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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복습- 법성게(제32차)- 이사명연무분별

작성자일화|작성시간26.06.22|조회수26 목록 댓글 0

복습- 법성게 (제32차) -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본체 현상 그윽하여 구별할 수 없는 것은

 

색즉시공과 이사명연무분별

이사명연무분별, 본체인 진리(理)와 세상만사인 현상(事) 모두 깊은 어둠처럼 그윽하여(冥然)

구별이 되지 않는다(無分別)

밝은 대낮에는 산과 강, 돌과 나무, 하늘과 땅이 모두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런데 날이 저물면 온 세상이 어둠에 덮이면서 이런 낱낱의 것들을 구별 할 수 없게 된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생사열반상공화, 초발심시변정각이 서로 같은 말이다.

어째서 같은가?

생사 열반이 서로 다르지 않고, 초발심이 바로 정각이고..

다른 말 하는게 아니다.

 

교재를 다시 보자,

우리는 하나 하나 다 분별한다.

하늘이다, 땅이다, 옳다, 그러다, 크다, 작다, 길다, 짧다...

알고 보니 어떤가?

구별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분법적 사고가 활발하게 작동할 때에는 진리와 세속이 분명하게 다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분법적 사고의 문제점을 자각할 경우 이런 모든 분별과 구별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이분법적 사고 자체가 우리의 생각이 만든 망상일 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통찰과 유사하다.

 

“일체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일체와 다르지 않으며, 일체가 곧 공이요,

공이 공 일체다.”

공이 진리요, 색이 세상만사다. 다른말인가?

다르지 않다.

이사명연무분별에서 이(理)는 본체인 진리가 공(空)에 해당하고, 사(事)는 즉,세상만사인 현상이 일체(一切)에 해당한다.

일체인 세상만사 그대로 공이다.

일체불리공, 공불리일체, 일체즉시공, 공즉시일체다

공의 경지가 따로 있나!

따로 없다.

왜? 따로 없나?

색이 없으면 공이 없다. 공이 혼자 ‘공’일 수 없다.

공이 있으니 색이 있다. 공만 있으면 ‘색’을 말 할 필요가 없다.

하여, 공의 경지가 별도로 있는게 아니다.

색즉시공, ‘공의 세계가 별도로 있다는게 아니다’를 말하고 있다.

이런 색과 공에 대한 분별에서 벗어 날 때 ‘이사명연무분별’의 통찰이 생긴다.

생사와 열반이 상공화, 생사열반이 자유자재하다.

생사에서 열반이 성취된다.

‘상공화’ 따로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도 알고 보면 항상 어디 있나!

늘 열반속에 있다. 진리속에 있다. 열반이란 현상을 떠나 열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사열반상공화’를 알면 이사명연무분령이다.

자,

명(冥)자,는 ‘어둡다, 깊다’ 로 이해가 가나?

여기서 어떻게해석하면 좋을까?

이사(理事)가 하나다. 설명은 어둡다고 하지만, 이해는 ‘하나’라는 것이다.

물, 습도, 이게 진리인데, 이 진리속에서 이슬,구름, 비.. (事)등이 만들어진다.

진리의 세상에서 남자,여자가 따로 없는 것과 같다.

욕계에서 욕망, 몸, 정신이 있고,

수행을 하여 색계로 올라가 욕망이 빠지니 남.여가 없다.

그만큼 청정해 진다는 것이다. 내가 그 만큼 밝아진다는 것이겠지!!

 

생사,고통의 세계, 본질을 떠나서 있는게 아니다.

진리의 세계는 현상을 떠나서 별도로 있는게 아니다. 둘이 아니다. 이게 바로 ‘명연’이다.

 

그리고 명(冥)을 또 우리는 어디에 쓰나?

‘명상’할 때 ‘ 冥 ’을 쓰고 있다. ‘눈 감을 명’

눈 감는 이유가 뭐냐?

‘그치라는 것이다.’

'끄달리지 말아라, 멈춰라'는 것이다. 무엇을 봐도 끄달리지 않으면 멈추는 것이다.

눈뜨고 멈추는 방법이다. 눈 뜨고도 눈 감는 것이다.

눈으로는 눈을 감으면 되고, 입으로는 묵언하고, 생각을 나타내는 말인데, 묵언하라는 것은

내 생각에 자꾸 끄달리지 마라고 해서 묵언하라 한다.

눈 감으라는 말과 같다 다른 말 아니다.

생각을 계속 따라가면 번뇌망상이고,

돌이키면 더 이상 안 끄달린다. 밖의 경계가 공한줄 알면 끄달리지 않는다. 

조견하라는 말이다. 똑 같은 말이다.

눈감아라!, 묵언하라!, 명상하라!, .. ... 다 같은 말이다.

조견오온하면 개공이다. 그러면 '도일체고액'이다.

그러니 '이사명연무분별'이다 라는 말과 다른 말 아니다. 

 

우리는 앞에 '뭐가 있는데 어떻게 안 봅니까?' 한다.

보여서 보는게 아니다. 내가 분별하는 것이다. 그걸 멈추라는 것이다.

예로,  똑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제각각 보는게 다 다르다. 지생각, 지 분별로 본다. 의식한 것만 보인다.

다른 건 물어봐도 모른다. 봐도 못본다. 식별하는 것만 본다. 

그런데 명상은 그냥 보기한 해야 한다. 보이는 것만!!

 분별하면 안된다. 그렇다고 '멍' 때리기만 하면 되나!

 

명상 (冥想)에서 '상'은 어떻게 하나?

상은 조견하는 거다. 보고 듣는데 식별하지 마라!, 보면 볼 때 , 보는 이것이 무엇인가? 돌이켜라.

대상에 끄달리는 그것을 봐야 한다. 그래야 안 끄달린다.

뭘 조견하나? 수상행식을!! 듣는데, 느끼는데.. 이것이 뭔가?

 

경전에서는 '지관(止觀)'이라고 말한다.'참선' 다 같은 말이다.

'멈추고 보는 것' 멈추고 그쳐서 식별하지 않는 것 끄달리지 않는 것,.. 그리고 보라고 .. 하는 말이다.

이 개념을 바로 알고 하면 공부가 더 잘 될 것이다.

 

본질의 세계는 현상을 떠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명연'을 제대로 알자.

예를 들었던 큰방/작은방을 떠 올리면, 방의 크기는 실체가 없다. 공한데 우리는 크네, 작네 한다.

극락과 지옥의 실체는 있나?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크다/작다 의 생각이 왜 다시 바뀔까?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다, 작다는 생각이 바뀐다.

'공'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사명연무분별'이다. 

 

- 화엄오교지관의 사리원융문

 대승기신론에 실린 가르침으로 제시된 사리원융문에서 '사와 이가 원융하다'라는 통찰에서 인용된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라는 용어로 인용한 설명을 살펴보자면,

심진여문은 이(理)인 공(空)이고, 심생멸문은 사(事)인 유(有)에 해당한다.

이런 공과 유는 둘이 아니고 무애하다고 설명하면서, 물과 파도의 비유를 들어 공과 유가 무애한 이유를

설명한다. 

물은 공을 비유하고, 파도는 유를 비유한다.

물이 이(진리)에, 파도는 사(事)에 해당한다.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날 때 바닷물과 파도는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 본질을 추구해 들어가면 물이라는 

점에서 일치하듯이 우리가 체험하는 갖가지 사물과 사태가 존재하지만 그 낱낱의 본질이 궁극적으로

공하다는 점에서 차이가없다.

생사열반상공화-생사와 열반이 구별되지 않듯이, 이사명연무분별- 진리과 현상이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 그대로 진리다. 

이 사바세계 알고 보면 곧 극락이고 지옥이다. 어디로 갈지는 본인이 결정하면 된다.

제발 남탓 하지 마라!

 

- '화엄경문답' 의 이사명연무분별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하듯 '시즉시이,이즉시사' 이고 '화엄오교지관'의 대승종교에서 

이(理)인 공(空)을 물, 사(事)인 유(有)룰 파도에 비유하듯이 이와 사는 원융무애하다.

그러데 의상은 이와 사가 상즉,상융하는 이치는 삼승의 가르침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간 통찰을 제시한다.

보법인 화엄의 통찰이다. 화엄에서 理와 事가 상즉,상입하는 이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삼승은 성문,연각,보살승으로 하나하나  구별되고,

화엄은 일승으로 하나다. 구별없이 하나다.

그럼 반야와 화엄은 어떻게 구별하나?

금강경에서 부정,부정한다 "무"다. 화엄에서는 '하나'다고 한다.

삼승에서 事와 진리가 같지 않지만 상즉,상융하여 장애없이 통한다.

화엄에서는 서로서로 각각 틀리지만 다르지 않다. 모든게 하나다. 마찬가지로 '시계' 하는 들면 시계 아닌게 없다.

모든게 시계다. 따로 있는게 아니다. 같은 소리다.

삼승, 진리 현상이 따로 있지만 다 통한다.  화엄, 진리속에 현상이 있고, 현상속에 진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마음으로 보려면 모든 것이 마음이 되고, 물질로 보면 모든 것들이 물질이 된다. 理와事가 분별이 안된다.

화엄에서 진리와현상, 이게 다르지 않다.

事의 이면에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현상이 곧 진리다. 진리가 현상소게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의상이 말한 '이사명연무분별'의 진정한 의미다.

 

시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 시방 부처, 보현보살 대인들의 경계일세

 

법성게를 시작하면서 의상의 과문에 대한 열거한 정리가 위에 있으니 먼저 참고 해 주시길 ^^

 

법성게의 과문에서 18번째 시불보현대인경 까지가 자리행에 해당하는 문구다.

1-3구의 마무리하는 4구 '증지소지비여경' - '증득한 지혜로 아는바, 다른 경계가 아니다 '라는 문구가 있다.

18구 시불보현대인경 - 부처와 보현보살의 경계로 6-17구의 마무리 하는 구절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른점이 뭔가? 깨달음의 차이다. 이걸 알면 '시불보현대인경'이다.

 

여기서 '보현보살'은 어떤분인가? 알아보자.

시불은 모든 부처님을 의미한다.  화엄의 주존법신 비로자나불의 좌우보처가 문수/보현이다.

문수는 지혜를 보현은 행원을 상징한다. 

일반적으로 문수를 우위에 두지만 화엄경에서는 보현의 역할이 월등히 많다.

보현은 산스끄뜨리어로 Samantabhadra 의 번역어다.

그 뜻으로는 '이 세상 어디에서든 나타나시는 상서롭고 훌융한 보살'을 칭한다.

보현이라 부르는 이유는 보편 법문을 하시기 때문인데 '두루하다'는 의미인 '普'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편재하기 때문이고, 어디든지 계시면서 어디든지 행을 한다고...

 

부처의 세계를 나타내면 보현이다.

부처의 세계가 중생세계로 나타날때 보현으로 나타난다. 없는 곳 없이 부처가 나타날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겠다.

시불보현이 따로 있는게 아니고 하나다.

밖으로 저절로 나타나는게 '보현행'이다. 그러니 열반과 생사가 자유자재하다. 십불과 대인들의'

경계다. 

그런 시불과 보현이 되라는 말이다. 다른 말 아니다. 이걸 알면 '대인'이다.

자,

그러면 이런 대인들의 경계(성불)을 알면 어떻게 중생을 돕나?

다음 구절이 뭐냐?

이 다음은 이타행이다.  성불하고 나면 이타행을 한다.

 

우리가 처음 절에 올 때 '복 주세요!' 하고 온 것기  첫 계기다.

복 받으러 왔던 것도 결국에는 '자기 좋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 보라!

자기 복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오래 절에 다녀도 '복주세요!' 한다.

이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복은 지은 만큼 받는다. 태산같이 지었다 해도 복은 결국 없어진다.

그 복이 다하면 인연따라 간다.

고통받고, 복 짓고.. 고통받고, 복 짓고.. 

그래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한다.

발심한다. 다른 걸 찾아서..

이렇게 자꾸 변해야지..

초발심이 정각이라고.. 공부하지 않았나.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게 뭐냐? '회향'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향해서 성불하면 끝인가?

아니다.

중생구제다. 이타행이다.

다음구절에서 이어진다.

경전에서도 이미 다 설명 했다.

'중생구제' 하니, 또 어떻게 중생구제 하나? 생각한다.

'어떻게 중생 구제 하나?'

부처님 한테 중생이 있겠나?

알고 보면 부처님이 법문을 해도 설한 바 없다. 가만히 보면 또 법문 아닌 게 없다. 

바람이 불어도 법문이라! 비가 내려도 비는 그 자체로 법문하고 있다. 그걸 알아 들으면 '부처'다.

그게 진리의 작용이다. 현상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알아듣는 순간에 보살이다. 

부처님도 그와 같이 하고 있다!

 

다음 시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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