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열왕기하 9장 (구약 575P)
2016. 6.16(목) / 제목 : 엘리사 행전(8)
제가 열왕기하 2장부터 새벽설교 제목을 엘리사행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인류의 역사는 군주나 특정한 개인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신다는 뜻입니다.
나라의 군주들이 자기들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우상을 숭배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할 때 이 모든 것을 가만히, 그러나 철저하고 냉정하게 바라보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때가 되어서 당신의 손에 들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빼어드십니다. 이 칼은 아합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향합니다.
엘리사가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예후를 통해서 혁명을 이룰 것을 요구합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어떤 고귀한 영감을 받아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의 이데올로기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혁명은 그것이 일어나게 된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는 독재와 압제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예후의 혁명이 바로 그런 유의 혁명입니다(T. R 홉스).
혁명은 하나님이 칼을 빼드시는 날이요, 심판의 날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억울한 이들을 신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혁명은 축제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호와의 날이 가진 양면성은 믿는 자들에게는 복된 날이 되지만, 심판의 대상자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의 날이요, 기회가 박탈당하는 날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기회의 시간이요, 은총의 날, 회복의 날, 신원의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엘리사로부터 소명을 받은 선지생도의 입에서 아합의 집안에 심판이 선포됩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7절)
아합 집안에 임한 여호와의 신탁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정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합은 병거에서 흘린 피를 개들이 와서 핱았지만 그의 아내인 이세벨은 개들이 달려 들어서 먹어치울 것이라는 무섭고도 끔찍한 신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여왕의 신분임에도 장사조차 못지내게 만듭니다.
이 시대 당시의 개들은 길거리와 골목을 배회하면서 쓰레기를 뒤져서 먹고 사는 지저분한 짐승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온갖 옷을 입혀가면서 산책을 하거나 심지어는 잠자리도 같이하는 반려동물과는 천지차이의 대우를 받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시체가 노상에 방치되는 일은 그의 죽음에 일말의 경외감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원칙적으로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봤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매우 주의깊게 다루었습니다. 그 시체 또한 그 사람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전 10세기경의 앗수르 기록을 보면 앗수르바니팔이 대적의 시체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면서 벌을 준 기록이 나옵니다.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앗수르 저주는 '개들이 그의 매장하지 않은 시체를 갈기갈기 찢게 하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우리가 보다 겸손하게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예후는 함께 모인 장군들에게 곧 바로 왕으로 추대를 받습니다. 그레이라는 학자는 이 때 모인 군사회의를 두고 '이미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는 해석을 내어 놓습니다. 성경이 이 해석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북이스라엘서 벌어진 여태까지의 왕위찬탈 과정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역사를 보면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이 피를 흘렸고, 나봇의 포도원에서 그 피가 개들에 의해서 핱아졌는데 이제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의 대에 이르러서 동일한 역사가 반복됩니다. 25절입니다.
'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요람을 시작으로 아합과 함께 혼인을 맺고 결혼을 한 유다의 왕 아하시야도 살해가 됩니다. 아하시야의 죽음은 악인과 함께 동행하지 말 것을 권면한 시편 1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함께 가야할 사람과 가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하는 지혜가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그리고 가야할 장소와 가지 말아야 할 장소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하시야에 이어서 요람의 어머니이자 두로의 공주였던 이세벨이 예언대로 죽임을 당합니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예후를 보고 담담히 화장을 하고 있는 이세벨이나 그래도 한 때는 왕비였던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하게 음식을 차려서 먹는 예후나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냉소와 무감동, 무심함이 만연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감동이나 연민을 못느끼는 시대는 살아보고 싶은 가치를 상실한 시대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우리시대를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요람의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지만 이 때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린 모든 시대가 심판의 시대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모든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서 잠깐 연민했다가 금방 되살아나는 냉정함은 우리가 가진 완악한 마음의 주소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시대마다 '곡성의 시대요, 하나님을 상실한 시대'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합니다.
성도여러분! 심판은 직접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이미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잔인하고 끔찍한 나날들이 심판을 불러왔다면 지금의 우리시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고 쌓고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 보다 더 악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때가 지금 아닙니까? 주께서 우리와 이 땅을 살려주시고, 회개하는 이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최대한 비슷한 나라가 이 곳과 섬기는 가정, 그리고 교회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