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쁨
오, 하나님!
날마다의 삶에서 당신의 임재를 맛볼 때
찬양과 경외의 노래가 우리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어느 날 하루 당신을 경배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날마다, 온종일 당신을 경배하는 것은
당신을 알 때 얻게 되는 큰 기쁨입니다.
어떤 사람이 찰스 스펄전에게
"동일한 설교를 두 번 이상 하신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그는
“내가 나무를 벤 다음에 도끼를 버리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와 동일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할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그에 대한 내 소신은 이렇다.
내 설교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동일한 설교라도 반복해서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그것이 내 설교임을 밝히는 감사의 말조차 없이
내 설교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허락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메시지 자체가 아니겠는가?
주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주님의 무기는
누구든지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물론, 갑옷은 제외시켜야 할 것이다.
사울의 갑옷이 다윗에게 맞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나는 내 갑옷이 아니라면 그 누구의 갑옷도 입지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삶과 대면하라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아는 일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생은 하찮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중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 마음에 힘이 되어준다.
인생이 진지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까?",
'어떻게 하면 난파선 같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구해낼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영혼을 재앙에서 구할까?'
하는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한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행 2:40)
라고 권했다.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했으므로
나 같은 사람도 오늘날 비록 작은 소리로나마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자기의 영혼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 나는 믿는다.
이런 이들은 점점 다가오고 있는
세상의 멸망에서 구원 받기를 원한다.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다.
물론 내가 완전하기에 조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아주 오랜 세월 성경을 사랑하고 실천해온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신앙적 유익을 전하고 싶다
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으로서 조언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것이 있다.
이렇게 조언을 주려는 나에게
누군가 물질적 이익을 취하려고 접근한다면,
그가 아무리 말을 잘한다고 해도
나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을 것이고
그를 존경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그렇게 영적인 일이 못 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사람의 말에는
내 귀를 틀어막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이용할 생각 없이
그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아무리 엄한 말이라고 해도 달게 들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인식을 배우라
우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고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구해내려고 한다면
날마다의 삶에서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하나님 인식이 성경의 하나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 인식을 가진 사람은 날마다의 삶에서 그분을 높일 것이다).
내가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여러 해 동안 기도하며 관찰한 바에 의하면,
오늘날 종교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의 뿌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하나님이 충분히 크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아무리 자주 언급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 일은 우리의 능력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상상력으로 하나님을 만들어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이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모습을 그대로 보면 된다.
나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창 1:1)
라고 믿는다.
물론 성경이 워낙 장대(張大)한 책이기 때문에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 구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이유는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의 기초이시다.
그분이 전부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 분을 크신 하나님으로 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사람들은 더 작게 보일 것이다.
이 시대는 잘났다는 사람들이 크게 보이는 시대다.
그들이 크게 보이면 하나님은 자꾸 작은 분이 되신다.
교회에서 각종 집회를 열어도
그곳에 그분이 보이시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눈에는 그분의 종들만 보인다.
이것은 비극이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영웅숭배가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 걱정 된다.
메시지 전달자를 자꾸 크게 만드니까
메시지가 작아진다.
원래는 메시지의 그늘에 가려
메시지 전달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목적에 따라 일하시며
그분의 계획들을 집행하신다.
그분의 말씀을 제한하고 그분에게 지시하며
그분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려라
성경에서 가장 놀랍고 강력한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겔 20: 3)
라는 구절이다.
이 말씀이 선포되면 다른 잡다한 말들은 필요 없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
신경(信經)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과 공의와 선하심과 진리에 있어서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적인 영이시다.
그분의 위엄을 깊이 묵상하면
인간의 모든 달변은 깊은 침묵으로 빠져든다.
우리가 ‘두려운 신비’ 라고 부르는
그분에게 합당한 찬양을 드리기에는
인간의 달변이 턱없이 부족하다.
인간의 언어는
우리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와 높으심을
완전히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역사 속에서 많은 언어술사들이 그분을 높이고자 애썼지만,
언어는 그분의 모든 경이와 위엄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찬송가 작가들이 그분의 위엄과 경이를 잘 드러냈고
또한 우리도 그들처럼 하려고 애쓰지만,
오직 그분께 속한 영광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아주 유창하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내 기도가 유창할 때 그 기도에서 얻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때로는 나의 달변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생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감정들이 언어에 다 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표현을 불허하는 위엄과 경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셰익스피어를 열심히 읽은 나 같은 사람이 볼 때도,
하나님께 합당한 말과 표현으로 그분의 위엄을 명확히 표현하는 능력은
그에게도 없었다.
우리가 무슨 말을 사용하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든
우리의 하나님이 더 크시다.
내가 그분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말이 오히려 방해가 되어 그냥 침묵할 때도 있다.
그러면 오히려 침묵 속에서
그분께 합당한 방법으로 그분을 점점 더 깊이 느끼고 깨닫게 된다.
셰익스피어, 프랜시스 베이컨, 헨리 소로우 그리고 존 밀턴..
이런 탁월한 사람들의 명단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사람들의 재능과 능력이 내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그분께 충분히 표현해 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분의 온전한 계시를 통해 그분을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경배의 불충분함을 깊이 느끼게 된다.
자신의 경배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존전에 나아간 경험이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엎드려 그분을 경배할 때,
거룩한 분 앞에서 나는 부족함을 느낀다.
나 같이 불완전하고 제한된 존재가
거룩하고 무한한 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을
그분께 드릴 수 있을까?
예배에서 육신적 즐거움을 제하라
그렇다면 그분이 받으시기에 마땅한 것, 그분께 합당한 것을
내 경배를 통해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 원인은 우리의 육신이다.
그분은 육신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지 않으신다.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어보아도
육신이 항상 하나님의 뜻과 충돌한다는 진리를 보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의 삶에서 육신을 처리해야 한다.
육신의 그 어떤 부분도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육신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연예오락이다.
세상은 연예오락을 갈고 닦아서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제는 이것이 문화의 구석구석까지 퍼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
게다가 우리는 연예오락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연으로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연을 보고 즐거워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특히 육신으로는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즐겁게 해주시지 않으며,
나를 통해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시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라고 여겨지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예배가 아니다.
연예오락은 기껏해야 육신의 표현일 뿐이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지니까
하나님께도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부분은
단순히 종교적 연예 오락일 뿐이다.
예배가 연예오락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예배와 연예오락이 동의어가 아니지만
현재 복음주의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주일 아침은
종교음악을 통해 즐기는 오락시간이 되어버렸고,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에 합당한 것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이시다.
하지만 연예오락은 그분의 본성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사람은
그분의 조건에 따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그분을 경배하려고 한다면
그분의 조건에 따라 경배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가장 어려운 일은
지금의 교회에서 육신을 제거하는 일일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육신적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교인들은 육신의 족쇄에서 풀려나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간단하게나마 언급하자면,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예배는
오직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재능은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에 부족하다.
육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그분을 경배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이 천국에 도착했는데
그곳의 황금 길에서
연예오락이 털끝만큼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찌하려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천국의 황금 길은 브로드웨이가 아니다.
천국은 연예 오락의 장소가 아니라 경배의 장소이다.
물론 경배 받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나는 그분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어떤 것이고
그렇지 못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진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삶으로 하나님을 높이라
하나님을 알고
또 그분께 합당한 예배와 사역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내 행위의 모든 부분에서 그분을 높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육신은 그분을 높일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그분을 높이려면
육신을 처리해야 한다.
그분이 높임을 받지 못하시는 부분이 내 삶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분께 합당한 방법으로 그분을 높이는 것이
내 삶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육신을 처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육신이 처리되어야
내가 그분께 합당한 방법으로 그분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그분의 거룩함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우리 삶에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분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크신 분이 되신다.
만일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이 그분보다 크다면,
단언하건대 그분이 우리 삶 안에 계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목표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자기를 훈련시켜야 한다.
육신을 억제하라
이와 관련되어 사용되는 단어는
육신을 ‘억제하다’ (mortify) 라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육신에게 등을 돌리고
우리의 육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라고 말했다.
이것은 내 삶의 모든 것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나는 주일 아침에는 이런 모습이었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릴 때에는 이런 사람이었다가
다른 이들 틈에 섞여 있을 때에는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육신을 억제했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분을 품고 있고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여전히 화를 잘 낸다.
우리가 육신을 억제하지 않으면 육신이 우리를 파괴할 것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증언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참석했던 집회 중 기쁨이 넘쳤던 집회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이로운 능력 가운데 임재하셨기 때문에
참석자들이 두려워서 꼼짝도 못했다.
때로 그분의 임재가 너무나 강하게 참석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에
속삭이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분이 정말로 그 장소에 계셨던 것이다.
이런 체험을 자주하는 교회들이 더 많이 생긴다면
연예오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신속히 사라질 것이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 임재의 나타남에 필적하는 연예오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숙해지면
종교의 장난감들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된다.
성숙한 신자에게는 종교적 장난감들이 더 이상 만족을 줄 수 없으며,
오직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임재만이 만족을 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화려한 볼거리가 중요하지 않다.
재미있는 것들에 자극받아 기분이 좋아지고 기운이 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지금은 내가 힘이 솟아서 펄쩍 펄쩍 뛴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있고 그분이 내게 나타나신다면
인위적인 것은 전혀 없게 된다.
나는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분의 임재를 연습할 때 얻게 되는 체험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육신을 처리해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급진적이라고 비판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비판에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약간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급진적인 사람이 되는 게 두렵지 않다.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체험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내 몇 가지 조언에 귀를 기울여보라.
집으로 가서 연예오락을 즐기기 위한 온갖 기기들의 전원코드를 뽑아라.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전화기도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전화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남으시도록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는 때도 필요하다.
나는 내게 그분만이 계신 상황을 오히려 좋아한다.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많이 알 필요도 없고,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잔뜩 갖고 있을 필요도 없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 (유 1:3) 을 붙들면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 힘을 쏟으려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로렌스 형제의 표현이다)
생활필수품만 있어도 충분하다.
섬김의 정신을 기르라
이제까지 다뤄온 주제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섬기는 정신’ 을 기르라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세대를 섬긴 후에 잠들었다.
자기의 세대를 섬기는 일을 다 마치기 전에
죽을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주변 세상이 내 봉사 때문에 내게 빚을 지고 있다
는 확신을 가슴에 품고 임종을 맞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소원이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들은 그들의 부모님과 유모
그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한 모든 이에게 빚을 졌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과 싸워 이긴 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찰스 웨슬리가 만든 찬송가를 거의 언제나 부르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신앙의 전당'(殿堂)에 들어가 믿음의 위인들을 살펴보라.
그들이 세상에 올 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지만,
세상을 떠날 때에는 온 세상이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들에게 '섬기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깨달을 때 생긴다.
당신이 지난 세대를 섬길 수는 없다.
이미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는 간접적으로만 섬길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대는 얼마든지 섬길 수 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스펀지 노릇을 하고 있다.
흡수하고 흡수하고 또 흡수한다.
그들의 삶은 빨아들이기만 하고 내놓지를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빚을 지도록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삶을 단순화하고 섬기는 정신을 키워 나간다면,
지금 이 세대와 앞으로 올 세대들이 우리에게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주님, 당신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
당신의 능력의 팔을 드러내소서
죽은 자들을 깨우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당신의 백성이 듣게 하소서
주님, 당신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
이 죽음의 잠에서 깨우소서
당신의 전능한 숨결을 불어
연기 내며 꺼져가는 불을 이제 다시 살리소서
주님, 당신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
당신을 향해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게 하소서
우리의 영들이 생명의 떡에 굶주리게 하소서
주님, 당신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
당신의 귀한 이름을 높이소서
당신과 당신의 것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성령으로 불을 붙이소서
주님, 당신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
오순절 소나기를 내려주소서
영광은 오로지 당신께 돌아가게 하시고
주여, 복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소서
- 앨버트 미들레인 (Albert Midlane, 1825~1909)
<주님, 당신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