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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IV,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1)

작성자남궁|작성시간26.06.21|조회수73 목록 댓글 0

 

IV,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

 

  a, 마드릳 사건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인야와 00은 처음 이삼일 동안 현지 호텔에 머물렀다.

시차에 적응하며 바르셀로나의 주요 관광지를 부담 없이 둘러보면서, 그런 틈틈이 인야는 00를 데리고 자신이 살았던 산동네 ‘깐 까라예우(Can caralleu)’에도 올라갔다.

물론, ‘호아킨(Joaquin)’과 ‘아말리아(Amalia)’ 부부를 비롯한 옛 지인들의 집을 방문해 자신이 스페인에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스페인 지인들의 집에 갈 때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야?”

인야는 사전에 00이와 약속한 대로 일률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음…… 내 조카야.”

그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한답시고, 굳이 '요한나씨' 얘기까지를 꺼내... 그 복잡한 한국 상황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었고,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스페인 사람들이 한국인들 생활을 쉽게 이해하지도 못할 터라(게다가 그런 얘기를 스페인어로 설명하기는 너무나 장황하고 힘들 터라),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테니까.

게다가 어차피 녀석은 인야의 조카뻘이기도 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면서... 녀석에게 각별히 신경을 써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그 뒤로도 스페인 친구들은 이따금 “인야, 전에 데리고 왔던 그 키 큰 조카 아이는 잘 있어?” 하고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인야는 “이젠 다 커서 대학생이 되었는걸요” 하고 웃으며 대답해주곤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며칠을 보낸 두 사람은 안달루시아 지방부터 관광하기 위해 세비야(Sevilla)로 향했다.

운이 좋았는지 현지 호스텔 주인인 아랍인 부인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고, 마침 그 한 구역 축제(플라멩꼬)를 구경할 수도 있어서, 밤에 길거리에서 '츄로스'를 먹으면서 그 현란한 플라멩꼬 춤을 볼 수도 있었다. 

인야는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렇게 멋진 플라멩코 춤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질 높은 플라멩꼬에 감동을 했던 여정이기도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그라나다(Granada)와 코르도바(Cordoba)를 거쳐, 스페인의 초고속 열차 아베(Ave)에 몸을 실었다.

이제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부인 수도 마드리드(Madrid)에 도착해, 첫날 일정을 보내던 날은, 8월 1일이었다.

 

여기까지 원고를 작성하던 인야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내가 어찌 꿈에서라도 상상했겠는가. 그런 강도 사고를 당할 줄이야…….’ 그 일로 당시의 소중한 여행 기록이 몽땅 사라져버렸다. 아무런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그 방대한 이야기를 다시 적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드리드 사건’만큼은 인생을 흔든 너무나 큰 사건이었기에, 인야는 이 부분만큼은 특별히 구체적으로 기록을 남겨두기로 했다. '이 이야기는 그동안 어디에도 밝힌 적이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내 인생 총정리 작업을 통해 공식적으로 세상에 드러내게 되는 셈이구나.’ 인야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작업에 들어갔다.

 

어쩌면 인야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일면식도 없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랍계(모로코인일 가능성이 컸다.) 청년들에 의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소리 소문 없이 세상과 작별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날 점심, 마드리드 중심가의 한 식당에서 ‘오늘의 메뉴(Menú del día)’를 배불리 먹은 탓에 저녁까지 사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00이 역시 인야의 의견에 찬성했고, 두 사람은 저녁 무렵 잠시 외출하여 근처 슈퍼마켓에서 우유와 주스, 초리소(Chorizo), 요구르트와 빵 등을 사서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스페인의 여름 햇살은 여전히 강렬했고 사방이 환했다.

밤 9시가 넘어야 겨우 해가 지는 여름이었으므로, 차라리 아직 오후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각이었다.

인야는 호스텔에서 받은 열쇠로 건물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00이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뒤, 뒤따라오던 몇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붙잡아주는 호의도 베풀었다.

그런 뒤 인야는 00이의 뒤를 따라 석조 건물의 어두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뒤에 따라 들어왔던 사람들은 역시 뒤에서 저희들끼리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는데, 스페인어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인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쓸 일도 없었다. 

이곳은 관광국이자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드나드는 마드릳의 한 호스텔이었으므로.

인야는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고, 유럽식 구식 건물의 엘리베이터가 ‘덜커덩’하는 투박한 체인 소리를 내더니... 위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인야는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뒤에 서 있는 이들에게 먼저 타라고 양보할 생각이었는데, 늘 몸에 밴 습관 같은 친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인야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눈빛이 어두운 30대 정도의 젊은 아랍인 네 명이었는데, 인야와 00이에게 각각 두 명씩 짝을 지어 이상하리만치 몸을 바짝 밀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살기를 감지한 인야가 몸을 움찔하는 순간, 그들이 무섭게 덮쳐왔다.

순식간에 한 놈은 족히 2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칼을 인야의 목젖에 들이댔고, 또 다른 놈은 뒤에서 목을 사정없이 졸라왔다.

“억!”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었다.

그 순간, 어둡고 음침한 통로에는 안타깝게도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덜커덩거리며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그 안 역시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야는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을 뿌리치려 발버둥 쳤다.

그러자 앞에 선 놈의 칼끝이 목젖에 닿았다.

온몸의 힘이 쫙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뒤에서 목을 조르는 팔뚝에 한층 더 강한 힘이 실렸다.

인야의 저항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인야는,

“사람 살려(Socorro)!”라고 스페인어로 외치고 싶었지만, 겨우,

“소(So)……” 하는 쇳소리만 새어 나왔을 뿐, 목구멍이 막혀버렸다.

‘우리가 가진 돈을 다 줄 테니, 제발 칼로 찌르지만 말아다오…….’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빌었지만,

이미 조여오는 목의 고통 속에서 이성적인 사고나 행동은 불가능했다.

언뜻 인야의 시선 저편으로 00이가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 안 돼…그 애만큼은 안 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인야는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숨을 쉬지 못하다가 마지막 물을 들이켜는 순간처럼... 암전 속으로 허우적대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희미하고 몽롱한 악몽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고통스러운 몸의 어느 한 부위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꾸만 안개 속을 헤쳐 나가야 하는 웅크린 상태 같기도 했다.

그러다 한순간, 기적처럼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잠깐 동안 너무나 깊고 편한 잠을 자다 깨어난 듯한 기묘한 기분과 함께, 자신이 차디찬 돌바닥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인지되었다.

인야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일어날 수가 없지?’

당혹감 속에서 사방을 둘러보자 비로소 그곳이 어디인지 가물가물 떠올랐고, 얼마 전에 자신에게 닥쳤던 끔찍한 순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아, 00이는?”

인야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바로 곁에 00이가 쓰러져 있었다. 아이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아, 안 돼!”

급한 마음에 겨우 손을 뻗어 아이의 몸을 만져보니, 다행히 정신이 돌아오고 있는지 피가 굳은 입술을 작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 너도 살아 있었구나! 고맙다, 정말 고맙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인야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서울에 있는 요한나 씨의 얼굴이었다.

인야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밝은 빛이 들어오는 출입구 쪽을 향해 미친 듯이 기어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후텁지근한 복도를 지나 거리의 환한 햇빛을 향해 기어가며, 인야는 건물 통로 사이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느꼈다.

‘살아 있구나! 그놈들이 나를 죽이지는 않았어.’

 

가까스로 현관문에 도달한 인야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지만, 이내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문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무심히 길을 걷던 마드릳의 행인들은 바닥에 쓰러진 동양인 사내를 그저 흘끗 쳐다볼 뿐, 누구 하나 가던 길을 멈추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저 사람들이 왜 저러지? 왜 도와주지 않는 거지?’ 인야는 타 들어가는 목청을 돋워,

“살려주세요(Socorro)!” 하고 외쳤지만,

목이 쉬어 작은 쇳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단어를 바꾸어,

“경찰(Policía)!” 하고 외쳐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인야의 손에는 호스텔 현관문을 열 때 쥐고 있던 철제 자물쇠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인야는 쇠문을 자물쇠로,

"땡! 땡! 땡!" 세차게 두들기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외쳤다.

“경찰 좀 불러주세요! 폴리시아(Policía)!”

필사적인 두드림이 통했는지, 마침 지나가던 한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급히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니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인야는 기진맥진한 채 차가운 바닥에 다시 몸을 눕히고, 멀리서 들려올 사이렌 소리를 기다렸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자, 자신들의 몸에 지니고 있던 것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이 인지되었다.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은 물론, 옆구리에 단단히 차고 있던 휴대용 가방까지 흔적도 없이 털려 있었다.

그 가방 안에는 이번 스페인 여행의 전 경비와 여태까지 안달루시아를 돌며 찍었던 사진 필름들, 수첩, 그리고 여행 중 틈틈이 남긴 메모 노트 등이 들어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경비는 물론이고 모든 기록이 다 사라졌으니, 앞으로 남은 여행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막막함도 잠시, 가슴 한구석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았잖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건졌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벼랑 끝에 서고 서야 목숨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뼈에 와닿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었는데 기절만 시키고 물건만 챙겨 떠난 강도들에게 되레 고마움까지 느껴지는, 황당하고도 모순적인 심경이 되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말로 살아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사이 00이도 바닥을 기어 인야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인야는 입술을 깨물며,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인야는 침착함을 가장한 채 00이의 떨리는 손을 꽉 잡았다.

“00아, 내 말 잘 들어라. 천만다행으로 너랑 나랑 이렇게 살아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네게 한 가지만 당부하마.”

아이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인야가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벌어진 이 일, 네가 서울에 계신 어머니(요한나 씨)에게 전화로 알릴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해. 만약 네가 이 사실을 알린다면, 아마 네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너를 다시는 외국 여행에 보내지 않으실 거다.”

그 와중에도 00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인야는 못을 박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물론 나는 이 이야기를 네 어머니에게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살아서 넘기는 거니, 나 개인적으로는 ‘참 좋은 경험을 했군’ 하고 털어버릴 생각이다. 그러니 나중에 네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할지 말지는 순전히 네가 알아서 결정해라.”

상황에 비해 다소 잔인하고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인야는 그것이 요한나 씨를 위하는 길이자, 아이를 보호하는 길이라 믿었다. 속으로는,

‘내가 참 독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랬었어. 그 당시엔 그 말까지만을 했었어. 그런데 그 뒤에, '요한나씨'한테서 그 어떤 그와 관계된 얘기가 없었던 걸로 보면, 그 녀석도 내가 했던 말이나 그 상황파악을 정확히 했던 것 같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걸 나는 짐작만 하고 있었지. 허긴, 그 집의 외아들이었던 녀석이 그 당시 열일곱 정도의 나이였으니, 내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의 정신력은 있었던 모양이고...... 나도 그 나이 때 먹었던 생각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아무튼 나도 참 웃기는 사람이다. 그 와중에도 그 아이에게, "나는 이 사고를 좋은 경험으로 돌리겠다."고 하다니......

'그런 걸 '경험'으로 봐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어쨌거나 내가 원했든 그러지 않았든 평소에는 결코 상상도 하지 않았을 엄청난 일(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잃을 뻔한)을 당했고, 그 와중에도 운좋게(?) 목숨을 건져... 그렇게 다시 살아난 꼴이니, '경험'이 아니랄 수도 없겠지?' 하는 식의, 다급한 순간은 벗어난 느낌이 들면서는,

'앞으로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런 겁도 나지 않겠군.' 하는 생각까지도 드는 것이었다.

'이런 엄청난 일을 당하면서도 살아남았는데, 무슨 겁나는 일이 있겠는가 말이다......' 하는 생각도 따라 붙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는 약간 편한 웃음을 짓기까지 했던 것 같다. 

 

 

 

b, 죽음의 문턱에서 핀 미소 

 

후에 되돌아보며 백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사실은, 인야와 00이가 억세게 재수가 좋았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죽음의 문턱에서 온전히 살아 돌아오지 않았는가.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 강도들은 처음부터 목숨까지 노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마드릳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호스텔이었기에, 가방만 빼앗아 달아났다가는 피해자들이 곧바로 소리를 질러 주변이 소란해질 것이고, 순찰 중인 경찰이 들이닥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강도들 처지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을 졸라 순식간에 기절시켜 놓고, 물건을 턴 다음 유유히 도망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기절해 있는 동안 도망치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더라도 이미 한참 늦은 뒤일 테고, 얼굴이나 인상착의를 기억하지 못하니 뒤끝도 없을 터였다.

그렇게 본다면 그놈들은 그 방면의 잔인한 전문가들일 수도 있었다.

 

인야와 00이가 호스텔에 도착하거나 점심을 먹으러 드나드는 모습을 미리 유심히 지켜보며 표적으로 삼았을 것이다. 현금을 많이 소지하고 다니는 동양인 관광객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을 테니까.

늘 수수한 차림의 인야와 달리, 여의도 부잣집의 귀공자 스타일인 00이의 옷차림은 돈이 많을 거라는 그들의 확신에 완벽하게 부합했을 터였다. 한 사람당 두 명씩 팀을 짜서 오후 내내 동향을 살피다가, 마침내 두 사람이 저녁에 다시 외출하자 미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호스텔로 돌아오는 순간, 건물의 다른 투숙객인 척 위장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따라 들어와 기회를 노린 것이었다.

그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에 인야는 우둔하게도 완벽한 조건으로 응해주고 말았던 것이다.

뒤따라오던 놈들에게 현관문까지 열어주는 호의를 베풀었고, 하필이면 내려오던 엘리베이터 안마저 텅 비어 있었으니, 강도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였을 것이다.

게다가 인야는 여행의 가장 기본적인 수칙인 ‘돈을 분산하여 소지한다’는 원칙마저 어긴 채 모든 경비를 한 가방에 몰아넣고 다닌 우를 범했다.

심지어 털린 돈이 정확히 얼마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돈에 무감각한 사람이었으니, 나중에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기조차 낯부끄러운 처지였다.

 

시간이 흐른 뒤, 다급했던 순간을 벗어나자 인야의 마음속에는 자꾸만 미련과 아쉬움이 맴돌았다.

‘진작에 조심했더라면…… 그 호스텔 건물 현관문을 열 때 단 한 번만이라도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시간을 뒤로 돌릴 수만 있다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만약 뒤를 돌아보아 수상한 모로코인 네 명이 바짝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 결코 무방비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스페인에서 5년을 살았던 짬밥도 있으니... 그들의 험악한 표정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고를 당할 운명이었는지 인야는 그러지 못했다.

더 아찔한 가정들이 꼬리를 물었다.

‘만약 그때 내가 진짜로 죽었더라면?’

인근 주민에게 발견되어 경찰이 오고, 소지품이 다 털려 신원 확인도 안 되는 상태로 시간만 끌다가 뒤늦게 한국의 형제들이나 요한나 씨가 그 비보를 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만약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깨어나고 한 사람은 죽었다면? 내가 죽고 00이만 살았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반대로 나만 깨어나고 00이가 죽었다면?’

그것은 상상 자체를 해서는 안 될 최악의 파멸이었다. 인야가 어찌 혼자 살아 돌아가 요한나 씨의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사건이 지나고 며칠이 흐르는 동안에도 00이가 큰 동요 없이 인야를 잘 따라다니고 후유증도 없어 보이는 것을 보며, 인야는 아이가 아직 서울에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열일곱 살의 나이였지만 외아들답지 않게 인야의 말귀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줄 아는 정신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두 사람 모두 멀쩡하게 깨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야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 강도들을 찾아가 고맙다고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욕하지도 말자.’

인야는 오히려 그들을 이해해보려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잘살아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 온 불쌍한 불법 이민자들이었다.

한국도 이제야 조금 잘살게 되어 이렇게 해외여행을 다니지만, 6·25 전쟁 직후에는 그들보다 훨씬 못살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보다 잘사는 이들을 부러워하다가 해서는 안 될 부도덕한 수단으로 욕구를 채운 것뿐이리라.

“우리도 좀 삽시다” 하며 억지로 재물을 나누려 한 셈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 늘 존재했던 인종 간의 마찰과 충돌, 나아가 전쟁도 결국은 그런 결핍에서 출발했을 터였다.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만약 인야가 태권도 같은 호신술을 부릴 줄 알아서 그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었다. 인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결과는 훨씬 참혹했을 것이다.

살기 위해 눈이 뒤집힌 강도들은 사정없이 흉기를 휘둘렀을 테고, 인야는 목숨을 잃었거나 최소한 평생 갈 중상을 입었을 게 뻔했다.

인야는 영화나 소설 속 무적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차라리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빨리 기절해 준 나약한 ‘약골’이었던 덕분에, 결과적으로 몸에 상처 하나 없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화를 복으로 바꾼 ‘새옹지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겁도 나지 않겠다는 묘한 용기마저 솟아올랐다.

이토록 엄청난 일을 당하고도 살아남았는데, 세상에 무서울 게 어디 있겠는가.

인야의 입가에 마침내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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