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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작성자수학박사|작성시간10.10.13|조회수2,025 목록 댓글 0

한국건축의 시대별 구분 원시시대




원시시대

■ 구석기 시대 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 이지만 건축적인 구조로 볼 수 있는 주거는 아직 없었다. 주로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동굴이나 바위틈 또는 큰 바위 그늘을 이용한 것이 많고, 때로는 강가에 막 집을 짓고 바람을 가릴 수 있는 낮은 담들을 만들어 살았었다.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 공주 석장리 아래층 유적, 평남 상원 검은 모루유적, 함북 웅기 굴포리유적, 평남 덕천 승리산유적, 충남 공주 석장리 중간충유적

■ 신석기 시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구조물이 만들어진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주거는 구덩식이다. 이 시기의 집터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은 주로 작은 구릉의 경사면에서 작은 취락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오산리 유적, 궁산 유적, 지탑리 유적, 남경 유적, 암사동 유적, 서포항 유적, 범의 구석 유적, 토성리 유적, 용연리 유적



■ 청동기/철기 시대 이 시기의 집터 유적은 한반도 전역에서 두루 발견되는데, 넓은 지역에 많은 수가 밀집된 취락 형태를 보여준다. 함경북도 회령 오동 유적/평안북도 강계 공귀리 유적/경기도 파주군 교하리 유적/경기도 파주군 월릉면 옥석리 유적 무덤 형식으로는 고인돌(지석묘),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널무덤(석관묘)을 비롯하여 돌깐무덤, 움무덤 등이 있으며, 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이다.

초기고대국가시대

■ 초기 고대 국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생산력의 증가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사적 소유를 발생시켜 평등한 원시 사회를 무너뜨렸다. 빈부 차이에 따른 계급 형성은 초기 고대국가 성립의 기초가 되었고, 기원전 천 수 백년에 우리나라의 첫 고대 국가인 고조선을 성립시켰다.

고조선은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고 세력이 강대하였으나,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 무제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한은 고조선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의 4군을 설치하였고 30년이 채 되지 않아 낙랑군을 제외한 3군이 고구려의 토착 세력에게 밀려났다. 그러나 3세기에는 요동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떨치던 공손씨가 다시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낙랑군은 4세기 동안 이어져오다가 313년에 고구려에 흡수되고 대방군도 백제에 흡수되었다.

고조선은 발달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능률적인 건설용 도구를 많이 제작하였고, 이 밖에도 각종 수공업과 용업이 발달하여 기와나 벽돌과 같은 건축 재료가 발달하기도 했다. 강상무덤/누상무덤/낙랑·대방 출토 벽돌무늬/낙랑 제 1호 무덤/평양 정백동 227호 무덤 삼국시대

삼국시대

■ 고 구 려

철기 상용이 본격화되고 사회적 분업이 진전됨에 따라 우리나라 고대 사회는 더욱 발전된 국가 형태를 취해 갔다. 부족의 특성이 용맹스럽고 씩씩한 고구려인은 그들의 문화에서까지 거대함과 강렬함을 느끼게 한다. 건축 문화는 통구·평양 등의 옛 도읍지나 산성터에서 보이는 유적, 유물, 또는 무덤 구조나 내부의 벽화에서 그 모습을 단편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성곽 축조나 도성 건설에서는 중국식 도성 계획 기법인 방리제를 지역 실정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등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 주었다. 6세기 후반경에 건설된 고구려의 평양성은 백제의 사비성과 함꼐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또한, 건축술은 고구려가 가장 발달하여 백제와 신라·일본에 까지 전해졌으며, 이러한 영향은 삼국 모두가 중국의 것과 다른 고구려자尺를 사용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고구려 무덤 내부의 벽화는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 문화로 꼽힌다. 이 벽화들은 무덤의 주인공인 귀족들의 생전 생활을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은 영화를 누리겠다는 소망에서 그려진 것이다. 사냥하는 모습, 춤추는 모습, 씨름하는 모습, 그리고 귀족 저택 안의 부엌이나 외양간 우물 등을 그린 그림들에서 당시 귀족들의 생활모습과 더불어 그들의 지배를 받던 노비들의 삶도 엿볼 수 있다. 또 고구려 후기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호 동물로서 사신도가 많이 그려졌는데, 그것들은 힘찬 선과 화려한 색채로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고구려의 건축으로는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장안성, 안학궁, 금강사지, 상오리 사지, 정릉사지, 장군총, 태왕릉,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이 있다.

■ 백제

백제는 온아하고 유려하며 정이 두터운 느낌을 주는 예술문화의 특성을 남기고 있다..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으로부터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 전수된 불교가 그 상륙지인 한성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으나 점차 전국으로 전파되어 건축 예술의 사상적 근원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건국 당초 북쪽에 접한 낙랑과 대방군으로 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으로는 황해를 건너 동진, 송, 제, 양, 진 등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발달 하였다.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부여에 도읍을 정하였던 성왕 때에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동쪽으로는 신라에까지 문화를 전파하고 남쪽으로는 일본에 까지 문화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 고대 문화의 기반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도 남겨져 있는 유물이나 기록이 가장 적지만 일본이나 신라에 남겨 놓은 귀중한 문화 업적들은 백제의 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결국, 백제는 중국 문화의 수입과 전달에 큰 활약을 하면서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건축으로는 부소산성, 공산성, 몽촌토성, 대통사, 정림사지, 금강사지,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미륵사지, 공주 송산리 고분, 무령왕릉, 부여 능산리 고분 등이 있다.

■ 신 라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뒤늦게 받아들여서 고구려보다는 1세기 반이나 뒤진 법흥왕 15년(528)에 공인되었다. 왕국의 사상 통일의 요구와 왕권 강화를 위하여 호국적 성질을 띤 불교는 왕실과 국가의 비호로 차차 성장하게 되어서 도성을 중심으로 불탑의 건립이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외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라는 오히려 그 고유의 문화 특성을 비교적 잘 지속시킬 수 있었다. 외래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도 그 의식이나 기술을 잘 흡수 소화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문화적 역량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된다.신라에서는 상당히 정비된 공사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장기간 축적된 기술인력을 바탕으로 중앙의 강력한 국가권력이 이들을 동원 조직하고 지도적 기술자들이 계획과 설계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 이 시대의 수준 높은 건축을 낳게 한 것이다. 신라는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주변 건축문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에게 적합하게 만든 소박하고 견실하면서 단아한 모습을 특징으로 나타냈다. 이와 같이 신라는 그 문화에 소박한 옛 전통이 남아 있었으나, 뒤에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 기반을 넓혀 가면서 조화된 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일상 생활에 쓰이는 신라 토기와 같이 전통적인 소박한 체질을 그대로 담고 있는 미술품이 있는가 하면,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같이 세련된 미의식이 뛰어난 미술품도 있다. 신라 시대의 건축으로는 반월성터,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탑, 월정교지, 첨성대 등이 있다. 통일신라/남북국시대

■ 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의 문화적 특색은 삼국의 높은 문화 유산을 집대성한 데 있다. 고구려, 백제의 양국 문화를 융합하고 종래 신라 문화의 폭을 넓혀 민족 문화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한, 당 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 문화 교류를 통해 한층 더 세련된 문화를 형성시켰다. 통일 신라 중기의 예술은 조형 미술 중심 이었으며, 대부분 불교 미술이나 사후 세계를 위한 무덤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통일기의 예술은 귀족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모든 분야에서 상층 문화만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즉, 귀족 종교로 머물러 있던 불교가 피지배 계급에까지 널리 퍼져 민간 문화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는 불교 문화라고 할 정도로 불교가 지배적이었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공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배출되었고, 당나라와 인도에까지 유학하여 교리를 배우거나 성지를 순례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활약하는 이가 많았다. 특히 자장, 의상, 원측, 혜초 같은 이들은 당대에 이름을 떨친 고승이었다. 어느 고대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명성 높은 고승은 그 당시 문화적인 수준을 크게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많은 절과 석탑, 기타 불교 미술품 등을 창안한 문화 창조자로서의 역할 또한 컸다. 특히, 신라 불교가 절 건축에 영향을 준 것은 일반 평면에 까지 전파된 정토교와 선종의 유행이다. 이러한 사상적 변혁은 절 건축양식을 변천시키는 동기가 되어 점차 그 양상을 달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통일 신라의 지배 계급은 불교와 더불어 유교 사상도 권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유교의 가르침이 편리하고 알맞은 데 기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교와 불교의 병행된 발전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육성 발전된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는 보다 화려하고 세련된 면을 보여 통일 신라 미술의 독자성을 확립하였다. 건축 문화에서도 전통적인 특성을 잘 살려 독창적 경지를 성취하였다. 통일신라의 건축으로는 월성과 안압지, 임해전지 의 궁궐 성곽 건축과 함께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감은사지, 불국사, 고선사 같은 사찰과 석불사와 같은 석굴 건축 등의 불교 건축이 성행했고 고선사지 3층 석탑,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정혜사지 13층 석탑, 포석정 등이 있다

■ 발 해

발해의 정치, 사회,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를 받아들여 독특하게 형성되었다. 그래서 발해의 정치 조직은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 6부제로 구성되었지만 실제적인 운영 방식은 고구려 정치 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또한, 도시 구조도 발해의 수도가 당의 수도인 장안성을 본뜬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당 문화의 영향은 발해와 당 사이에 이루어진 활발한 문화 교류의 결과였다. 발해에서는 불교 문화도 크게 융성하였으며, 그 흔적은 발해의 옛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여러 절터들에서는 불상, 석등, 돌사자, 연꽃무늬, 와당 등 불교 관계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절의 양식이나 불교 관계 조각품들도 직선적이고 소박한 고구려의 예술 양식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다. 상경 부근에 분포되어 있는 발해 무덤들도 고구려의 양식 그대로인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온돌 장치 등도 고구려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발해의 문화는 패기에 넘치던 고구려 문화가 계승되어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도성-상경 용천부/궁궐-상경 용천부 궁성 남문터/누각터정자터/상경 용천부 제 1절터/상경 용천부 제 9절터/영광탑/상경 용천부 석등/서구 살림집/삼령둔 무덤/정혜공주 무덤/육정산 제 1무덤군의 6호 무덤/발해의 막새 기와들/상경 용천부 제 1절터에서 나온 치미

고려시대

■ 고려시대 고려는 넓어진 영토에 대한 지방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10~11세기에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이 크게 건설되었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략적 거점으로 중요한 서경(평양) 건설이 건국 초기부터 진행되었다. 그 외에도 국가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건설하였다. 12세기 중엽 이후 봉건 통치 제도가 문란해지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실의 사치한 생활로 인해 방대한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다. 12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더욱 심해졌고 의종 때에는 개경과 전국의 여러 곳에 왕실의 유홍터인 별궁, 누각들이 건설되었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는 토지 겸병이 성행하면서 양반 권력자들이 방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수백 칸이나 되는 사치스러운 가옥에서 생활하였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몽고, 홍두적,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는 전쟁에 의한 파괴와 전후 건설이 여러번 반복되었다. 어려운 나라의 정세와 피지배 계급에 대한 과중한 부담으로 건설의 규모는 전에 비하여 커지지 못하였으며, 또 이전 시기와 같이 그렇게 세련되지도 못하였다. 고려시대 예술은 불교와 귀족 생활이 연관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건축에서는 한국 목조 건축 양식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 주심포와 다포 양식이 정착되었으며, 개경에는 만월대 등의 궁궐과 현화사, 흥왕사 등의 많은 절이 건립되었다. 당시의 목조 건축물로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알려져 있으며,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건축의 주심포 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장중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 고려말에 건립된 석왕사 웅진전은 원의 영향을 받은 다포 양식으로, 중후하고 장엄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한편, 살림집에서는 온돌이 일반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는 등, 한국 건축의 형식이 완성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대체로 안정감이 부족하여 조형 감각면에서는 신라시대의 석탑보다 다소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오히려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자연스러운 면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승려들의 묘탑인 부도는 고려 시대에 들어와 조형 예술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특히, 선종의 유행과 관련하여 장엄하고 수려한 부도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고려 시대의 건축으로는 송악산 아래의 고려 본궐터, 숭인전 등의 궁궐 건축과 불일사지, 거돈사지, 고달사지, 미륵리사지, 흥덕사지, 법천사지, 월정사지, 봉정사, 부석사, 수덕사 등의 불교 건축이 주로 남아있다

조선시대

■ 조선 사회의 문화는 크게 유교주의 문화와 불교, 도교, 기타 토속신앙이 융합된 서민 문화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유교적인 양반 문화가 그 영향력을 계속 확대해 나갔는데 학문과 사상, 미술과 건축, 공예 등 조선의 문화를 향유한 계층은 주로 양반 계층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건축에서도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났다. 즉, 고려 시대에는 절 건축이 중심이었으나 15세기에는 궁궐과 관아, 성곽, 성문 그리고 유교 교육과 제례 의식의 거행을 주 목적으로 하는 학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다.

건축은 건물의 규모가 법적으로 규제되어 있어서, 그 안에 거주하거나 그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일정한 차등을 두었다. 이것은 신분 질서를 지키려는 뜻도 있었지만 불필요한 사치를 막자는데도 이유가 있었다. 특히, 16세기에 이르러 건축은 서원 건축을 중심으로 발달 하였다. 서원 건축은 주택, 사원, 정자의 건축양식이 배합된 독특한 특성을 지녔다. 즉, 산과 하천을 끼고 있는 마을의 한적한 곳에 세운 서원은 학문 연마에 적합하게 축조되었으며 특히, 자연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축조되었다. 더구나 서원 건축은 절 건축의 가람배치 양식을 본떠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재를 지었는데, 그 구조는 주택 양식의 도입과 유교적인 검약 정신에 영향을 받아 대체로 검소한 양식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체로 조선 시대의 건축은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도 위엄을 갖추고 있었으며 어느 건물이나 건물 자체의 균형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 시대 정원은 건물에 부속한 정원도 될 수 있는대로 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살린 것이 특징적인 면이었다. 조선 시대의 건축으로는 한양의 도성과 5대궁, 4대문, 북한 산성, 남한 산성 같은 도성 건축이 있고, 무위사, 개심사, 해인사, 법주사, 동화사, 범어사, 화엄사, 통도사, 봉정사 등 많은 사찰이 재건 또는 창건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조선의 숭유배불 정책에 의해 그다지 불교 건축이 활발하지는 못했다. 유교 건축으로는 나주 향교, 영천 향교, 밀양 향교 등의 3대 향교 외에도 많은 향교가 각 지방에 세워졌고, 소수 서원, 도동 서원, 도산 서원, 필암 서원 등의 서원도 여러 곳에 세워졌다.

 

 

집짓는 순서

집짓는 순서와 의례는 터잡기에서 시작하여 터닦기(開土), 주추놓기(定礎), 기둥세우기(立柱), 상량식, 집들이(入宅)로 이어진다.

1.집짓기
집짓기에 있어서 좋은 터를 잡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다. 집터는 산세와 지세를 보아 오목하고 양지바른 곳을 선택하며 주위보다 약간 높아 전망이 확 트인 곳이 가장 좋다

2.개토
개토(開土)는 집터를 닦기 위해 처음 땅을 파는 일이다. 먼저 지신(地神)에게 고사(告祀)를 지내고 나서 일을 시작하는데, 이는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무사고를 기원하며 집에 불(화재)이 나지않고 잡귀가 들지 못하게 부정을 치기 위함이다.

3.정초
정초(定礎)는 기둥을 세울 자리에 주춧돌을 놓는 작업이다. 주초를 놓는 작업은 주초의 배열을 결정함으로써 기둥이 놓일 자리를 결정한다. 이 작업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땅(穴)에 아버지의 씨앗(生命)을 의미하는 주초를 박아 성주신을 잉태하게 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4.입주
입주는 기둥을 세우는 작업에서 끝나지 않고 주두에 보와 도리를 결합시켜 건물의 뼈대를 형성하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목수들은 이 날을 집 세우는 날이라고도 한다. 상량제(上樑祭) 목구조 집 짓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 의례이다.

5.상량
상량이란 목재를 주 구조체로 하는 집을 지을 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구조체(마룻대)를 말하며 마룻대에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이 좌정한다고 여겨 집의 안녕과 집주인의 덕을 기리는 의식이 이루어진다

6.입택
입택(집들이)은 쉽게 말해 '이사'이다. 이삿짐이 새집에 도착하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고사를 지낸다. 그 후 세간살이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놓게 되면 제일 먼저 조상을 모신다. 조상에게 입택을 알리고 가족들의 수복을 빈 다음 성주신에게도 집안의 안녕과 번성을 기원한다

 

 

■지붕의 유형

지붕은 일조, 피풍, 피수, 기온과 습도 등 건축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능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외관상의 의장 효과도 크다. 사실 고건축물을 보았을 때 지붕형식은 그 각각의 종류에 따라 그 건물에 맞게 쓰이며 그 지붕형식으로 건물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해 준다.


맞배지붕 (수덕사 대웅전)
전통건축의 지붕형식 중에서는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 주심포에서 많이 쓰인다. 정면에서는 거의 장방형에 가까운 지붕면이 보이며 측면에서는 八자 모양의 지붕 테두리가 보인다. 맞배지붕도 다른 지붕형식에 비하면 매우 적지만 지붕선에 곡선이 들어가 있다. 용마루의 경우 중앙이 내려가고 양끝이 올라가도록 하는데 이는 용마루의 양끝이 처져보이는 것을 보정해주려는 의도인 듯 하다. 수덕사 대웅전과 무위사 극락전, 부석사 조사당, 개심사 대웅전, 선운사 대웅전 등이 있다.


우진각지붕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을 비교할 때 전자는 지붕면이 전후 2면이지만 후자는 전후좌우로 4면의 지붕면을 갖는다. 우진각지붕은 전후좌우 4면이 모두 경사를 갖기 때문에 정면에서는 사디리꼴로 보이고 측면에서는 3각형이 된다. 가구는 팔작지붕과 비슷하지만 팔작지붕보다 높게 되어 있다. 해인사 장경판고, 서울 남대문 궁전, 건물에서의 정문과 문루들 등에서 볼 수 있다.


팔작지붕 (화엄사 대웅전)
팔작지붕은 우진각지붕의 상부를 잘라내고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은 복합형의 지붕이다. 그렇게 올려 놓은 듯한 맞배지붕의 측면 삼각형을 합각면이라 한다. 아름다운 구성미를 지닌 지붕으로 곡면이 특이하여 중심 건축물에 즐겨 사용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통도사 불이문 등이 있다.


사모지붕 (창덕궁 애련정)
현존하는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로 평면형이 정방형인 건물이거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을 한 건물에서 많다. 불국사 관음전, 창덕궁 연경당의 농수정 등이 있다.


육모지붕
평면이 육각형인 지붕으로 경복궁 향원정이 있다.


팔모지붕 (창덕궁 존덕정)
평면이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지붕이다.


T자형지붕 (통도사 대웅전)
일반적으로 능앞의 정자각에 많이 보이며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다른 모양의 지붕구성에서도 발견된다.


십자형지붕 (송광사 범종루)
전주 송광사 범종루가 이러한 형태이며 부용정 같은 형태도 있다.


■ 목조건축

 

건축은 삶을 담는 공간이다. 따라서 건축은 역사적인 삶의 모습, 자연 환경 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전통 건물은 대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을 기초로 하여 나무로 틀을 짜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다시 여러 채가 어우러져 궁궐, 관아, 서원, 절, 살림집이 되었다. 한국의 전통 건물 한 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본다.

● 기 단

빗물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변보다 높이 쌓은 것이 기단<基壇>이다. 궁궐, 관아, 절, 사대부가에서는 건물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서 기단을 높게 만들기도 한다. 대개 돌로 쌓는데 자연석을 면을 고르게 하여 쌓은 것과, 다듬은 돌을 가지런히 쌓은 것이 있다. 무량수전처럼 석탑의 기단을 만들듯이 지대석, 갑석, 면석을 맞춘 것을 가구식 기단이라 한다. 한편 궁궐, 사당 등에는 기단보다 더 넓게 조성하여 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쓰이는 월대가 있다. 

 

● 주 춧 돌

주춧돌 은 기둥으로부터 받는 무게를 땅에 전하는 돌로 기둥이 놓일 자리를 고르게 다듬는 경우, 자연석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살림집을 비롯해 많은 경우, 자연석을 그대로 썼다. 이때 주춧돌 윗면의 굴곡대로 기둥의 밑을 깎는 그랭이질을 하여 기둥을 세우는데 이렇게 하면 기둥이 옆으로 밀리지 않아 건물이 더욱 튼튼해진다.

 

 

 ● 기 둥

건물의 몸통을 이루는 것이 기둥이다. 단면 모양에 따라 원주<圓柱;두리기둥>와 각주<角柱;모기둥>로 나누는데 대개 원주가 더 격이 높다고 생각하여 궁궐이나 절의 주요 건물은 원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살림집에서는 각주가 일반적이며 원주는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원주는 기둥의 굵기의 변화에 따라 기둥뿌리에서 3분의 1쯤 되는 부분까지 긁어지다가 다시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둥,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민흘림기둥, 위아래의 굵기가 같은 원통형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자연목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쓰기도 하였다.

 

 

 

 

● 공 포

처마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고 처마를 깊게 해주며, 지붕을 높여 주고, 건물을 장식하는 것이 공포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공포가 표현되어 있을 만큼 고대부터 만들어 왔다.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식, 기둥 위만이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주간포)를 짠 다포식, 기둥 위에 앞뒤 방향으로 판재를 얹어 보를 받치도록 한 익공식이 있다. 봉정사 극락전,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 등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건물은 대개 주심포식이며 다포식은 고려 말 이후에 등장하였다. 익공은 주로 궁궐의 침전, 사찰의 부속건물, 서원, 향교, 사당에 쓰였다. 조선시대의 살림집은 공포를 만들 수 없었으므로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이 일반적이다.

 

 ●  가 구

기둥이나 공포 위에 얹혀져 내부공간을 만들기 위한 부재를 통틀어 가구<架構>라 한다. 가구에는 크게 보, 도리, 대공이 있다. 보는 기둥 위에 앞 뒤 방향으로 놓이는 부재이며, 도리는 가구 제일 위에서 직접 서까래를 받는 부재이다. 보와 도리는 각각 위치에 따라 대들보*종(마루)보*툇보 등으로 나뉘며, 종(마루)도리*상중도리*중도리*하중도리*주심도리*외목도리 등으로 구분한다. 이 중 종도리를 올리는 것을 상량이라 하였다.

 

 ●  지 붕

건물의 제일 위에서 눈, 비와 햇빛을 막아주는 것이 지붕이다. 자연적 환경과 경제력에 따라 재료를 달리하는데 짚이나 새를 엮어 얹은 초가지붕, 산간지방에서 나무판을 얹은 너와지붕, 기와를 구워 인 기와지붕 등이 있다. 기와지붕은 서까래 위에 산자를 깔고 보토를 한 후 기와를 얹어 만드는데 모양에 따라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모지붕으로 구분한다.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은 사당이나 사찰의 일주문, 천왕문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우진각지붕은 도성이나 궁궐의 문에 주로 쓰였다. 궁궐이나 관아, 사찰, 살림집의 주요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석 조 물

□ 석조물의 개념 한국의 석조유적은 매우 다양하지만, 비교적 많이 남아 있어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석탑과 부도, 석등 및 당간지주와 비석이다. 석조유적으로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과 석불, 마애불, 석누조, 기타 장식물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는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석조유물 중에는 고대 목조건축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 많아서 지금은 사라진 고려 이전의 목조양식을 연구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 석탑

●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조형물로 때로는 부처의 사링없이 그 상징성만을 가지고 세워지기도 한다. 삼국시대의 석탑은 규모가 크며 목탑과 같은 가구식 구조로 만들어져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 석탑은 삼국시대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아지기는 했지만 웅장한 맛을 갖고 있다. 탑은 크게 지단부, 탑신부, 상륜부 세부분으로 나뉜다. 석탑(고선사지3층탑)









●기단부는 건물로 치면 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기잔부는 건물의 가구식 기단과 같은 형상이다. 따라서 지대석을 놓고 기둥석을 세운 다음에 갑속을 덮어 완성한다. 기둥석과 기둥석 사이에는 면석으로 막는다. 기둥석 중에서 귓기둥은 우주석, 가운데 있는 기둥들은 탱주석 이라 부른다. 갑석 위에는 옥신받침석을 놓고 그 위로 탑신이 올라간다. 이중기단일 경우 밑의 기단을 하대, 위의 기단을 상대라고 구분한다.



●탑신부는 건물의 몸둥이와 지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건물의 몸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시 옥신부라고 부르고 지붕에 해당하는 부분을 옥개부라고 부른다.







●상륜부는 지붕장식으로 탑마다 부분적인 명칭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대게 밑에서부터 노반, 복발, 양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 등으로 이루어 진다. 노반은 상륜부를 받치고 있는 방석이고, 복발은 엎어놓은 사박모양의 받침이다. 양화는 꽃이 피어있는 꽃송이와 같은 모양이며, 보륜은 가락지처럼 생긴것인데, 보통 여러개를 포개 놓는다. 보개는 보륜위에 왕관능 씌우듯이 올려놓은 것이며, 수연은 꽃의 씨주머니처럼 생긴 것이다. 용차, 보주는 동그란 구슬모양이다. 이러한 상륜의 장식들은 모두 극락세계의 법륜과 금은 보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불국사석가탑 참고자료 김왕직,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 발언,

□ 부도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안치하는 탑으로 부도탑이라고도 부른다. 스님들의 무덤이 곧 부도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부도는 대부분 규모가 크고 화려한 탑 형식의 부도였으나, 고려시대는 스님들의 수가 늘어나자 작고 실용적인 석종형 부도가 나타났다. 부도의 부분명칭도 탑과 같이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나눈다.


●팔각원당형부도는 주로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되었던 부도이며 대체적으로 탑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팔각원당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평면형태가 팔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쌍봉사 철강선사부도 흥법사지 염지화상부도

●고려시대에 접어들면 부도는 규모도 작아지고 모양도 종과 같은 형태로 혁신적인 변화를 보이는데, 이를 석종형부도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지대석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올린다.

신륵사 부도 태화사지부도 안심사부도
참고자료 김왕직,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 발언, 2000


□ 석등

●석등은 대부분 사찰에서 불을 밝히기 위새서 만들었으나, 그 기능보다는 부처님에게 불을 공양한다는 상징성이 강한 조형물이다. 석등은 대개 대웅전과 같은 본전 앞에 만들어진다. 석등의 모양은 대부분 팔각원당형부도와 거의 같은 형상으로 기단인 하대석과 상대석은 부도와 같이 복련과 양련조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중대석은 부도와는 달리 짧은 팔각기둥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간주석이라 부르며 때로는 중대석이 북을 엎어놓은 것과 같이 장식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를 고복석이라고 부른다.

실상사석등 불국사석등


●기단부 위에는 탑신부에 해당하는 화사석이 놓이는데, 팔각형이 일반적이며 화창이 있어서 불빛이 새어 나오도록 하고 있다. 화창은 보통 4방향이 뚫리고 나머지는 사천왕상 등을 조각하기도 한다. 특수형석등(미륵대원) 특수형석등(여천흥국사)


●화사석 위에는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지며 위에는 상륜부에 해당하는 연꽃 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올라간다.
●간주석 대신에 쌍사자를 조각해 받친 석등이 있는데, 이러한 석등을 특별히 쌍사자석이라고 부른다. 쌍사자석등(영암사지) 쌍사자석등(회암사지)
참고자료 김왕직, 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 발언, 2000 □ 당간

■ 당간

●당간은 좁고 긴 깃발인 당을 거는 깃발대이다. 그리고, 당간(간대)을 고정하기 위한 지대가 당간지주이다. 당간은 보통 사찰의 맨 앞쪽 입구에 세워져서 사찰의 행사등을 알리는 역할을 해 왔다. 당간 지지대의 구성은 대개 기단석 위에 두개의 당간지주가 서고 그 사이에는 당간 받침대가 놓이게 마련이다. 두개의 당간지주는 그 사이가 떠 있어서 당간을 끼울 수 있도록 당간지주 안쪽면에 당간을 고정하는 쐐기를 꽃을 수 있는 홈이 파져 있는데 이를 간공이라고 하고 맨 위에 당간지주 모서리에 있는 홈은 간구라고 한다.

간대 (성거천흥사) 철당간(보은법주사) 당간지주(성거천흥사)

●비석은 부도와 함께 세워져 부도 주인의 업적과 행적을 기록한 사찰내의 비석과 국가적인 차원에서 세운 공덕비, 위령비, 대첩비 등으로 다양하다. 비석은 대부분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기단에 해당하는 거북이 모양의 귀부와 비석면에 해당하는 비신, 지붕에 해당하는 이수로 구성된다. 비석 (거돈사지) 귀부(미륵대원) 귀두(고달사지)

 

 

■ 궁궐

조선시대 궁궐건축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크고 화려하게 건설되었다. 크게 정궁, 이궁, 행궁, 별관으로 나눈다. 정궁은 수도중앙의 기본궁(경복궁)이며, 이궁은 별궁의 기능을 수행하는 궁(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이며, 행궁은 왕이 일정 기간씩 머무르는 지방에 있는 궁(수원 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강화도 행궁, 평양 행궁 등)이며, 별관은 지방에 행차할 때 왕실에서 임시로 이용하는 건물(충주별관, 이주별관, 나주별관)이다.

궁궐 본전을 중심으로 한 궁궐 전체 지역의 배치계획과 건물의 기능은 조선 특유의 독자성을 지니며 최고 지배층인 왕족과 사대부 계층이 사용한 건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최고 수준의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창경궁 명정전

이중으로 석단을 쌓아 올린 중앙에 돌계단을 두었으며, 그위에 다시 장대석의 낮은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윗면에는 벽돌을 깔고 원형의 주춧돌을 놓았다. 건물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외 3출목, 내 4출목의 다포계 공포를 받쳤는데 쇠서의 곡선은 비교적 강직하고 보머리 등의 형태는 삼각형을 이룬 삼분두형으로 조선 초기에서 볼 수 있는 세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 창경궁 명정전 정면도 (자료 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 창경궁 명정전 측면도 (자료 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 창경궁 명정전 종단면도 (자료 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 창경궁 명정전 횡단면도 (자료 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 창경궁 명정전 암시도 (자료 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 성곽

우리나라는 전체면적의 약 7할이 산지로 되어 있어 일정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예부터 자연적·인공적 외침에 대비하며 스스로의 거주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공적인 구조물을 축조하여 왔다. 성곽이란 군사적, 행정적인 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거주하면서 일정한 공동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건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화성 팔달문과 오성지문

● 화성 팔달문과 오성지문 (자료 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임진왜란의 경험과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지어진 화성은 정조 18년(1794)에 기공하여 2년만에 완공되었다. 가장 발달된 축성법을 쓰고 있으며 시공에서도 기중기, 녹로 등의 여러 가지 시공 기계를 사용하였으며 기와, 벽돌 등을 개량된 방법으로 제작하는 등 획기적이고 계획적인 시공을 시도했으며 그 상세한 내용은 「화성성역의 궤도설」에 기록되어 있다.

석축과 벽돌을 적절히 조화시킨 화성은 평지와 배면의 팔달산에 둘러싸인 지형의 고저와 굴곡에 맞추어 축성되었다. 북쪽에 장안문, 남쪽에 팔달문의 두 대문을 두고 그 밖으로는 아담한 옹성을쌓았다. 동서에 창룡문, 화서문을 두고, 암·수문과 기타 시설을 조성하였으며 전체 성벽 둘레는 8.36km에 이른다.

도성 남쪽에 위치한 팔달문은 문루의 하층이 심주춧돌 위에 원주석을 기초로 하여 평주를 세웠으며 이 평주는 민흘림 기둥이다.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짜서 돌리고 주두위에 2제공의 공포를 짰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으로 되어 있으며 외부는 수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으로 구성하는 조선후기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 평양 보통문

평양 성곽의 내성은 태종 6년에 개축한 것으로 동남쪽 전면에 대동강을 두고, 서북쪽으로는 금수산, 창랑산 산기슭을 따라 연속되는 성벽과 강면에 비친 누정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조선시대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통문은 외형이 정면 세칸, 측면 세칸으로 되어 있으며, 중층 우진각 지붕을 가진 건물인데 건립연대는 건물 수리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1473년을 개건시기로 보고 있다. 공포는 내외 모두 2출목이나 위층은 두공위에 첨자가 세토막으로 겹쳐있다.

아래층은 두공위에 제공만 위층과 같이 처리하고 툇보 끝을 받치고

● 평양 보통문 (자료 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있다.

■ 불교건축

근본적으로 이 구조법은 고주와 평주 사이의 횡보위에 짧은 기둥을 올리고 위층을 구성하는 불탑의 구성 수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더욱이 내부 가구가 구조적 역할을 하고, 외부 가구는 입면상 필요에 의해 만드는 조선 특유의 축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원 석굴 암자 불탑 사원 석굴 암자 불탑 사원건축은 한국건축의 대표격이며,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식이 존재했으며, 지역차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더욱 복잡한 것은 종파별로 독특한 건축형식을 가지고 있었고, 도시와 지방의 형식, 평지와 산지의 형식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원건축의 형식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불가능하다.

사원은 불전들을 위주로한 예배소의 기능과 승방을 위주로한 수도원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고려 때는 사회적 기능을 가진 원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신라와 고려기에는 예배소의 기능이 강하였고, 억불의 조선조에는 수도원의 기능이 강하였다. 사원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전각들이 있고, 이들은 불교의 교리에 따라 불전과 보살전 신중전들로 위계를 달리한다. 국내의 석굴사원은 근 백여개에 이른다. 대부분은 자연 동굴을 그대로 혹은 약간의 인공을 가한 소규모의 석굴로 인도나 중국의 석굴군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한국석굴을 대표하는 것은 토함산 석굴암을 위시한 석실건축들이다. 석재를 이용하여 내부공간을 만들고 이를 흙으로 덮어 인공적인 굴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는 석굴이 아니라 석실이라는 지적이 있다. 어찌되었던 우리 고유의 위대한 창작품들이다. 토함산것 말고도 중원 미륵대원의 반석실은 뛰어난 석조건축의 수준을 보여준다.

암자는 본절에 딸린 소규모의 수도원이다. 따라서 규모도 작고 극히 필요한 기능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도원 특유의 절제성과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암자도 조성되었다. 은해사에 딸린 운부암이나 백흥암 거조암은 암자라기 보다는 독립된 사찰이다. 탑이 조각이냐 건축이냐 논란이 있다. 석탑의 경우는 건축적 조각이다. 신라시대에 목조건축이 하나도 없는 지금, 당시의 건축을 유추하게 하는 흔적으로 석탑을 들 수 있다. 석탑 양식 형성의 역사도 매우 복잡하다. 백제계의 목탑과 신라계의 전탑이 석탑으로 전환 결합되는 과정을 통해 건축의 양식사적 전개과정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 사찰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의 승려 '눈도'에 의해서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졌으며 375년 국내성에 이불란사와 초무사가 창건된 것을 시작으로 6세기에 들어서 한반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일본에까지 전해져 동양 전역에 불교가 정착되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는 신앙의 대상을 모시며 제반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차츰 건축물과 내외부 공간의 구성에 일정한 법식이 생겨 하나의 전형을 이루게 되었다. 가람이란 인도어의 'Sangalama'로 한문으로는 승가람마로 표현되며 승가란 중, 람마란 동안의 뜻으로 이는 중원, 즉 여러 승려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곳으로서 이것을 절, 즉 가람이라 부른다.

□ 부석사
[ 자료출처 : 한국 미술문화의 이해 ]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조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한 사찰로 창건 후에는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만세루, 범종각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후일 중창하여 조성하고, 그위에 건물을 배치한 산지 사찰로서, 범종각, 안양루 등을 지나 본전인 무량수전에 이르게 된다. 특히 범종루는 본전을 향하는 방향으로 맞배지붕의 형태이고 진입되는 방향으로는 팔작지붕을 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676년(신라 문무왕 16)에 의상조사가 왕명에 의해 창건한 사찰로 창건 후에는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만세루, 범종각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후일 중창하여 조성하고, 그위에 건물을 배치한 산지 사찰로서, 범종각, 안양루 등을 지나 본전인 무량수전에 이르게 된다. 특히 범종루는 본전을 향하는 방향으로 맞배지붕의 형태이고 진입되는 방향으로는 팔작지붕을 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자료출처 : 한국 전통목조건축도집 ]





□ 사찰의 문
[ 자료출처 : 한국 문화재 총설 ]

* 일주문은 절의 입구 좌우에 두 기둥을 세우고 위에 지붕을 덮은 대문을 말한다.

* 사천왕문은 절에서 좌우간에 사천왕상을 안치한 대문으로 사천왕은 불교, 누이산의 중턱에 있는 주신을 말한다.


□ 누각
* 누각은 지상 2층으로 지은 집을 말한다.

 

■ 석불사

지금의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제 35대, 742-764) 10년 부터 짓기 시작한 석불사이다. 석불사는 신라 토함산에 있으며 토함산은 신라 영산이었고,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내는 다섯 뫼 중의 하나인 동악이었다.

신라에선 동서남북 중앙 다섯 영산에 제사를 올리면서 국가 비보에 감사하였고 그 중에서도 동악을 특히 중요시했다. 토함산에 부처의 나라 불국사와 왕실지원을 위한 석불사를 지었던 것도 그런 영산의 도움을 얻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덕왕은 그 시기에 불국사와 석불사를 짓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사정이 있었고, 마침내 시중 벼슬을 지낸 김대정에게 위촉해서 경영하도록 하였고 서기 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다.

본존이 앉은 금당 내부는 원형 평면이며 지름은 24척, 본존 대좌의 지름은 12척으로 설정되어 있다. 금당 내부 본존상 둘레에는 입구로부터 두 사람의 천부상, 두분의 보살, 열명의 제자와 십일연관음, 합해서 15상이 차례로 4척 너비의 판석에 부조되어 있다. 또한 석실금당은 방형, 8각, 원형의 만남이 의도되어 있다.

석실의 천장을 살펴보면 정상부의 연화석 둘레에 멍에 돌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들처럼 360도 전 방향에 자리잡고 있다. 이 멍에 돌들은 천장 판석이 앞으로 떨어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구실을 하고 있는데, 멍에 돌은 판석 뒤에 저 기초부터 따라 올라온 적심석과 서로 묶이면서 고정되어 있다. 또한 빛은 전실에 떨어진 볕이 바닥과 벽면에 반사되면서 본존상으로 집중되었다고 보여진다.

십일면 관세음보살 ( 자료출처 : 신영훈 '석불사 불국사', 조선일보사,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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