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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W WORD 질문

마태복음28:16:26 4w 질문

작성자드림캐쳐-김목사|작성시간26.06.06|조회수31 목록 댓글 0

1. 나는 현재 어떤 의심과 머뭇거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본문 16절과 17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갈릴리의 한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숨기지 않고 폭로합니다. 17절을 보세요.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여기서 '의심한다'는 말은 믿음이 아예 없어서 거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이라는 이 엄청나고 초자연적인 현실 앞에 너무 압도되어서,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가 감히 그분을 배신하고 도망쳤는데, 이 발로 그분 앞에 나아가도 되는 걸까?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나는 어떻게 서 있어야 하지?"라는 영적 주저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내 마음속에 의심이 다 사라지고, 모든 기도의 제목이 응답받고, 삶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면 그때 온전히 예배하겠다'고 말입니다. 내 믿음이 완벽해져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는 정반대입니다. "의심과 주저함이 있어도, 그 모습 그대로 나와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머뭇거리고 있는 완벽하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보고도 아직 그러냐"라며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셨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자인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믿음은 모든 의문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의문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질문이 없는 믿음이 아닙니다. 질문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는 성도님들 중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병으로 고통 받는 분이 계십니다. 여전히 자녀의 문제가 꼬여 있고, 경제적인 미래가 불안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마음 한구석에 의심과 낙심이 남아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2. 나의 삶에서 "제자를 삼는 일"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까?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19절)입니다. 기독교 저술가이자 영성가인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그의 저서 <잊혀진 제자도>에서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문제는 '신자'는 양산해 냈지만, 예수의 삶을 따르는 '제자'를 기르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천국 행 티켓만을 원할 뿐, 오늘 예수처럼 사는 법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흔히 '제자 삼으라'는 말씀을 선교사님들이나 목회자들만 하는 거창한 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 삼는 삶의 실제 모습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눈물로 신앙을 전수하는 것, 치열하고 불의한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 삶이 무너져 내린 낙심한 이웃을 찾아가 따뜻하게 위로하는 것,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설명할 기회를 기도로 만드는 것, 교회 안에서 소외된 한 영혼을 가슴에 품고 돌보는 것, 이것이 바로 제자 삼는 삶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많은 군중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깨어진 "한 사람을 예수님께 연결하는 것"입니다.

 

3. 나는 말씀을 아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부분이 더 부족합니까?

 

주님은 단지 머리로만 '알게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지키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소중히 간직하다, 보존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머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를 지나, 우리의 손과 발, 입술의 언어, 지갑 속의 돈, 시간의 사용, 그리고 거친 인간관계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진리는 지식의 양으로 완성되지 않고, '삶의 순종'을 통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너무나 '선택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를 위로하시고 축복하시는 말씀은 밑줄을 치며 좋아하지만,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은 슬그머니 피합니다. 나를 용서하신다는 복음은 붙들지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요청은 부담스러워 뒤로 미룹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교회의 진짜 위기는 세상의 핍박이나 미움 때문에 오지 않습니다. 진짜 위기는 교회가 이 '제자도'를 잃어버릴 때 찾아옵니다. 예배당에 사람은 많아질 수 있으나 참된 제자는 적을 수 있습니다. 말은 넘쳐나지만 순종은 빈약할 수 있습니다. 건물은 화려해지지만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향기는 점점 옅어질 수 있습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주님은 단순히 가르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보는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순종이 사람을 바꿉니다. 오늘날 우리는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책도 읽습니다. 유튜브도 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묻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신앙은 아는 양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순종의 방향으로 측정됩니다.

 

4.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선교지는 지금 어디입니까? (가정, 직장, 학교, 이웃)

 

5. 최근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마치 마태는 복음서라는 거대한 책의 양쪽 끝에 '함께'라는 커다란 괄호를 쳐놓은 것과 같습니다. 첫 장에서도 "함께", 마지막 장에서도 "함께"입니다. 결국 마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가장 위대한 주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사명의 자리로 파송하실 때마다 주셨던 음성도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낙심하여 도망치던 아브라함에게도, 말주변이 없다고 버티던 모세에게도, 요단강 앞에서 두려워 떨던 여호수아에게도, 겁쟁이 기드온에게도,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은 복잡한 전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마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임재의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파송의 자리는 결코 우리 혼자 외롭게 버텨야 하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온 우주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친히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현장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흔들리고 환경에 넘어집니다. 세상을 압도할 만큼 대단히 담대하지도 못하고, 때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기도 하며, 말씀대로 온전히 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며 자책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의 이 마지막 약속이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 매는 닻이 됩니다. "내가 너를 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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