지한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래서 송시열은 조선을 구한 충신이라기보다 조선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든 정치가로 읽을 수도 있다. 그는 조선을 사랑했다. 그 점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나라를 올바르게 이끄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종종 선의의 실패로 움직인다. 송시열은 아마도 조선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키려 했던 조선은 이미 사라져 가는 세계였고, 그가 끝까지 붙들었던 명분은 조선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것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송시열은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가인 동시에, 조선을 쇠퇴의 길로 밀어 넣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ㅅㅗ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