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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III, 다시, 고개 드는 ‘역마살’(1)

작성자남궁|작성시간26.06.19|조회수77 목록 댓글 0

III, 다시고개 드는 역마살

 

a, 빚으로 버티는 일상

 

결국 인야는 어렵사리 자존심을 꺾고 타인에게 손을 벌리기로 결심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여의도로 향해 요한나 씨를 만나 아쉬운 소리를 꺼냈다. 자존심 강한 그가 누군가를 직접 찾아가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은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작정 찾아간 길이긴 해도 나름의 계산은 있었다. 요한나 씨는 인야의 작품을 인정해 주는 얼마 되지 않는 이였기에, 여차하면 그림을 팔아달라고 요청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인야가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면서 채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다가오는 월요일에 통장으로 100만 원을 융통해 주겠노라 선뜻 약속했다.

눈물겹도록 고마운 처사였다.

그러나 ‘내 자리’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인야의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발등의 불인 집세 연체는 해결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찌 기뻐할 일인가.

결국은 남에게 진 빚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갚아야 할 부채였고,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 위에 또 하나의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얹은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전부가 빚이었다.

그의 인생은 거대한 부채의 연쇄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발을 딛고 있는 이 임대아파트도, 스페인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귀국 전시회도, 속을 썩이며 출간이 멈춰버린 책 문제도, 그리고 숨을 쉬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계마저도 전부 타인의 호의를 빌린 빚이었다.

자신은 완벽한 빚쟁이였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무게는 늘어만 갔다.

 

인야에게 선뜻 거금을 융통해 준 요한나 씨는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은인일 수도 있었다.

성당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라 세례명을 따서 인야는 늘 ‘요한나 씨’라 불렀는데, 과거 인야가 스페인 방랑을 마치고 처음 귀국했을 때,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급히 찾은 신길동의 한 미술학원에서 원장과 강사로 만난 사이였다.

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방랑벽이 심한 인야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 생활은 영혼을 갉아먹는 고역이었다. 무엇보다 화가로서 캔버스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릴 최소한의 개인 작업실조차 없다는 현실이 그를 못 견디게 했다.

인야의 안타까운 사정을 눈치챈 그녀는 서울과 부천의 경계 지점인 ‘항동’의 한 작업실을 선뜻 소개해 주었다.

그 덕분에 인야는 강사 노동에서 벗어나 그림을 그리며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활로를 찾았던 것이다.

돌이켜봐도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당시 인야는 학원의 핵심 강사였고, 원장 입장에서 핵심 인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학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대인배적인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쓸 만한 강사를 구하는 일이 운영자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알기에, 자신의 이익보다 화가 이인야의 예술적 장래를 위해 호의를 베풀어 준 그녀의 신뢰가 더욱 고마웠다.

 

그녀의 도움으로 거처를 옮긴 항동 작업실에서 인야는 빌라 부인들을 대상으로 유화 수업을 하며, 멕시코로 떠나기 전까지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멕시코에서 돌아와 다시 방황할 때도 항동의 부인들이 그를 다시 불러들여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그것이 징검다리가 되어 독일로 건너갈 기회까지 얻었으니, 인야의 인생사에서 ‘항동 작업실’이 가진 문학적, 예술적 무게감은 실로 엄청났다.

그리고 그 정착의 시발점을 만들어준 이가 바로 요한나 씨였다.

그녀는 인야의 재능을 사랑하는 묵묵한 후원자로서, 그가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손을 내밀어 구원의 밧줄을 던져주곤 했다.

 

2월 말의 어느 날, 인야는 고향 군산의 형수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작년에 출강했던 대학교의 S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으니 급히 전화를 해보라는 전언이었다. S 교수가 왜 자신을 찾는지 목적은 불 보듯 뻔했으나, 누님 댁도 아닌 고향 군산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내어 연락했는지 못내 신기하고 의아했다.

이제 곧 3월,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대학의 시간강사 자리를 다시 제안하려는 용무가 틀림없었다.

형수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야의 내면에서는 갈등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당장 "하지 않겠다!"고 독하게 잘라 말하고 싶은 거부감이 요동쳤다.

작년 겨울, 그 대학교의 마지막 학기 수업을 끝내고 캠퍼스를 걸어 나올 때의 더러운 기분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거나 내년에 다시 보자는 인간적인 인사 한마디 없이, 필요할 때 단물만 빨아먹고 뱉어버리는 대학 사회의 비정한 생리에 정이 뚝 떨어졌던 터였다.

상처받은 자존심 탓에 다시는 대학 강단 따위에 서지 않겠노라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최근 타 대학의 교수 임용 서류를 내면서도 과거 출강했던 그 대학교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생활고 속에서 컴퓨터 교육에 매달리며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상태였다.

'절대 하지 말자'라는 자존심과 '그래도 해야만 한다'라는 현실적인 생계형 갈구 사이에서, 인야의 마음이 날뛰었다.

영혼이 원하는 쪽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그러나 거절 뒤에 찾아올 통장 잔고와 빚쟁이로서의 비참한 현실을 떠올리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작금의 삶은 만용을 부리기엔 너무나도 초라하고 위태로웠다.

인야는 수화기를 들고 S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필코 거절의 의사를 독하게 내뱉으리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막상 수화기 너머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인야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예, 당연히 가야지요. 저 같은 사람을 잊지 않고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뜻밖에도 살가운 말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전화를 끊고 난 인야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침을 뱉듯 속으로 비웃었다.

'지독한 이중인격자 놈.'

그것이 나약한 인간 이인야가 가진 민낯이었다.

그러나 자괴감도 잠시, 인야는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니야, 잘한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당장 다가올 다음 달을 무슨 수로 버텨내겠는가. 내 한 몸 건사할 능력도 없으면서 맘에 안 든다고 거절을 보태는 건 만용이고 사치일 뿐이다. 남에게 빚을 지고 손을 벌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무릎을 꿇고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저쪽에서 먼저 밥줄을 제안해 왔는데 무슨 배짱으로 걷어찬단 말인가. 주제를 알아야지…….'

 

 

b, 타고난 역마살

 

3월은 잔인하게 찾아왔고, 인야가 대학의 시간강사로 출강하게 되면서 임대아파트에 마련한 ‘내 자리’의 일상에도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일주일에 이틀을 대학 강단에 서게 되자, 지난 5개월간 들은 직업학교의 웹디자인 교육은 진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워졌다.

오랜 경제적 궁핍 끝에 쥐게 된 유일한 확정 수입인 60여 만 원을 포기할 수 없어 감내하는 고단함이었다.

원치 않는 인간관계와 세상의 복잡한 소음 속에 다시 끌려들어가자, 인야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철없는 방랑벽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 빌어먹을 교육도, 강사 한 학기도 끝나면, 다시 모든 걸 던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난 사각의 틀에 갇혀 살 위인이 못 돼.’

지독한 생활고에서 겨우 한숨을 돌린 사내의 생각치고는 황당한 충동이었지만,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화가 이인야의 천성이자 다가올 운명의 복선이기도 했다.

한 곳에 처박혀 지내기를 좋아하면서도 끊임없이 먼 곳으로 떠나는 자신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그는 감히 부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내 자리’는 베란다 너머로 확 트인 풍광과 하늘이 보여 안도의 숨을 내쉬게 만드는 고마운 공간이었다. 햇볕 한 줌 없이 답답함에 치를 떨던 작년의 지하 2층 생활에 비하면, 그야말로 지하에서 하늘로 올라온 셈이었다.

그러나 풍경이 주는 위안도 잠시, 온종일 아무런 말도 없이 보내는 날들이 늘어가자 허무와 서글픔이 밀려왔다.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듯한 허전함, 마음 줄 곳 없는 외로움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전화 한 통으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어머니’라는 마지막 끈이 끊어진 지금은 무한한 자유조차 그저 텅 빈 허무일 뿐이었다.

 

4월로 접어들면서 생활은 다소 안정기를 맞는 듯했다. 대학 실기수업은 자리가 잡혀 학생들이 쏟아내는 열정적인 작품들이 인야를 감동시켰고, 직업학교의 포토샵 과정에서는 화가로서의 감각을 발휘해 젊은이들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틈틈이 그린 드로잉들로 벽면이 빼곡해지며 방은 제법 ‘화가의 방’다운 면모를 갖추어 갔다.

20년 넘게 써오던 낡은 주민등록증을 반납하고 새 증을 발급받은 날에는, 오랜 무주택자 생활 끝에 마침내 온전한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실감이 나기도 했다.

비록 한 달 강사료 중 50만 원 이상이 아파트 관리비와 집세 이자, 고지서들로 고스란히 빠져나가 입에 풀칠하기 바쁜 팍팍한 삶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출판사와의 끈질긴 ‘책 문제’는 끝끝내 인야를 괴롭혔다. 멕시코 벽화 운동에 관한 책을 내기 위해 멕시코와 연락을 취하고 시케이로스와 리베라의 저작권 허락을 기다리는 과정은 잔인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출판사는 저작권료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생색을 냈지만, 약속된 출판 예정일을 5월에서 다시 6월로 미루며 인야를 기만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편집장의 노련한 권모술수와 변명 앞에서 인야는 분노를 삼키며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4년이나 내 책을 뒤로 미뤄온 그 ‘늙은 여우’의 손바닥 위에서 진흙탕에 빠진 듯한 슬픔을 느낄 때마다, 그는 또다시,

‘어쨌거나 나는 떠나야 할 사람인가 보다’ 하고 되뇌었다.

 

5월 말, 마침내 5개월간의 규칙적인 컴퓨터 교육이 끝났다. 출근 지하철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순간이었다.

배워둔 포토샵은 향후 그의 홈페이지 운용과 컴퓨터를 응용하려는 작품 세계에 큰 자산이 될 터였다.

인야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쉬지 않고 곧바로 ‘영어 회화’를 시작했다.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새로운 유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은밀한 신호였다.

5월의 마지막 날, 점점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인야는 집에 인터넷망을 깔고 장롱을 뒤로 빼 방안 구조를 원룸처럼 넓고 시원하게 바꾸었다. 지독했던 책 인쇄가 겨우 마무리에 접어들었고, 사내의 마음속에는 해방감과 함께 또다시 먼 곳을 향한 역마살이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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