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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에곤쉴레

작성자미샘|작성시간20.11.21|조회수1,233 목록 댓글 0

에곤 쉴레(1890-1918)

오스트리아 화가인 에곤 쉴레는 왜곡된 신체, 쓸쓸한 풍경 등으로 세기말적 불안감을 표현했는데 이는 현대인의 표상처럼 느껴져 보는 사람에게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00여점에 이르는 자화상을 통해 그의 자기 성찰적 성향을 알 수 있다. 그 중 대다수가 누드인데 비비 꼬이거나 위축된 모습이 사회라는 구조의 한쪽 구석에서 숨죽인 채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다수의 이중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는 프로이드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8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했지만 2300 여점의 작품, 또 수많은 시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예술가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위대한 화가는 인물을 그리며
나는 인체에서 발산하는 빛을 그린다.
그래서 에로틱한 예술 작품 역시 신성하며
내 작품은 신전과 같은 건물에 전시돼야 한다.”

그의 예언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또 낯선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역장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쉴레는 기차를 좋아했고 기차 그림을 즐겨 그렸다.
1905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외삼촌이 그의 가정을 돌보며 공부에는 취미가 없지만 그림에 소질을 보인 쉴레를 1906년 비엔나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관습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학교의 교수들보다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분리파 운동을 이끌고 있던 클림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물결이 이는 물속의 범선들(1907), 슈타이어마르크 주립박물관>


<클로스터노이부르크, 벌거벗은 나무들과 집들(1907), 레오폴드미술관>


<게르티 쉴레의 초상(1909), MoMA>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둘의 관계를 걱정할 정도로 예뻐했던 여동생 게르티는 오랫동안 오빠의 모델을 했다.
클림트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 작품에서 동시에 클림트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클림트의 그림은 장식적이고 화려하게 빛나지만 이 작품은 정적이고 색을 자제하여 건조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자두나무(1909), 다름슈타트헤센주립박물관>


<자화상(1910), 레오폴드미술관>
100여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그린 것은 아버지의 부재로 자신을 인정해 줄 존재가 사라진 것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지독한 나르시즘에 빠진 그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를 되뇌며 자기 성찰에 골몰한다.


<앉아 있는 남성 누드(1910), 레오폴드 미술관>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 둔 후 아카데미의 관습에서 자유로워지자 인체 뿐 아니라 성에 대한 탐구도 했는데, 너무나 솔직한 표현이 보는 이를 당황하게 했다.



<뛰어오르는 남성 누드(1910), 레오폴드미술관>



<어머니의 죽음(1910), 레오폴드미술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쉴레는 이 작품을 자신이 그 때까지 그린 그림 중에서 최고 걸작이라고 했다. 죽어가고 있는 엄마는 아이를 보듬지만 아기의 분홍색 피부도 엄마의 피부처럼 초록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훗날 그의 아기처럼.


<늦가을의 작은 나무(1911), 레오폴드미술관>
쉴레는 자연을 통해 정서적 상태를 반영한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세파에 흔들리며 무기력하게 죽음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작가의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을 나무들(1911)>


<노이랭바흐에 있는 쉴레의 거실(1911), 빈 역사박물관>
1909년 빈에서 열린 제2차 국제아트쇼에 참가하면서 뭉크, 고갱, 고흐, 보나르, 마티스 등 당시 선구적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쉴레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고흐에게 헌정하는 해바라기, 풍경, 정물들을 그렸다. 이 작품은 고흐의 방을 연상시킨다.


<소녀들(1911), 알베르티나 미술관>



<Landscape with Ravens(1911), 레오폴드미술관>


<자기 성찰자(1911), 레오폴드미술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실존에 가 닿는 일이다.
돈이나 사회적 시선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
솔직하고 온전한 자신이 되는 일이
예술의 본질이자 시작이기에
영원히 아이로 존재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 아닐까

예술을 하는 일,
예술가로 사는 일.



<예언자(1911), 말버러거슨 미술관(미국)>


<시인(1911), 레오폴드 미술관>



<죽은 도시(1911), 레오폴드미술관>
1905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죽음은 그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울타리 친 언덕 땅 앞의 담장과 집(1911), 레오폴드 미술관>


<심한 바람 속에 서있는 가을 나무(1912), 레오폴드 미술관>
“내가 인간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크나큰 슬픔이 있다는 것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 계절까지도
쇠락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가을 해와 나무들(1912), 개인소장>



<은둔자들(1912), 레오폴드미술관>
쉴레와 클림트가 한 사람인 양 가깝게 서 있다. 쉴레는 앞에 서 있고 클림트는 뒤에서 눈을 감고 숨어 있는 자세에서 클림트에 대한 존경과 함께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의존적이며 독립적인 관계는 1918년 2월 클림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발리의 초상(1912), 레오폴드미술관>
1911년 클림트의 소개로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즐을 만난다. 그녀는 모델이자 애인으로 쉴레의 작업 뿐 아니라 생활도 도우면서 몇 년간 같이 지낸다.


<미결수 자화상(1912), Vienna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어머니의 고향인 크루마우의 노이랭바흐에서 어린 아이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미성년자 유혹은 무죄를 받았으나 어린 소녀를 대상으로 외설적인 그림을 그린 것이 발견되어 작품들을 빼앗기고 2주 동안 구속되었으며 크루마우에서 쫓겨났다.
“예술가를 방해하는 것을 범죄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싹트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또 구류 중에서도 몇 점의 드로잉을 남겼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다.

<나, 영원한 아이>

나는 언제나 간절한 사람들의 길을 지켜보았다.
그들 속에 있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얘기했고 얘기하지 않았으며,
나는 들었으며, 그들을 이해하기를 강렬히 바랐다.
그리고 더 깊이는 그들의 안을 보기를 원했다.

나 영원한 아이는 내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이들과
내게서 멀어 나를 보지 못하는,
하지만 나는 볼 수 있는 이들을 위해 희생했다.
그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눈길을 주고
그들을 보고 싶어서 떨리는 빛나는 마음을 전했다.
나는 그들 앞에 극복할 수 있는 길들의 씨앗을 뿌렸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곧 그들 중 누군가는
그들 안을 들여다보는 얼굴을 알아채고,
더 질문하지 않았다.

이하 생략


<죽음의 고통(1912), 뮌헨 노이에피나코텍>



<추기경과 수녀(1912), 레오폴드미술관>


<작은 도시3(1913), 레오폴드미술관>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1913), 레오폴드미술관>


<도나우 강변의 바위산2(1913), 개인소장>



<지는 해(1913), 레오폴드미술관>
해가 지면 사방엔 어둠이 깔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와 작은 꽃들은 추위에 떨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 딸(1913), 레오폴드미술관>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리 노이질(1913), 개인소장>


<헌신(1913), 레오폴드미술관>



<빨래줄이 걸린 집들(1914), 레오폴드미술관>



<크루마우 풍경(1914), 레오폴드미술관>



<해바라기(1914)>


<눈 먼 어머니(1914), 레오폴드 미술관>



<오른쪽 팔을 올린 자화상(1914), 개인소장>
쉴레는 고전적인 관점을 버리고 인물에 따라 앵글과 관점을 다르게 한다. 그 결과 인물은 꼬이고 비틀어지고 변형된 형태를 띤다. 또 인물은 탈중앙화 되고 전면 혹은 전체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중앙에서 벗어나 이상한 동작을 하고 있는 왜곡된 형태가 그의 인물의 특징이다. 이런 인물이 현대인들에게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창문들(1914), 오스트리아 미술관>



<Shriner in the Forest(1915), 레오폴드미술관>



<고립된 도시(1915), 레오폴드미술관>


<오래 된 집(1915)>



<강가에 있는 집의 담벼락(1915), 레오폴드 미술관>



<죽음과 소녀(1915),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발리와의 이별을 의미하는 작품이다. 매달리는 여인과 밀어내는 죽음의 신을 통해 15세기 독일 예술계에서 크게 유행했던 ‘죽음의 춤’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추상적인 배경과 의상에서 클림트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쉴레는 결혼과 무관하게 발리와 계속 만나고 싶어 했지만 발리는 그를 떠나서 다시는 보지 않았다.



<이중 자화상(1915), 개인소장>



<줄무늬 옷을 입은 에디트 쉴레의 초상(1915), 헤이그 시립현대미술관>
1915년 에디트와 결혼한다.


<오래된 물방아간(1916), 니더외스터라이히 주립미술관>



<네 그루의 나무들(1917), 벨베데레궁전 미술관>



<포옹(1917), 벨베데레궁전 미술관>



<어머니와 두 아이들(1917), 오스트리아 미술관>



<크루마우 거리(1917)>



<가족(1918), 빈 오스트리아미술관>
에디트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미래의 가족을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은 실현되지 못했다.



<오지 그릇(1918), 개인소장>



<에디트 쉴레(1918)>
1918년 에디트 쉴레가 임신 중에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다.
쉴레는 에디트가 죽은 후 3일 동안 더 살면서 아내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참고문헌>
1. Reinhard Steiner. 1993. <EGON SCHIELE: The Midnight Soul of the Artist>. Benedikt Taschen.
2. 네이버 지식백과
3. 에곤 쉴레 저/문유림, 김선아 역. 2018. <나, 영원한 아이>. 알비.
4.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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