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불라 라사 Tabula Rasa 白板
외딴 섬에 소년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어머니가 죽자 소년은 어머니의 시체를 해부했다. 그래서 알아낸 것은 어머니가 열이 없어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그는 칠년에 걸친 일곱 단계의 과정을 탐구하고 학습하면서 많은 지식을 축적했다. 그는 인도양(印度洋)의 섬에서 양(洋)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소년으로 아랍어로 '깨어있는 아들'이라는 뜻의 하이(Ḥayy ibn Yaqẓān)였다. 훗날 그는 인간이 사는 사회로 돌아왔는데 그가 쌓은 지식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 이야기는 [살아있는, 지혜의 아들]이라는 소설의 줄거리다. 이 작품을 쓴 이븐 투파일(Ibn Tufail/Abubacar, 12세기)은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무슬림 철학자였는데 그의 이 작품은 11세기초의 아비세나(Ibn Sina/Avicenna)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도 유사한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 두 이슬람 학자가 생각한 ‘백지와 같은 인간의 마음’은 찬란한 이슬람 문명이 이룩한 깊고도 높은 사유였다. 이 개념은 특히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나 루소의 [에밀], 그리고 성장소설과 교육소설에 영향을 미쳤으며 교육과 경험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서구유럽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의 근거가 되었다.
의학자이자 철학자였고 정치가였던 존 로크(J. Locke, 1632 - 1704)는 이븐 투파일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서 타불라 라사라는 중요한 개념을 창안했다. 자유주의와 시민사회를 지향했던 로크는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 1권의 표제를 인간이 가진 어떤 ‘원리나 생각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Neither Principles nor Ideas Are Innate)’라고 단언했다. 이것을 라틴어로 ‘타불라 라사’라고 하는데 밀랍(蜜蠟)으로 만든 ‘빈 서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타불라 라사는 프로이트적 무의식(unconsciousness)이라기보다는 의식 자체가 비어 있는 ‘공의식(空意識, empty consciousness)'에 가깝다. 라이프니츠가 로크를 비판하면서 더 중요해진 타불라 라사는 인간의 의식은 태어날 때 '빈 백지’와도 같은 무(無)이며 경험과 지각을 통해서 의식이 형성되고 인지능력을 통하여 지식을 축적한다는 개념이다.
베이컨과 함께 경험주의 철학의 태두로 불리는 로크의 타불라 라사는, 아랍 소년 하이의 예에서 보듯이, 선천적인 본성(nature)보다 후천적인 양육(nurture)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로크의 이런 관점은 자아에 대한 과학적 개념정립은 물론이고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으로 발전했다. 한편 로크는 자아란 ‘무엇을 생각하는 의식(self as that conscious thinking thing)’이며 그 자아의 지각과 성찰을 통하여 인간의 인지가 형성된다고 함으로써 데카르트나 칸트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또한 인간은 신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고 본성에 따르는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계약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독립적 주체라고 믿었다. 사회계약설로 압축되는 이 이론은 계약의 주체인 인간은 교육, 학습, 경험, 성찰을 통하여 지식을 축적한다고 본다.
타불라 라사에서 시작하는 자아형성이론은 종교의 교리, 플라톤의 관념론, 맹자(孟子)나 순자(荀子)의 인간심성론 등과는 다른 개념이고 유물론에 가까운 과학적 설명이다. 타불라 라사에 대한 수많은 비판 중에서 촘스키(Noam Chomsky, 1928 - )의 견해를 참조할만한데, 그는 인간에게는 선천적이고 선험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인간의 마음이 타불라 라사 또는 백지상태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령 500개의 단어만으로 무한할 정도의 문장을 생성해 내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선험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타불라 라사는 인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일 뿐 아니라 인지심리학, 의학, 정치경제, 컴퓨터 과학기술, 건축을 포함한 여러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승환(충북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