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한 달
지난 여름, 신길동 아파트에서 떨어진 뒤 인야가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어차피 인야에게는 주거지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대책을 찾아 도착한 현장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또 한 번의 실망이었다.
아파트는 10평과 12평의 각기 다른 다섯 가지 모델이 있었는데, 인야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12평짜리는 신청자가 몰려 그 전날 마감되었다는 것이었다.
'진작에 할 걸!' 하는 실망감과 후회가 막심했지만, 어차피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런데 운명이었을까?
허탈해하며 엉거주춤 서 있던 인야의 눈에 그 옆의 또 다른 창구가 들어왔다. 고개를 갸웃하며 알아보니, 또 다른 모델인 12평짜리 원룸 형은 총 14세대가 나왔는데... 그 전날 단 두 명만이 신청을 해서, 아직 여유가 있다는 거 아닌가.
인야는 멈칫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룸이라고? 뻥 뚫린 방 하나.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림을 그리는 자신 같은 사람에게는 방 하나짜리라 구조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걸 신청하면 당첨 가능성이 있을까요?"
인야가 담당자에게 묻자, 담당자는 되레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당연하지요. 자리가 남아 있는데, 안 되겠어요?"
순간 인야는 눈이 번쩍 뜨였다. 더 이상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바로 신청 용지를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문제가 생겼다. 서류 미흡으로 새로운 '주민등록 등본' '호적 등본' 등을 요구받은 것이었다.
군산으로 연락해 팩스로 서류를 받기로 했지만, 오후 늦은 시각에야... 그 서류를 찾을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제는, 군산에서 서류가 오기까지의 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문제였다.
인야는 그 시간을 이용해 차라리 모델하우스가 있는 현장인 공릉동에 가보기로 했다.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태릉까지 이동했다.
거기는 김포와는 또 다른 풍광을 지니고 있었다. 공기가 제법 맑았고 구리로 통하는 길이 넓게 뚫려 있어 무엇보다 시원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 지은 아파트는 깨끗했고, 지난번 신길동 아파트보다 훨씬 넓었으며 주변 환경도 쾌적했다.
그런데 그 아파트는 15층 건물이었고, 인야가 신청하게 될 원룸형은 맨 마지막 한 줄의 열다섯 가구뿐이었다.
사실 거기 있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올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지만, 원룸을 신청해도 당장은 된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에,
'되면 좋으련만......' 하는 막연한 마음만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지하철 역을 나오니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인야는 급하게 택시까지 잡아 타고 거기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을 찾아가지고 도시개발공사에 닿으니,
10분 전 다섯 시였다.
그렇게 서류를 준비하느라 점심도 못 먹고 애를 태우다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인야를 보더니, 서류를 접수하던 직원(여)이 그를 알아보고 위로의 말을 건낼 정도였다.
"힘드셨겠어요!"
그러면서 확인해 보니, 인야가 열세 번째 등록자로... 아직도 한 자리가 미달인 상태였다.
'그럴 수가!'
"그럼, 난 당첨된 겁니까?"
인야가 믿기지 않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서류상 문제가 없다면, 당첨이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고 생긋 웃으며, "물론, 한 달 뒤에 공식적으로... 동 호수가 결정되어 발표가 있어야 확정적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된 거나 다름없구요." 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런 일이!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도 안 돼!'
인야는 스스로 이 상황을 부정하려고만 했다.
재수 옴 붙은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벌어진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러니까 나는 힘든 전쟁터에 나가야겠다고 겨우 마음 준비를 하고는, 그에 따른 대책을 궁리하고 있는데... 싸우기도 전에, 아니, 아직 시작도 하기 전에, 승리했다고?'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도... 버젓한 아파트가 생길 거라고? 돈도 없는데?......'
도무지 어리벙벙한 상황에, 인야는 정신조차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인야의 주변 공기는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들뜬 마음에 김포 아파트에 도착해,
"누님, 그 아파트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라네요!" 하고 의기양양하게 소리를 쳤는데도, 누님은 기뻐하기는커녕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입주금을 어떻게 장만하라고?"
누님은 매형과는 아주 딴판으로 어두운 표정은 물론 짜증섞인 걱정까지 내비쳤다.
그러니 인야는 무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난번에 안 봤어? 그게, 그리 쉽게 되는 일인 줄 알아?" 하고 눈까지 흘기기에, 인야는,
"아니, 내가 직접 물어봤다니까! 방 두 개짜리는 안 됐지만, 원룸형은... 내가 마감 전에 등록시켜서, 그 사람들도 다 된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니까요!" 하자,
그제야 매형이,
"정말, 잘 됐네!" 하고 좋아해 주었지만, 누님은 여전히 시큰둥한 말투로 물었다.
"몇 층인데?"
"글쎄요... 그것까지야 내가 모르지. 그런 건 한 달 뒤에나 종합적으로 발표한다고 하던데요?" 하자,
"만약 된다고 해도, 1,2 층이 되면 어쩔 건데?" 하고 묻는 것이었다.
"예? 글쎄......" 그제야 인야는,
'그것도 그렇네... 만약 1층이 된다면? 어떡한다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말문이 막힐 수밖에......
물론 아직 그 아파트의 당첨이 100% 확정된 것도 아니었지만, 만약 1층 같은 저층이 걸린다면... 그건 한 번쯤은 고려해 봐야 할 문제였다.
어차피 입주할 돈도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야는 어쩌면 또 다른 기회를 기다려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게 되었다.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았다.
뭔가 일이 풀리는가 싶으면, 거기에 따른 다른 문제들이 하나둘 생기게 마련이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걸림돌과 맞닥뜨리게 되는......
그렇게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누님의 반응이 못내 마음에 걸려, 꿈만 같던 ‘아파트 당첨’이라는 소식은 순식간에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으로 변해버렸다. 어쩐지 빛이 바래버린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야에게 그 일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오매불망 그리던 일이었는데 말이다.
‘분명 좋은 일이긴 하지만, 너무나 쉽고 싱겁게 풀려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이 맴돌 뿐이었다.
이후의 한 달은 길었다. 너무나도 길었다.
인야는 출판사의 소식도 기다리고, 마티아스 씨의 메일도 기다리고, 아파트 발표도 기다리며 그 긴 한 달을 보냈다.
그러던 하루, 인터넷에 접속해 확인한 마티아스 씨의 메일에는,
아직은 아무런 확답이 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혹여 일이 잘 안되더라도 그건 인야의 작품이 나빠서가 아니라 운명 탓일 거라는 위로의 말도 있었다.
그 다정한 위로가 너무나 고마웠지만, 오히려 인야를 서글프게 했다.
하지만 인야는 큰 동요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어디 한두 번 실망해 봤던가.’
출판사 문제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작권료 문제를 출판사와 인야가 반반씩 부담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640만 원의 저작권료 중 반이면 320만 원인데, 출판사 측이 인야에게 지불할 예정인 인세 약 200만 원을 상쇄하더라도 인야는 결국 120만 원의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그래도 인야는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끝을 맺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놈의 책은 끝내 자신에게 빚까지 떠안기고 있었다.
어느덧 부쩍 쌀쌀해진 날씨와 함께 11월이 찾아왔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들판의 벼들은 베어진 지 오래라 황량한 풍경만을 자아냈고, 가로수의 단풍잎들도 힘없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