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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사랑 필사본

달콤한 포도주 신앙이 고난의 십자가를 새까맣게 잊게 한다

작성자참빛사랑|작성시간26.06.13|조회수65 목록 댓글 6

 

 

 

우리 개신교인은

연단과 고난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는 달콤한 포도주의 종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취해서 기분 좋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이 포도주를 마음껏 들이킨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 아 4 : 16

 

 

 

교회에 가는 이유

 

 

나는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와 향기를 선물하시기를

당신은 정말로 원합니까?"

 

이 질문에 "!"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즉시 그에게 이렇게 조언할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생활의 습관을 뿌리 깊게 내리십시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에서는

꽃이 피지 않고 열매도 맺히지 않는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 잠 12 : 12

 

 

아름다운 향기로써  당신을 유혹하는 멋진 정원이 보이는가?

 

그런 정원이 있다면

아마 그 정원의 나무들은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뿌리가 깊이 박히고 줄기가 튼튼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꽃이 자라서 활짝 핀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를 뽑아버리면

꽃은 하루가 못 가서 태양의 뜨거운 열에 말라 죽을 것이다.

 

정원의 열매와 향기와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이 생길 때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그런 관심을 훗날로 미뤄버린다.

 

내가 볼 때  오늘날 성도들은

마치 온종일 놀다가 넘어진 다음에  울면서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다.

 

다시 말해서,

아이가 위로를 받기 위해 엄마를 찾듯이

성도들이 교회를 찾는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위로 받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위로가 신앙의 주된 목적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평안 숭배라는 질병에 걸려 있다.

 

우리는 생각의 평안, 마음의 평안

그리고 영혼의 평안을 찾아 헤맨다.

 

우리는 긴장을 풀고 편하게 살기를 원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시기를 바란다.

 

기독교가 이렇게 시시껄렁해졌다!

 

 

예수께 나오지 않으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든다.

 

엄마 품에 안기는 것처럼 편안하게 생활하며

귀여움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에

교회로 발걸음을 힘겹게 옮긴다.

 

이것이 현재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친구여!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음을 기억하라.

 

그것에는 뿌리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

 

 

내가 읽은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모두 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영적 체험을 허락하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그들은 진리의 길, 성경의 길을 따라 행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의 열매를 맺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몸을 멸할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을 멸할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원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은 죽자마자 하나님과 함께 거했다.

 

원수들이 성도의 사체(死體)

마치 오물(汚物)처럼 밖으로 내던져 버렸지만,

성도의 영혼은 즉시 하나님나라로 들려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끝없이 위로 받기를 원하고 늘 마음 편한 것을 추구한다.

긴장을 풀고 속 편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이런 삶이 우리가 사는 이 악한 시대에

바람직한 삶의 본보기로 제시되어 왔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53:3) 분이시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우리는 슬픔과 고통이 마치 화살처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관통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순교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또한 우리는 기독교 초기의 처음 두 세대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은 감옥에서 극도로 쇠약해져서 굶어죽거나

절벽에서 던져졌으며 사자의 밥이 되었다.

 

원수들은 그들을 자루에 넣어 죽였고, 바다에 던져 죽였다.

 

 

그렇다!

초대교회의 훌륭한 성도들이 대부분 마음이 불편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덮어 두고 싶어 한다.

 

사실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가 편히 쉬러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러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죄와 불법에 대항하여 무섭게 전개되는 싸움에서

하나님의 군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싸워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싸움은 사람들에 맞서는 싸움이 아니라

죄와 허물과 악한 영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영적 싸움에 임한 그들에게는 수없는 고뇌와 상심傷心),

고통스러운 상처, 끝없이 흐르는 눈물 그리고 죽음이 뒤따랐다.

 

그러나 안락한 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이것을 찾아야 한다.

 

물질은 넘치지만 영적으로 빈한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안락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름길은 없다

 

 

우리 개신교인은 연단과 고난이라는 것이 있다

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오늘날 우리의 경제 제도는

과거에 비해 풍족한 삶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우리의 정치 체제에서는

()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원하는 대로 믿을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믿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경제 제도와 정치 체제에 살면서

우리는 달콤한 포도주의 종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취해서 기분 좋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이 포도주를 마음껏 들이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분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 갈 5 : 22-23 

 

라는 성령의 열매를 주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 게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엡 4 : 31 - 32

 

그러면서 바울은 이러한 삶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 행하기를 원하신다고 분명히 밝혔다.

 

 

하나님께서는  구속(救贖)함 받은 자가 

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이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물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면,

아마도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인간의 문명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아버지의 계획도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생기면,

문명이 안전하게 존속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지름길로 가서 기독교의 열매를 얻으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원한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무릇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나무에는

반드시 줄기가 있고, 줄기 아래에는 뿌리가 있다.

 

그러므로 꽃을 보고 열매를 따기를 원하는 사람은

미리미리 뿌리와 줄기를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한다.

 

공을 들이지 않고도 마술 따위를 부려

꽃과 열매와 향기를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긴장을 풀고 안락하고 게으르게 사는 삶보다

더 멋진 삶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권위 있게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 엡 5 : 1 - 2

 

 

바울의 교훈에 따라 살 때

당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난다.

 

당신의 이웃은 당신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이제 나는 아주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뿌리라고 여겨지는 몇 가지를 언급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 한 뿌리에서

깊은 영성의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성실과 충성

 

 

우선 언급하고 싶은 신령한 뿌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를 향한 성실과 충성이다.

 

자기 교파의 성실성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많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뜻과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께 성실한 가' 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러한 성실이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가 나타난다.

 

(, Lord)와 구주(救主, Savior)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성실하고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성도가

교회마다 적어도 몇 명씩은 있어야 한다.

 

 

성실은 충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충성된 자에게 하나님의 보답이 주어진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에 관한 비유로,

먼 나라에 갔다 돌아온 주인과 그의 충성스러운 종의 이야기를 드셨다.

 

주인은 돌아와서 그의 종에게

 

충성된 종아

네가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 25: 21)

 

라고 말했다.

 

물론 '충성'이 귀에 솔깃하고 흥미진진한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단순히 충성하는 것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멋진 재능의 일을 맡고 싶어 한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개인의 명성(名聲)을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어쩌면) 신문에 이름을 낼 수 있는 일을 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직 한 분에게만 인정받기를 원하는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날'에 주께

"충성된 종아 네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라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여 꾸준히 열매 맺는 삶을 사는

하나님 자녀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성실과 충성의 뿌리이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충성심이 필요하다고

예수께서 늘 강조하셨음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노아는 당대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만일 늙은 노아가 야구팬이었거나 일찍 은퇴를 했거나

하나님의 일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 중요시했다면,

방주도 없고 인류가 존속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방랑하던 중에 우라늄이나 금을 발견해서

팔레스타인행()을 포기했다면,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실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하지 못했다면,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여

자신을 위해 작은 도시를 만들고 그곳의 시장市長)이 되어

그 땅의 기름진 음식에 도취되어 살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겠는가?

 

 

모세는 그의 시대에 충성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의 시대에 충성스럽게 봉사했다는 것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증거한다.

 

모세는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 : 24-2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을까?

 

주님을 둘러싼 온 세상이 그분에게 위협을 가했다.

사탄은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그분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천하를 다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 충성했고, 우리에게 성실함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께 충성해야 한다!

 

충성은 영성을 생산하는 아주 놀라운 뿌리이다.

이 뿌리를 통해 신령한 열매가 많이 열린다.

 

 

 

정직과 양선

 

 

성경에는 성도들의 순전한 정직과 양선이 강조되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깊이 살피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영적 뿌리이다.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는 정직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핀 향기로운 꽃과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정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정직은 영적으로 가꾸고 영양분을 공급한 후에 얻을 수 있는

꽃이요 향기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정직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간증할 때에도 사실을 과장하여 말하는 죄를 범한다.

 

목회자들과 복음전도자들 중에도

그들의 집회의 성과와 참석인원을 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농담으로 받아넘기며,

그들이 복음전도를 위해 그렇게 과장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그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정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든 그 밖의 어디에서든

거짓말은 그것의 아비 사탄에게서 나온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을 돕기 위해

소위 '경건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진실을 말하여 사탄을 부끄럽게 하라" 라는 격언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끼리 어울릴 때에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고 투명하다는 평판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직은

다른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낳는  좋은 뿌리이기 때문이다.

 

 

초기 퀘이커파 신자들의 삶의 특징이

결코 거짓과 타협하지 않는 진실성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사실을 과장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둑질하지 않았고 아첨하지 않았다.

 

 

어떤 역사학자는 그들의 삶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퀘이커파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처럼 살기를 고집함으로써

기독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영국에서 그들은 종종 핍박을 받았고,

일부는 감옥에서 쇠약해져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면서

높임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정직한 삶을 사는

퀘이커파 신자들은 이상한 사람취급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대로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선한 사람이 되려고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성경에는 선한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야베스이다.

 

구약의 두 구절에서만 등장하지만(대상 4:9-10) 그는 선한 삶을 살았다.

 

반면에 사울과 아합은   권력의 정상에 올라서

당대에는 위대하고 핵심적인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선한 사람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위대함보다는 선함을 강조하셨다 고

성경은 분명히 밝힌다.

 

 

본질적으로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악인(惡人) 을 선인(善人)으로 만드는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다.

 

그분은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를 다 씻어주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우리를 성부께 인도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선하게 만들기 위해 죽으셨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말이 아니라

성경을 따르는 말이다.

 

이 땅에 살았던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는 선한 사람이었고 성령충만했다" 라고 평가 받는다면,

그것은 최고의 찬사이다.

 

 

 

거룩한 삶의 습관들

 

 

그렇다면 이제 이 모든 문제의 뿌리를 짚어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삶의 습관들을  규칙적으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믿을 만하고 충성스럽고  그리스도를 닮은

이타적(利他的)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성령님께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가?

 

 

들판의 곡식은 때에 따라 규칙적으로 알곡을 낸다.

각종 동물도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해가 뜨고 지는 데서, 달의 모양이 때에 따라 바뀌는 데서

자연의 규칙성이 나타난다.

 

 

구약의 계시에서도  규칙성이 잘 드러난다.

 

성전에 들어가려는 구약의 제사장은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성전의 모든 물건은 규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규칙성과 질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정하셨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많은 교인이

"나는 그리스도와 올바른 교리를 믿고 많은 영적 체험을 했다"

라고 말한 후에는 망가져서 변덕스러운 신앙생활을 한다.

 

,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기도하고,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헌금하고,

날씨가 좋아야 교회에 나간다.

 

요컨대  그들의 신앙생활에는 규칙성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예배하러 나와도

그들에게서 성령의 달콤한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성령의 향기가 없는 까닭은

그들이 뿌리를 소홀히 하여 꽃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규칙성이라는 뿌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뿌리가 사라지고 꽃이 즉시 죽어버린다.

 

 

혹시 누군가

 

"나는 의무로부터 해방되고

규칙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해야겠다.

이런 사람은 당장 성경을 덮고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며,

잘못된 회중(會衆) 속에 앉아있는 것이며,

잘못된 관리 시스템에 의해 인도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거룩한 습관들을 규칙적으로 익히고

날마다 그것에 따라 행하기를 원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습관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거룩한 습관을 따라 행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실 뿐이다.

 

 

 

세상에서의 신뢰성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이런 규칙성과 질서는

신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뢰성의 좋은 예도 역시 자연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수확하지 밀이나 옥수수를 수확하지 않는다.

 

암탉의 날개 아래 달걀을 놓으면 병아리가 나오지

꿩의 새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자연의 법칙은 그 종류대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다.

 

자연은 모두 신뢰할 만하다.

인간만 빼고 말이다.

 

 

물론 인간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신뢰성이 존재한다.

 

당신의 차가 몇 번 고장 나면 당신은 그것을 처분하는데,

그 이유는 믿을 만한 다른 차를 원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잘 알겠지만, 냉장고 또는 기타 냉동장치는 신뢰할 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안에 넣어 둔 음식물이 상하게 된다.

 

사회의 금융제도는 우리에게 신뢰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혼란이 생긴다.

 

만일 1달러 지폐가 시카고에서는 1달러의 가치를,

밀워키에서는 75센트의 가치를,

세인트루이스와 디트로이트에서는 32센트의 가치를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지폐라면 전혀 통용되지 못할 것이다.

 

신뢰성이 전제되어야 사회가 돌아간다.

우편이나 우유 배달도 그렇고,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에서도 신뢰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신뢰성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에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 신뢰감을 주는 행동을 한다.

 

우유 배달부가 매일 아침 방문하는 것은

당신에게 자원 봉사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급료를 받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편집배원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를 받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노동한 대가의 품삯을 받으려는 이유 때문이다!

 

자동차 제조업자가 신뢰감을 주는 차를 생산하는 것은

당신에게 차를 팔기 위함이다.

믿을 만한 차가 아니면 당신이 구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의 신뢰성

 

 

세상의 신뢰성에는 이토록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세상에는 신뢰성이 살아 있다.

 

하지만 정작 교회에서는 신뢰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하나님의 제단에서만 사람들을 신뢰 할 수 없다

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성소에서 발견하는 것이 왜 그토록 힘든가?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신뢰성이라는 뿌리가 말라비틀어졌다.

신뢰성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충성스러운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충성스럽지 못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전자(前者)는 교회에서 신뢰감을 줄 정도로 열심을 보이기 때문에 눈에 확 띈다.

그런 그들을 보고 후자(後者)

그들이 교회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열심을 보이는 것이라며 비난한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이런 질문은 사실 새롭거나 독창적이지도 않다.

 

지난 1년 동안 당신의 경건생활, 당신의 영적 습관, 당신의 교회 출석,

당신의 헌금생활 그리고 당신의 신뢰성의 모범은 어떠했는가?

 

당신 자신에게 솔직해져라.

 

그리고 자신에게

'이 교회의 모든 사람이 꼭 나만큼만 신뢰성을 보였다면,

지금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물어보라.

 

당신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직한 사람들로 만들어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작은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면, 그것을 하라.

 

슬프게도, 멋지고 놀라운 일을 하려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직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당신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탁월한 재능을 요구하는 화려한 일,

즉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가?

 

내가 볼 때 그런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설사 당신이 그런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용두사미(龍頭蛇尾),

아무 의미 없는 헛된 일, 지속성이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을 할 때 묵묵히 신뢰성 있게 하는 사람이 왜 없는가?

 

아름다운 꽃은 보기에 좋고 냄새 맡기에 향기롭다.

 

그러나 그런 꽃은 거저 피지 않는다.

그런 꽃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누군가 오랜 기간 동안 정원에서

흙 위에 무릎을 꿇고 열심히 작업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땅을 파고 비료를 주고 날씨를 살피고

건조할 때에는 물을 주면서 뿌리를 가꾸는 작업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는 신뢰성이다.

베고니아 줄기가 없으면 베고니아가 없듯이

(원산지가 아메리카이며 15~30센티미터까지 자란다),

 

신뢰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영성도 없다.

 

 

 

시간 엄수

 

 

신뢰성에 대한 말이 나오니

시간 엄수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시간을 칼같이 지켜야 한다.

 

시간 엄수에 실패하면 철도 사고를 유발하고 배를 침몰시키고

기업을 부도낼 수도 있다.

 

이렇게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는 시간 엄수의 실패가

하나님의 제단에서는 너그러이 용납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시간 엄수의 실패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왜 교회에서는 들리지 않는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토록 시간을 지키지 않는 교인들이

다른 경우에도 그렇게 한다면,

기업이 부도나고 가정경제가 파탄나고 건강이 쇠약해질 것이다.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주일학교 교사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교사들이 주일 아침에 제시간에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하느라고 머리가 허옇게 센 주일학교 부장들이 많다.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 간에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아름다운 모습부터 보여라.

 

 

교회의 일은 거룩하다.

교회와 주일학교는 영원히 살 영혼들을 양육하는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곳이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고 인격을 성숙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

 

오랜 세월 수없이 보고 들은 결과 나는,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경건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시간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그토록 자기절제가 안 되고 그토록 이기적이고

그토록 타인(他人)의 시간에 대해 무감각하다면,

영성도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경건하게 될 수 없다.

 

 

돌발 상황에 대해서는 물론 변명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급작스러운 사고 때문에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그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각을 자꾸 반복해서 완전히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의 경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는 지위가 높으니까 지각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사람은 거짓과 기만의 죄를 범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제 시간에 오겠다고 말하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지키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장미는 나무 없이 꽃을 피울 수 없다.

시간 엄수는 장미꽃을 피우는 나무와 같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피는 사랑과 충성과 희락과 평안은 아름다운 꽃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성품은 향기롭고,

거룩한 사람의 미소는 따뜻하다.

 

하지만 이런 것은 우연히 생기지 않고,

응석받이 기르듯이 오냐오냐해서 생기지도 않는다.

 

어려운 일을 이겨내고 목에 멍에를 메는 사람은 영적인 꽃을 피운다.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의 멍에를 자진해서 메겠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말고 선

하고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자.

 

위대한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하라!

 

우리는  순종과 기도와 말씀 묵상과 자기포기(自己)의 뿌리에서 

선한 것이 자란다는 원리를 기억하면서

선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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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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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주는 나의목자 | 작성시간 26.06.14 아멘
  • 작성자끝까지 | 작성시간 26.06.14 아멘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
  • 작성자j-sarang | 작성시간 26.06.14 아멘
  • 작성자han3 | 작성시간 26.06.14 아멘~!!
  • 작성자시든들풀 | 작성시간 26.06.14 아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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