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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 OFM 말씀나눔

2026년 6월 22일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자비로 정화된 눈으로 바라보기>

작성자Agatha|작성시간26.06.23|조회수30 목록 댓글 0

 2026년 6월 22일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열왕 17,5-8.13-15ㄱ.18; 마태 7,1-5

 

제1독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17,5-8.13-15ㄱ.18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는 5 온 나라를 치러 올라왔다.
그는 사마리아까지 쳐 올라와 그곳을 세 해 동안 포위하였다.
6 마침내 호세아 제구년에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
7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8 또한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풍속과
이스라엘 임금들이 만들어 낸 것에 따라 걸어갔기 때문이다.
13 주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와 선견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셨다.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보낸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
14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15 그들은 그분의 규정과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자기들에게 주신 경고를 업신여겼다.
18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노하시어 그들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씨앗 Semina Verbi: 연중 12주 월요일

자비로 정화된 눈으로 바라보기

 

제1독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유배를 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일어났다”(2열왕 17,7). 본문은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계약을 “업신여겼다”고 반복해서 전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거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순한 정치적 실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잊고 주변 민족들의 기준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역시 비슷합니다. 성공과 외적인 모습, 소비를 절대화하는 문화는 결국 이웃과 진리,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마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될 때, 사회 전체도 인간의 존엄을 지킬 힘을 잃게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마태 7,1)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다”(κρίνω)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올바른 식별 자체를 의미하기보다,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고 타인을 단죄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눈멂을 꾸짖으십니다. 곧 형제의 “티”는 보면서 자기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또 너무 잔인하게 서로를 판단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특히 사회관계망은 자주 끊임없는 재판정처럼 변하여, 사람들을 자비 없이 규정하고 단죄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이의 신앙을 평가하기 전에 자신의 회개를 먼저 돌아보지 않는 유혹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무관심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가난함을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형제를 도울 수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 복음 말씀을 철저히 살아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죄를 먼저 보지 않았고, 각 사람 안에서 조용히 일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나병 환자를 끌어안았을 때, 그는 단지 병이나 사회적 부정을 본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영적인 교만이야말로 타인의 눈에 보이는 잘못보다 훨씬 더 위험한 “들보”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작은 이들의 삶’, 곧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하고 우월감을 버리는 삶을 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데 익숙한 오늘의 세상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참된 개혁이 먼저 화해된 자기 마음 안에서 시작됨을 일깨워 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의 몰락과 복음에서 예수님의 경고는 결국 같은 뿌리를 지닙니다. 그것은 굳어진 마음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되면, 결국 다른 사람을 냉혹하게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무상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잊은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완전함만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가정이 상처 주는 말과 쌓여온 교만, 진실한 경청의 부족 때문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회 안에서도 대화의 능력은 점점 사라지고, 각 집단은 자기 확신 속에 갇혀 서로를 적처럼 바라봅니다. 복음은 자비로 정화된 시선을 회복하라고 초대합니다. 형제를 고치려 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의 눈먼 부분을 치유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 구체적인 태도를 요청합니다. 첫째, 날마다 침묵 안에서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참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 안의 “들보”, 곧 교만과 냉혹함, 무관심과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정직하게 성찰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을 연민과 인내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는 악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동행하시는 방식으로 형제를 동행하라는 초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를 장애물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선을 배운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판단과 단죄의 장소가 아니라 화해와 겸손, 그리고 평화의 공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기경호프란치스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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