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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4장, 지하에서 하늘로...

작성자남궁|작성시간26.06.12|조회수72 목록 댓글 0

 

4장, 지하에서 하늘로...

 

결국 누님이 인야의 아파트 당첨 소식에 그리 달가워하지 못했던 진짜 이유가 밝혀졌다.

조카(누님의 딸)의 결혼식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결혼 비용문제로 남모르게 골치를 앓던 중... 하필이면 인야의 아파트 입주금 문제까지 함께 터져버린 꼴이라, 누님의 마음이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야 역시 그 사실을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 집안 상황을 마주하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수밖에 없었고.

꿈에 그리던 아파트 당첨이었음에도, 마음 놓고 기뻐할 입장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사실 조카가 결혼하는 마당에 삼촌으로서 경제적인 힘을 보태야 마땅했다. 더구나 인야 자신 때문에, 그리고 방을 가득 채운 자신의 그림들 때문에 제 방조차 넓게 쓰지 못하고 좁은 곳에서 지내다 시집을 가는 조카였다.

미안하고 고마워서라도 꼭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고 또 해야만 하는 처지였지만, 작금의 인야의 형편으로는 도무지 능력이 닿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인야가 겨우 결정한 것은 자신의 그림 중 꽃그림 하나를 결혼 선물로 건네는 일이었다. 평소에 그런 그림을 잘 그리지 않는 인야였지만, 전에 멕시코로 떠나기 전에... 해바라기를 소재로 정성껏 그려둔 그림이 한 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말은 해두었음에도, 조카에게 정말 면목이 없고 미안할 마음 역시 숨길 수는 없었지만.

 

누님네 식구들은 조카의 결혼 준비로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조금 전, 온 식구들이 예복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집을 나섰다. 인야는 이 아름다운 늦가을 아침을 온전히 누려보고자 조금 늦게 집을 나서기로 하고 홀로 거실에 남았다.

베란다 한편에는 누님이 정성껏 가꾸는 선인장 화분이 놓여 있었는데, 그 줄기마다 꽃봉오리가 다래다래 맺혀 있었다. 베란다 유리창 사이로 조용히 스며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막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듯한 그 모습이, 인야의 눈에는 더없이 정겹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날 밤, 인야는 이사하는 꿈을 꾸었다. 아파트도 선명히 보였는데, 꽤나 높은 층인 것 같았다.

꿈속의 인야가 서 있던 곳에서 바라본 주변 아파트들의 모습이 적어도 10층 이상의 높이는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속이 쓰려 눈을 떠보니 새벽 세시 반이었다.

 

11월 하순, 조카가 시집가서 살 신혼집에 미리 짐을 실어 보내는 날이었다.

조카가 좋아했던 인야의 그림 ‘해바라기’도 그날 함께 실어 보낼 예정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아파트 최종 당첨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 새신랑(조카사위)이 와서 신혼살림을 싣고, 누님네 식구들도 그 길에 함께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인야 혼자 아파트에 남게 될 터였고, 인야는 혼자 남은 그 시간에 비로소 자신의 임대 아파트 당첨 여부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른 새벽, 텃밭에 나갔다 돌아오던 매형이 인야를 보더니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처남, 어제 은행에서 융자받을 서류를 내가 모두 준비해 놓았어."

인야는 적지 않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딸을 시집보내는 그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매형은 처남을 온전히 독립시키기 위해 뒤에서 이런저런 준비를 조용히 해두었던 것이다.

그것도 연 이자가 10% 미만으로 책정된 싼 융자를 주선해 주었다고 했다. 원래는 누님네 아파트를 담보로 잡히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인야에게 가장 이자가 저렴한 대출을 받게 해주려는 매형의 깊은 배려였던 것이다.

그 고마움은 인야의 마음에 배가 되어 밀려왔다.

그렇잖아도 여태껏 이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신세를 졌는데, 독립해 나가는 순간까지도 결국 누님네 신세를 지고 나가게 되니... 어찌 아니 미안함과 면목 없음이 느껴지지 않았겠는가.

 

그런 누님네의 보이지 않는 협조와 헌신이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됐다! 마침내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인야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자마자, 그것도 자동 전화 응답기에서,

"축하합니다!"라는 안내 음성과 함께 000동 1101호에 당첨되었다는 발표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11층이라니, 참 좋은 층수였다.

‘그래, 이럴 때도 있어야지. 암, 사람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이렇게 볕 들 날도 있어야지......’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차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침 누님네 식구들이 신혼집으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기에 인야는 복도로 뛰어나가 조금 큰 소리로 사실을 알렸다.

"누님, 됐다네요! 11층 1호예요."

"뭐? 여기하고 똑같네!"

그 말에는 누님도 얼굴을 활짝 폈다.

공교롭게도 지금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김포 아파트도 11층 1호였는데, 인야가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 역시 완벽하게 똑같은 동·호수였던 것이다.

제대로 기뻐하고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누님네 식구들은 밀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바쁘게 들어갔고, 아파트에는 오직 인야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아,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인야는 밀려오는 그리움을 삼키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맑은 늦가을 아침의 하늘이 더없이 청청하기만 했다.

인야는 어지러웠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이제 지하실에서 벗어나 밝고 확 트인 곳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야는 앞으로의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가장 확실한 동기와 이유를 품게 된 것이었다.

 

인야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내 집 마련’에 대한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그 일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쉽고도 싱겁게 이루어진 면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인야 자신에게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간절하고 절박했던 문제였기에 큰 비중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수많은 서민이 인야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거나,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단 두 번의 시도 끝에 꿈을 이루어낸 인야에게도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어디 그뿐일까. 그렇게 온전한 공간이 생김으로써 인야의 인생이 확 바뀐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지하에서 하늘로’ 올라왔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감격해했겠는가.

물론 그 표현이 지옥에서 천당으로 바뀌었다는 거창한 뜻은 아닐 것이었다. 그저 단어 그대로, 지하실이라는 물리적 위치에서 저 높은 하늘을 마주 보는 곳으로 이동했다는 솔직한 변화의 고백일 뿐이었지만.

 

아파트에 당첨된 다음 날, 인야는 새 아파트에 다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가봤자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겠지만, 지난번에 보니 아파트 입주에 대한 안내문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고 본격적으로 이사에 대비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만큼 마음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김포에서는 산본 가는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진 공릉동 아파트에 도착했다.

두 시간 반은 걸린 듯했다. 아직은 입주 전이라 건물 밖에서만 바라보다 관리사무소에 가서 입주 절차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하자 웬 베란다 샷시 업자 하나가 새 입주자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오며 여기까지 온 김에 아파트 내부를 한번 구경해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제안했다.

열쇠가 없어 망설이는 인야를 보며 업자는 자신이 열어드리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그리고 인야가 입주할 1101호 문 앞에서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재빨리 가지고 있던 꼬챙이로 문을 툭 따는 것이 아닌가.

인야는 엄연한 불법이라는 의구심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남 보지 않게,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속삭이듯 말하는 그에게 이끌려 얼결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 것도 없는 아파트 내부는 훤했고, 문틈으로 바라다 보이는 베란다 밖 전망은 너무 좋은 편이었다.

아파트 안에서도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볼 수는 없는 입장이었지만, 표시 나지 않게 문을 살짝 열어 보니... 11층이라 앞이 뻥 뚫린 시원함도 있어 인야를 흥분하게도 했다. 게다가 정남향이라 따스한 햇살이 방안으로 들어와 실내는 아늑했고 환한 공간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아, 정말... 좋은 곳이 걸렸구나!'

안도의 한숨이 절로 쉬어졌고, 그러면서 생뚱맞게도,

'아, 지난번 신길동 아파트가 안 됐다고, 세상 무너진 것처럼 너무 가슴 아파했었는데... 여기가 되려고 거기에서 떨어졌던가 보네!' 하는 생각도 스치는 것이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뜻하지 않게 아파트 내부까지 살펴볼 수 있었던 인야는, 이사한 뒤 샷시를 할 경우 자기네 업체를 이용해 달라며 건넨 그 사람의 명함을 받아들고는 관리사무소에 들어가 물어보니... 잔금만 지불하면 오늘 당장이라도 입주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 매형이 인야를 부르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처남, 시간이 있으면 우리 은행에 함께 갈까?"

서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은행에 가서 신청을 해야만... 일주일 안에 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요즘 조카 결혼 문제로 바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인야가 미안한 마음에 쭈뼛거리자 매형은 손사래를 쳤다.

"물론 그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처남 일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정말 하루라도 빨리 독립을 해야 하지 않겠어?"

인야는 속으로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매형과 은행에 가서 누님네 아파트를 저당 잡히고 인야 자신의 아파트 입주금 융자를 받았다.

 

인야는 그 어느 날보다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작업실로 향했다.

평소 이곳에 올 때마다 암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제 서둘러 이사 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날 저녁, 인야는 제자 K를 만났다.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한 뒤, 인야는 평소 가지고 다니던 서울 시내 지도를 상 위에 넓게 펼쳤다.

"00아, 너희 집이 어디쯤이지?"

"저희 집은 수유와 쌍문 중간쯤이니까…… 여기쯤이에요."

K가 지도의 한 곳을 가리키자, 인야는 자신의 아파트가 있는 공릉동을 짚으며 무표정한 신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희 집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내가 살게 되었다."

K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인야가 다시 한번 그 자리를 짚으며 강조했다.

"내가 며칠 뒤면 여기서 살게 될 거야."

그제야 K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예? 선생님, 서울로 이사 오시나요?"

"응, 나 혼자 거기서 살게 되었다. 작업실 겸 집으로 쓰려고."

"정말요? 아파트예요?"

K가 목소리를 높여 묻자 인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되었단다."

"와, 정말 잘하셨네요, 선생님!"

K가 감격해 마지않자 인야가 덧붙였다.

"내가 잘한 게 아니고, 일이 잘 풀려준 거지."

모처럼 인야는 그동안의 경위를 대충 설명해 주었다.

"야, 정말 잘됐네요, 선생님!" 하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제자의 모습을 보며 인야 역시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

 

본격적인 이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요즘 인야의 머릿속은 온통 이사 생각뿐이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짐을 싸다 보니 하루가 꼬박 김포 아파트에서 그림을 정리하고 짐을 묶는 일로 흘러가 버렸다.

늘 그렇듯 일을 크게 펼쳐놓고는 어찌할 줄 몰라 한숨만 쉬고 있는 인야를 위해 누님과 조카가 와서 뒤처리를 도와주었다. 가져갈 그림들을 단단히 포장해 두고, 지난번에 태우고 남았던 책들을 박스에 채워 넣으니 제법 준비가 끝이 났다.

인야는 자신이 머물던 방에 포장된 그림과 박스들을 쌓아놓고, 방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우편함에서 이국적인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독일에서 온 편지였다.

순간 인야에게는, 기쁜 소식은 아닐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봉투를 개봉하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마음을 다잡고 뜯어보니 영어로 적힌 내용이 보였다.

인야가 보낸 편지를 11월 3일에 받아 검토를 위해 보관 중인데, 이미 2년 뒤의 2001년 계획도 마감되어 다음(2002년) 심사는 그 다음해 11월에나 이루어진다는 통보였다. 편지를 너무 늦게 접수하는 바람에 내년 계획에 포함되지 못하고 내후년으로 일정이 밀려버렸다는 것이었다.

내심 목이 빠져라 기다려왔던 일이었는데, 아예 탈락했다는 통보는 아닐지라도... 인야에게는 거절이나 다름없는 부정적인 답변이었다.

말이 내후년이지, 앞으로 3년 뒤의 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독일 베를린의 한 예술인 아파트에서 몇 개월 동안 체류하며 작업도 하고 다른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체류비와 생활비까지 전액 지원하는 예술가 후원 재단의 프로그램이라 신빙성도 높고 간절히 바라던 일이었는데, 인야는,

‘나에게 그런 복이 있겠어?’ 하며 씁쓸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아침 일찍 지하 작업실로 나와, 새로 이사 갈 아파트에서 사용할 선반을 앵글로 맞춰 조립해 두는 등, 진척이 더디기만 하던 짐 싸기가 모두 마무리되자... 정말로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이제 여기서 짐을 빼내기만 하면 마침내 이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지하 작업실과도 정말 마지막이겠고, 책상에 앉아 몇 자 끼적이는 것도 그날이 마지막이 될 터였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갈 곳이 없어 막막할 때 인야에게 주어졌던 공간.

한 달에 겨우 7만 원의 관리비만 내며 버틸 수 있었던 이 지하 작업실은 참으로 고마운 안식처였다. 비록 ‘지하’라는 한계 때문에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근 1년이라는 세월을 묵묵히 품어준 곳이기도 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그리고 잘 있거라.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나와 동행했던 공간이여,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당장 다음 날 이사한다는 사실이 불가능한 일처럼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그러나 오후로 접어들면서 모든 과정이 거짓말처럼 순조롭게 이어졌다. 저녁에 확인해 보니 이미 은행 대출 승인이 떨어져 다음 날 아침이면 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제야 인야는 개인 용달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와달라고 예약을 마쳤다.

그렇게 짐을 실으면 그것으로 이사였고, 그 밤을 끝으로 누님 집에서의 길었던 더부살이도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었다.

 

조카의 결혼식도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다.

매형도 기분이 좋아 보였고 누님도 행복해 보였으며, 인야 역시 다음 날 이사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모처럼 집안 전체에 온화하고 행복한 공기가 감돌았다.

희망이 깃든 그 밤은 어떤 일의 마지막이라기보다, 완전히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설레는 시작의 밤이었다. 인야는 마음을 다해 하늘에 감사드렸다.

 

이사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생생한 꿈을 꾸다 일어난 기분이었다.

이사 갈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제출할 서류들이 빠짐없이 준비되었는지 확인한 뒤, 인야는 컴퓨터 앞에 앉아 몇 자를 적어 내려갔다.

‘아, 마침내 내 자리로 찾아 들어가는 날이구나. 그 무엇보다도 새로운 작업을 마음껏 시작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드린다.’

 

마침내 인야는 자신의 아파트에 입주했다. 인야는 이곳을 ‘내 자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온전한 자신만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남향 아파트 11층.

전망 또한 훌륭했다.

이삿짐을 모두 나른 뒤 인야는 제자 K와 함께 중국 음식을 시켜 먹었다.

K를 배웅하고 난 뒤, 인야는 깨끗하게 방바닥을 닦고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누워 누려보는 평온이었다.

난방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바닥이 기분 좋게 따뜻해졌다. 사람들은 오늘이 유독 추운 날이라고 속삭였지만, 하루 종일 흥분 상태였던 인야는 그 어떤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저녁에는 고등학교 재경 총동창회가 있어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인야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았다.

동창회를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 마음의 결이 확연히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김포처럼 멀지 않아 오가는 시간도 적게 걸렸지만, 무엇보다 ‘내 집’, ‘내 자리’로 돌아간다는 그 당연한 편안함이 온몸을 아늑하게 감싸 안았던 것이다.

그렇게 돌아와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던 인야는, 누님 집에 보관하다가 오늘 이삿짐에 실어 온 이불 보따리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인야를 위해 직접 꿰매어 주셨던 이불, 그리고 어머니께서 마지막까지 사용하시던 이불이었다.

인야는 이불결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숨결을 느끼며 방바닥에 정성껏 깔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어머니를 생각했다.

‘아,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어머니, 죄송합니다. 살아생전 좋은 집에 한 번 모셔보지도 못했는데, 저만 이렇게 아늑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보셨으면 분명 좋아하셨을, 앞이 탁 트인 환한 집입니다. 어쩌면 이제라도 제가 이런 집에서 살 수 있게 된 것 또한 어머니가 하늘에서 보살펴주신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물론 인생이, 그럴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그렇지만 인야의 인생을 통틀어서도 그 무렵만큼 행복했던 적도 많지는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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