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정은 영웅을 낳는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 △ 홍경래는 당시 차별받던 서북 출신으로 입신양명을 꿈꿨으나 좌절되자 칼을 들었다. 홍경래군과 관군의 전투를 그린 <순무영진도>. (사진/ 권태균) |
조선 말기 관변 쪽은 평안도의 홍경래(洪景來)를 서적(西賊), 또는 경적(景賊)이라고 불렀다. 서적(西賊)은 그가 봉기한 관서지역의 역적이란 뜻이고 경적(景賊)은 그의 이름 가운데 자를 딴 것이다.
순조 11년(1811) 발생한 평안도 민중항쟁에 대해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한 <조선통사>(1977년판)는 ‘평안도 농민전쟁’이라고 계급 간의 전쟁으로 표현했다. 남한에서는 ‘홍경래의 난’으로 주로 칭해왔으나 <한국사>(1997) 36권에서는 ‘서북지방의 민중항쟁’이란 중간 제목 아래 ‘홍경래 난’이라고 절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유명한 사건에 대한 사료는 의외로 소략하다. <순조실록> <일성록>과 관군 쪽 박기풍(朴基豊)이 쓴 <진중일기> 등 진압군 쪽의 사료가 대부분이다. 반대쪽 시각은 주로 소설 속에 구현돼왔다. 철종 12년경(1861)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역사소설 <신미록>(辛未錄)은 관군 쪽의 시각으로 서술되었지만
<홍경래 실기>(洪景來實記)나 한문소설인 <홍경래전>(洪景來傳) 등은 민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다. 양쪽 사료를 참고해 일생을 추적하면 홍경래는 정조 4년(1780) 평안북도 용강군 다미면(多美面)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중화(中和)에 있는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가서 공부하는데, 한문소설 <홍경래전>은 이 무렵에 관한 소식을 전한다.
“<사략>(史略)을 읽다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장사가 죽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고 죽으면 큰 이름을 남긴다’ 같은 대목에서는 반드시 두 번 세 번 읽고 감탄하며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놈’이라 불린 서북인들
같은 책에는 그가 12살 때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자객 형가(荊軻)를 애도하는 ‘송형가’(松荊歌)라는 글제를 받고는, “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秋風易水壯士卷/白日咸陽天子頭)라고 지었다고 전한다. 유학권이 “가을 바람은 역수 장사(형가)의 주먹이요, 빛나는 태양은 함양에 있는 천자의 머리이다”라고 해석하자, 홍경래는 “가을 바람 부는데 역수 장사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 천자의 머리를 친다”라고 바꾸어 해석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유학권은 그 다음날로 홍경래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홍경래는 혼자 경사(經史)를 통독하며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달이 뭇 별을 거느리고 하늘에 진을 치니, 바람은 나뭇잎을 몰고 가을 산에서 싸우도다”(月將衆星屯碧落/風驅木落戰秋山)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홍경래는 체제 내의 입신을 꿈꾸었다. 평양 향시를 통과한 그가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대과는 홍경래 같은 지방 출신이 통과할 수 있는 등용문이 아니었다. <홍경래전>은 세도가 자제들은 과거시험장에 가지 않아도 급제하지만, 시골 선비는 한갓 노자와 다리 힘만 헛되이할 뿐이라며, 이들이 낸 답안지는 근시배(近侍輩)들의 휴지로 사용될 뿐이란 현실을 전하고 있다. 과거는 경화세족(京華勢族)으로 불렸던 세도가 자제들의 관직 진출을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서북 출신이었던 홍경래의 경우는 여기에 한 술 더 떴다.
“이 중에서도 평안도 사람들은 더욱 당세에 쓰이지 못했다. 조선 초에는 고려 유민(遺民)이라 하여 위험하게 여겨 쓰지 않았고, 나중에는 천하게 여겨 쓰지 않았다. 서울의 하인배나 충청도의 졸개들까지도 서북인을 ‘사람’(人)이라 부르지 않고, ‘놈’(漢)이라 불렀다.
서북지방의 감사, 수령들이 백성의 재물을 다반사로 토색한 것도 서북민을 내심으로 천시한 까닭이다.”(<홍경래전>)
<홍경래전>은 사마시에 낙방한 홍경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당일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改造犯上之心)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홍경래란 혁명가의 탄생이었다.
동지 탐색에 나선 홍경래는 가산(嘉山)의 청룡사에서 태천(泰川)의 명가 출신 서얼 우군칙(禹君則)을 만났다. 동지가 된 둘은 가산의 역속(驛屬)으로 있는 부호 이희저(李禧著)를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우군칙의 아내를 점쟁이로 변장시켜 이희저에게 보내 “10년 이내 대운을 만날 것인데, 반드시 수성(水姓)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게 했다.
1년 뒤에는 우군칙이 이희저의 부친 묏자리를 봐주면서, “당대(當代) 발복(發福)하겠지만 수성 가진 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희저 앞에 ‘물 수’(水=?)변을 가진 홍(洪)씨가 나타나자 이희저는 귀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곽산의 김창시(金昌始)도 비슷한 방법으로 포섭했다. 이 밖에도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김사용(金士用) 등의 장사를 포섭했다. <홍경래전>은 홍경래가 순조 11년 모친과 형을 모시고 가산의 다복동으로 들어갔다고 전하는데, 바로 혁명의 전초기지였다.
“다복동은 가산과 박천 사이에 낀 버드나무 잎과 같은 형국의 땅으로, 좌우가 유달리 험준하지는 않지만 울창한 산비탈로 은폐된 아늑한 골짝이었다. 뒤쪽으로는 경의(京義) 간의 대로와 통하고, 앞에는 대령강(大寧江)이 흐르고 있었다. 골짝의 안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약 20리 길이였고, 안과 바깥 골짝은 수륙 통행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적당히 깊고 옅어 숨거나 나타나는 데 모두 편했다.”(<홍경래전>)
추호도 백성을 범하는 일 없다
홍경래는 금광을 한다는 명분으로 장정들을 끌어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장정들에게 땅을 파게 해서 기운을 평가하고, 새끼줄을 쳐놓고 높이 뛰게 해 날램을 평가했다. 사격·기마·검술을 가르쳐 병졸의 등급을 정하고, 후한 상급을 베풀어 환심을 샀다. 홍경래는 순조 12년(1812) 임신(壬申)년을 거병의 해로 잡았다. 홍경래는 김창시를 시켜서 “일사횡관(一士橫冠)에 귀신(鬼神)이 탈의(脫衣)하고 십필(十疋)에 가일척(加一尺)하고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이라”는 참요(讖謠)를 널리 퍼뜨리게 했다. 일사횡관은 임(壬)자의, 십필가일척은 신(申)자의 파자(破字)로서 임신년에 기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의 파자가 퍼지는 가운데 다복동에 1천여 명이 몰려들자 거사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홍경래는 거사 계획을 앞당겨 순조 11년 12월15일 평양의 대동관을 불태우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2월15일 야반에 많은 장졸을 평양에 보내 내응토록 하고, 대동관(大同館)에 불을 질러 관민이 불을 끄는 틈을 타서 각 관서에 불을 지르고, 관장을 겁박하여 죽이고 평양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동관 밑에 매설했던 화약통과 도화선이 눈에 젖어서 약정한 시간에 폭발하지 않고 16일 오후에야 폭발하였다. 계획이 빗나가 성사치 못하고, 도리어 군교들의 수색이 삼엄해지자 파견했던 장사들이 위험을 느껴 각자 다복동으로 도주했다.”(<홍경래전>)
![]() △ 홍경래군이 마지막까지 관군과 대치했던 정주성.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져서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사진/ 권태균) |
수색이 심해져 일부 동지들이 체포되자 홍경래는 순조 11년 12월18일에 다시 거병했다. 홍경래는 평서(平西)대원수, 총참모는 우군칙, 참모 김창시, 선봉장 홍총각·이제초, 후(後)장군 유후험, 도총 이희저, 부원수 김사용 등이 주요 지휘부였다. 출병에 앞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박기풍의 <진중일기>는 이때 김창시가 낭독한 격문을 적고 있다. “대개 서북지방은 기자의 옛 강역이고 단군의 옛 굴(窟)로서… 임진난 때 나라를 재조(再造)한 공이 있고…”라고 시작하는 격문은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면서,
“이러한 때 다행히 세상을 구할 성인이 평북 선천 검산 일월봉 밑 군왕포(君王浦) 아래 가야동(伽倻洞) 홍의도(紅衣島)에 탄강하였다”라고 선포했다. 특별히 진인(眞人)을 추대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인 탄강’ 운운은 천명을 강조해 민심을 얻고자 하는 계책일 것이다. 드디어 봉기가 시작되자 선봉장 홍총각은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홍경래의 본진보다 앞서 가산으로 진군해 단숨에 점령하고 군수 정시(鄭蓍)와 그 부친을 처단했다. 첫 전과였다.
<홍경래전>은 홍경래군이 ‘추호도 백성을 범하는 일이 없고’ ‘본진의 장졸 가운데서 규칙을 범한 자 두세 명을 노변에서 효수하고, 각 방면에 전령하여 이 사실을 방으로 널리 알려 기율을 엄격히 지키게 하였다”고 전한다. 의군(義軍)의 면모를 보이려 한 것이다. 민심을 얻은 봉기군에게 평안도 각 현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산과 곽산은 물론 삽시간에 정주, 선천, 박천, 태천, 철산, 용천을 점령했다.
전략적 실수로 정주성에 갇혀
“여덟 고을이 잇달아 함락되고 도로가 막히자 인심이 물 끓듯 흉흉했다. 남북군이 홍경래의 명령대로 이르는 곳마다 옥을 파해 갇힌 자를 석방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면서도 군기를 엄히 단속하고 노약자를 위무하니 민심이 홍군(洪軍)으로 돌아와 마음으로 복종했다. 모병(募兵)에 응하거나,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하려는 사람들로 저자를 이루었다.”
이때 전략적 실수가 발생했다. 여덟 개 군현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안주를 점령하기 위해 조기 남하했어야 하는데, 때를 놓친 것이었다. 안주는 평안병사의 본영이 있는 군사상 요충지였다. 당초 태천을 치기 전에 안주를 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사이 관군이 집결해 수성태세를 갖췄다. <홍경래전>에는 안주 공략을 적극 주장했던 김대린(金大麟) 등은 홍경래가 듣지 않자 초조해져 ‘대사는 다 끝났다’며 홍경래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려다 홍경래에게 되레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한숨을 돌린 조정은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을 관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로 삼아 현지로 급파하고, 뒤이어 이요헌(李堯憲)을 관서순무사, 박기풍을 중군(中軍) 등으로 임명해 현지로 보냈다. 12월27일 1천여 명의 관군과 봉기군이 안주 대안(對岸)에 있는 박천의 송림(松林)에서 맞붙었는데, 초전에는 홍총각이 이끄는 봉기군이 승리했지만 관군이 계속해서 증원되는 바람에 패해서 정주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관군들의 노략질에 분개한 백성들이 대거 홍경래를 따라 정주성에 입성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쫓기듯이 들어간 정주성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식량이 떨어져서 가축을 다 잡아먹고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형편이 되었다. 관군들은 성 안에 연을 띄우거나 편지를 보내 귀순을 종용하며 심리전을 펼쳤는데, 홍경래로서도 이를 방지하기 어려웠다.” 간간이 국지적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 아사자가 속출하자 홍경래는 3월23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여자 215명과 어린아이 13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홍경래전>은 이때도 홍경래는 늠름했다고 전한다.
“경래는 성 안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때때로 연훈루(延薰樓) 아래에서 말을 달리고 칼춤을 추어 장졸들이 탄복케 했으며, 군졸들 가운데 전사자가 생기면 직접 제사를 지내주고, 병자는 몸소 문병을 갔다. …하루는 검을 뽑아 춤을 추며 입으로 시 한 짝을 지어 읊으니, ‘천지가 뜻이 있어 한 남자를 낳았도다’(乾坤有意生男子)라는 것이었다.”(<홍경래전>)
홍경래가 무작정 농성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경래가 고단한 성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은 벗어날 도리가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기다리던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하나는 박종일(朴鍾一)이 서울에서 난을 일으키기로 한 것이요, 둘은 북쪽의 각 고을로부터 원병이 오기로 한 것이요, 셋은 정시수(鄭始守)가 호병(胡兵)을 이끌고 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홍경래전>)
이 중에서 ‘호병’, 즉 만주족 병사의 동원 여부가 주목된다. 정시수는 5살 때 만주로 들어가 마적 두목이 된 인물로서 홍경래의 요청시 동조 거병하기로 했으나 연락을 맡은 강계의 향임(鄕任) 송지렴(宋之濂)이 김사용의 궤멸 소식을 듣고 관군 쪽에 가담해 무산됐다.
불사를 바라는 민중의 마음
그사이 관군은 굴토군(掘土軍)으로 성 아래 땅을 파서 북장대의 지도(地道)에 화약을 장전시켰다. 순조 12년 4월19일 화약이 폭발하면서 관군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홍경래는 이희저 등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으나 <홍경래전>은 “위에 쓴 것(홍경래 전사)은 관군 측의 기록이고 정주의 야담에는 경래가 성벽이 무너질 때 몸을 날려 성을 넘어서 먼 곳으로 달아났으며 그날 살해된 것은 가짜 홍경래였다고 한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홍경래 실기(實記)>는 “도망?야 잡지 못?고”라고 전하고 있다. 홍경래의 불사(不死)를 바라는 민중들의 마음이 소설 속에 담긴 것이다. <홍경래전>은 “성이 함락될 때 관군들은 함부로 총질하고 창질하여 남녀 노유를 가리지 않고 죽여서 쌓인 시체가 성중에 가득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때 2천 명 가까운 봉기군이 참살당했다. 바로 이런 폭정이 홍경래를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살아 있게 한 것이다.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은 1811년(순조 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순조 12년) 음력 4월 19일까지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이다.
목차
1 배경
2 원인
3 계획
4 경과
5 실패한 이유
6 의의 및 평가
7 함께 보기
8 참고 자료
조선 후기에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지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컸다.
[편집] 원인
표면적인 이유로는 조선 시대에 서북인을 일반적으로 문무 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격문에서 홍경래는 “임진왜란 때 재조(再造)의 공이 있었고, 종묘의 변에는 양무공(襄武公 : 정봉수)과 같은 충신이 있었다. 돈암(遯庵 : 선우협)·월포(月浦 : 홍경우)와 같은 재사가 나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한(平漢)이라고 멸시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완급(緩急)의 경우에는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 년 동안 조정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사실상 서북인을 중요한 자리에 임용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정책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선조 때 이이가 서북인의 수재(守宰 : 지방관)가 되는 자가 적으므로 지방 인재의 등용을 상책(上策)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다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서북인의 불평불만을 이용하여 거사의 첫 조건으로 내세워 민심을 얻기로 꾀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다른 기록에 보면 사마시에 실패한 뒤 그 급제한 자를 보니 모두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당시 과거 제도도 크게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의 영예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평안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改造犯上)의 뜻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남양 홍씨가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위정자에 대한 불평, 즉 권력적 감정이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분노를 품은 홍경래는 일찍이 집을 떠나 각지로 방랑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던 것이다.
[편집] 계획
홍경래가 뜻을 결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정에 비위가 거슬린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부호·명사들을 농락하면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가산(嘉山)에 있는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복좌를 업으로 하는 우군칙(禹君則), 가신의 역속(驛屬)이며 졸지의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문재(文才)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심복으로 하여 거사에 참여시켰으며,
태천의 김사용(金士用), 곽산의 홍총각(洪總角), 개천의 이제초(李濟初)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楊時緯), 영변의 김운룡(金雲龍) 등을 비롯한 장사들을 모두 선봉장 겸 군사 지도자로 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金惠哲), 안주의 나대곤(羅大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鄭敬行), 선천의 유문제(劉文濟)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의 대정강(大定江)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을 꾀어 장정 일꾼을 모아들였다.
이리하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우군칙을 참모로 한 본대는 가산·박천을 함락시킨 후 한양으로 남진케 하고, 1대는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兵站長)으로 하여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의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다.
[편집] 경과
1811년 음력 12월 18일 삼경에 이희저의 일대가 가산군청을 습격하여 군수 정저(鄭著)와 그의 아버지 정노(鄭魯)를 죽이고, 군청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다.
홍경래가 평서대원수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군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김창시와 우군칙이 모사,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본대는 가산군과 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음력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후(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음력 12월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한편 이 변보가 음력 12월 20일 평양에 전해지자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는 22일 순안의 병사를 안주로 향하게 하고, 다시 열읍(列邑)의 병사를 계속 동원하게 하고, 도내의 곳곳 요새를 굳게 지키게 하며, 만일을 위하여 창의(倡義)의 유생·문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방비하게 하고 일부는 출정시켜 안주의 관군에 부속시켰으나 송림리 전투에서 적을 추격·섬멸치 않았다는 이유로 이만수는 파면되었다.
정부에서는 병조참판 정만석(鄭晩錫)으로 양서위무사 겸 감진사(監賑史)에 임명하여 반란지를 위무케 하고, 난군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다. 24일에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李堯憲)으로 양서순무사에 임명하고, 박기풍(朴基豊)을 중군으로 삼아 서적(西賊) 토벌에 관한 군무를 보게 하고, 27일 선봉대로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음력 1월 3일 정주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는 송림리 전투 후 5일 만이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관군이 이겨 박천·가산을 회복하였으며, 8읍 중 정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하였다. 따라서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으며, 관군은 사방의 의병과 더불어 전세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번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농성을 계속하였다.
이에 정부군은 땅굴을 파들어가 화약으로 성의 아래를 폭발시키고 성내로 돌입하여 함락시키니 음력 4월 19일로 농성한 지 100여 일,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우군칙·홍총각 등 다수는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음력 5월에 참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편집] 실패한 이유
홍경래의 계획이 일부 어그러져 실패를 가져오게 하였다. 박종일(朴鍾一)로 하여금 한양에서 난을 일으켜 중앙의 혼란을 꾀하였으나 주살되고, 창성(昌成)·강계(江界)·초산(楚山)·위원(渭原) 등지의 포수(砲手)들의 내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체포되었으며, 점령한 8읍이 함락되어 정주성이 고립되고, 붙들린 포수들이 정주성 공격을 도왔으며, 호병(胡兵, 청나라 군대)을 청하려 하였으나 부하의 번의로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편집] 의의 및 평가
지도자들이 내세운 봉기의 이념은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이 가장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토호 관속을 향해서는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 문제 등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전개 과정에서 일반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고, 단지 곡식 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 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홍경래의 난은 극도로 피폐한 조선 말기의 생활불안과 억울한 감정에서 오는 위정자에 대한 반항이라는 평가도 있다. 비록 정부의 힘으로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치의 폐단이 가시지 않고 1813년(순조 13) 음력 11월에 제주도의 양제해(梁濟海)의 음모 사건, 1816년(순조 16) 음력 10월 성천읍의 승려 학상(學相)이 홍경래의 여당이라 자칭하며 흉패한 행위를 한 것 등으로 보아 홍경래 난은 일시 돌발적인 군란(軍亂)이나 민란에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파급되어 민중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으며 철종 때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