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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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문객 작성시간17.11.29 말을 자꾸 하자니 그렇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그렇고... 참...
용어가 많은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필요하면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도 있기는 한데요. 말을 만들어도 적정해야 하고, 기존의 것과 조화롭고 통합적인 이해를 지향해야 합니다. '고집멸도'에 이미 번뇌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번뇌의 위치는, 고집멸도 중 '집'에 해당합니다. 번뇌는, '원인'이거든요. 그런즉 누집멸도는, 적정하게 만들어진 용어로 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요... 승려를 포함한 전문가 그룹에서, 말을 좀 무책임하고 부주의하게 만들고 주장한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안타깝네... -
작성자 방문객 작성시간17.11.29 ===
일상의 분노와 탐진치에서 진의 자리를 따로 잡아주는게, 이해가 잘 되던가요?
알아차림 연습으로 분별력과 집중력이 좀 개발되서요. 4념처 신수심법 중 심(마음)을 나름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나름 선명하게 알아차려질 때, 바로 그 순간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으면요. 강하게 붙잡을수록 즉 집중이 강해질수록, 점차 개성이 상실됩니다.
'개성이 상실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요. A분노든 B분노든 집중해 들어가면, 일상처럼 A분노와 B분노와 같은 분별이 성립하지 못하구요, C라는 상이 성립된다는 겁니다. C라는 공통된 모습을 가진다는 거죠. 그래서 위계를 상정할 수도 있고, 상정할 필요성도 있는 겁니다. -
작성자 고요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11.29 누집멸도에 대하여
번뇌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저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고집멸도 다음에 누집멸도가 나오는 경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우선 찾아보니, 사문과경(D2)의 97절, 웨란자 경(A8:11)의 14절, 두려움과 공포 경(M4)의 31절에서 고집멸도가 나오고, 그 다음에 누집멸도가 나왔습니다. 그 밖에 여러 경전에서 고집멸도 다음에 누집멸도가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그 경전들에서 왜 고집멸도 다음에 누집멸도를 말씀하셨는지, 그 부분을 아직은 잘 모릅니다.
인식과 행위
저는 이제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갈애 상태의 마음이다.’ 하고.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인식하고 행위하더라도 나는 갈애 상태에서 -
작성자 고요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7.11.29 인식하고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화내는 마음을 품는 것은 갈애를 형성하는 ‘탐, 진, 치’의 자리가 아니고, ‘수 → 애 → 취 → ...’에서 취(取)의 자리라고 이해합니다. 이 취의 자리가 신구의 삼업이 행해지는 곳이라고 이해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화내는 마음은 신구의삼업 중에서 의업(意業)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업은 ‘십선업, 십악업’의 위치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참고로 이런 십악업 중의 의업의 제거는 사념처 수행으로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탐진치의 멸진”이 열반이라고 할 때는 의업에 있는 ‘사견, 간탐하는 마음, 화내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탐, 진, 치의 -
작성자 방문객 작성시간17.11.29 위에서, 번뇌는 고집멸도 중 집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적었습니다. 고요님이 언급한 [경]에서도, 괴로움의 원인을 멸했다는 취지에서 번뇌의 소멸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번뇌 중 '만'이라는게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라는 용어는요. 천년이 넘게 사용되어 왔구요. 그 용어에 사용된 글자만으로 살펴도, 이해를 그르치게 할만한 그 어떤 위험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멸도성제'라는 별도의 용어를 만드는 것은, 불필요한 혼동만 만드는 것으로, 지극히 오만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이제는 누집멸도 내지 누집멸도성제라는 용어도 따로 만듭니까? 장난도 아니고 도대체 뭐죠? -
작성자 방문객 작성시간17.11.29 고멸도성제라는 이름을 만들어 놓으니까...님이 위의 꼬리말에서 인용한 [경]등에 나오는 '괴로움을 멸하고 멸하는 길'과 '번뇌를 멸하고 멸하는 길'이라는 설명에, '괴로움을 멸하고 멸하는 길'은 '고멸도성제'이고 '번뇌를 멸하고 멸하는 길'은 '누집멸도성제'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는 것 아닙니까? '번뇌를 멸하고 멸하는 길'에는 집에 해당하는 용어는 없잖아, 지금과 같은 조어의 원리로라면 누집멸도성제가 아니라 누진멸도성제가 되어야 하는데요. 그래도 역시 옥상옥입니다. 왜 번뇌에만 진멸이라고 해야 되요? '진(다함, 끝남)'이라는 글자만 쓰거나 '멸'이란 글자만 붙여야지... 도대체 이해는 등한시하고 얼마나 만들어야 만족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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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문객 작성시간17.11.29 그렇게 글자만 가지고 닥치는 대로 만든 용어가, 무슨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거나 뭐 그런게 있습니까? 바른 이해의 장애였던 기존의 용어를 지양하는 효과가 있습니까? 오히려 도성제등을 고멸도성제등이라고 칭하면요, 대다수에게 불필요한 혼동만 일으킵니다. 특히 '고집멸도 말고 누집멸도도 있다'는 식의 표현은요. 더 많은 혼동을 일으켜요. 번뇌는 일차적으로 고집멸도의 집에 상응하는데, 고집멸도에 갈음한 누집멸도를 말하면, 일차적으로 집의 결과가 누라고 착각하기 쉽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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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의 3업이 애는 아니고 취에만 해당하는지 의문인데, 실제적 필요성등은 실참의 문제인 거니까, 그냥 넘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