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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론 肇論] 종본의 宗本義 번역과 해석

작성자방문객|작성시간08.08.23|조회수558 목록 댓글 1

 
  [바로 잡는 논의] "가르침의 근본 뜻"   후진국 장안 사람, 석승조 지음
 
  '논할 바 없는 본래 없음'이 실제 모습이라, 법은 성품이 비어 있어 고정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차적 요인과 함께 하기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부차적 요인과 함께 하기에 드러날 뿐이라면, 부차적 요인과 함께 하여 드러나기 전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부차적 요인과 함께 하지 않으면, 스러질 수 밖에 없다. 스러진다면, 참으로 있는게 아니다. 참으로 있다면,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지금 무언가 있다고 알더라도, 그 무언가는 스스로의 성품에 따라 있는게 아니다. 스스로의 성품에 따라 있는게 아니니, '성품이 비어 있다'고 말한다. 성품이 비어 있어 성품을 말할 수 없지만... '성품이 비어 있어 성품을 말할 수 없는 것'을 두고, 단지 이름하기를 '법의 성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법의 성품을, '실제 모습'이라 일컫는다. 결국 실제 모습이라는게 없으니, 없음을 가지고 추측하는게 아니라, '본래 없음'이라고 이름한다.
 
  '있지 않다' 내지 '없지 않다'는 말은... '이 세계의 실재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이 세계의 이면에 불변하는 실재가 있다는 견해들이 말하는, 있음' 혹은 '불법을 그릇되게 이해하거나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들이 말하는, 없음'과는 같지 않다.
 
 법을 살핌에, 있음으로 있음인 즉시 없음으로 없음이고, 그 없음도 있는게 아니면... '마음이란 법'의 '실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있음을 살피더라도 모습을 취하는 바 없으니, '법의 모습'은 '모습이 없는 모습'일 것이다. 성인의 마음도, 머무는 바 없음에 머문다.
 

  일체 불법은, '성품이 비어 있음'을 살펴 얻는 지혜이다. 성품이 비어 있음이, 법의 실제 모습이다. 법의 실제 모습을 알면, 바르게 살핀 것이다.
  만약 불법이 제각각 다른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릇된 견해를 가진 것이다. 가령 아함부 경전에서는 반야부 경전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일체 불법에서, 법을 살피는 일은 다르지 않다. 단지 서원의 크고 작음이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방편반야'는, '큰 지혜'를 칭한다. 법의 실제 모습을 반야라 이름한다. 모습이 아닌 것을 능히 알게 하니, 방편으로서의 공덕이다.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방편이라 이름한다. 중생과 함께 함에 바르기만 하니, 반야로서의 힘이다.
  방편반야의 반야로서의 측면으로 비어 있음을 살피면서, 방편반야의 방편으로서의 측면으로 있음을 넘어 간다. 있음을 넘어감에 있어, 애초에 허망함에 미혹되지 않으니... 있음만이 드러나도 휘둘리지 않는다. 있음을 꺼리지 않고 비어 있음을 살피니, 비어 있음을 논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한번의 알아차림에 반야와 방편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이름한다.
  한번의 알아차림에, '반야와 방편의 함께 함' 즉 '방편반야'가 갖추어져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열반, 소진됨이란 무엇인가?
  단지 속박이 소진되어, 생사가 온전히 스러짐이다. 그래서 '소진했다'고 이름할 뿐, 소진하여 도달할 바는 따로이 있지 않다.

 
 
 
  [肇論] "宗本義"   後秦 長安 釋僧肇 作
  [바로 잡는 논의] "가르침의 근본 뜻"   후진국 장안 사람, 석승조 지음
 
  '석승조'의 "석"은 '석씨 문중 사람'임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문중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직 부처님만의 제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법명 앞에 '석'을 붙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심지어... 출가하기전 세속에서의 성씨를 법명 앞에 붙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는...소위 ['가(家)'사상], 즉 ['가(家 : 문중)'를 중시하던 중국 전통 문화]의 반영이다. '가(家 : 문중)'는, 단순히 혈족을 범위로 하는 것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제자백가'의 '가(家 : 문중)'에서 알 수 있듯... 일종의 학파도, '가(家 : 문중)'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경우... 학파는, 종교비밀결사에 준하는 지식비밀결사의 성격을 띄게 된다. 각종의 의무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학파뿐만이 아니라, 송대에는 '천자 문중 사람'이라는 말도 있었다. 과거시험으로, '천자에 의해 등용된 관리'를 일컫는 용어이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준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는 말과 같이, 가르친 이보다 등용한 이를 더 따르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승조는 구마라집에게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마라집은, 기본적으로 반야공관에 충실했던 분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마라집에게 배운 승조가 저술한 조론의 내용을 번역함에, (금강경을 위시한 반야부 경전과) 반야공관 특히 '나가르주나(용수)'의 [중론]을 염두에 두고 행하였다.
  어쨌든... 구마라집은 반야공관에 충실했던 분이고, 승조는 구마라집에게서 배운 사람이므로... "宗本義(가르침의 근본 뜻)"에서의 "宗(가르침)"은 중관학파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cf. 구마라집은, "경전의 대규모 번역"만으로도 이미 대보살의 반열에 드는 분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금강경은, 구마라집의 번역이다. 구마라집의 금강경 번역은 참으로 탁월하다.

 
  중국의 각종 문헌은... 도입부의 총론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조론 역시 도입부의 총론은... 해당 논서의 전체적 내용을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지침이 되는 내용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론의 총론에 해당하는 "가르침의 근본 뜻(宗本義)"만이라도 한번 해석해 보았다.
 
 
 
  本無 實相, 法性 性空.
  [본래 없음]이 [드러남의 실제 모습]이니... [법의 성품]은, [성품이 비어 있는 것]이다.

 
  왜 하필 [본래 없음 : 本無]이라 이름했는가?
  "없음"이라는 이름을 굳이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없음"이면 "없음"이지, "본래 없음"은 무엇인가?
 
  위의 글귀를 설명하는 아래 글귀에서 나오듯...
  [드러나기 전에는 있지 않음 : 未生無有]이기 때문이다. 있음이 없으면, 없음도 없다. 그렇기에 '본래 없음'이다.
  또한... 없음을 가지고 추론한 것이 아니라, [실제 모습]은 스스로 없기 때문이다. : 實相自無, 非推之使無 : '연기의 이치'에 따라... 스스로 있음일 수도 없고, 스스로 없음일 수도 없기에... '본래 없음'이다.
 
  위의 '상(相)'은 무엇인가? 구마라집본 금강경에서 알 수 있듯... 구마라집은, '표상'등은 물론 '상온(산냐 : 상태 파악과 생각)'도 상으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여기서의 '상(相)'은... 대상은 물론 자신과 자아에 대한 표상 혹은 상태 파악등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결국 '실상(實相)'이라 함은, "(법의) 여실하고 참된 모습"이라는 의미는 물론, "(부처님의) 위 없는 지혜로 파악한 상태"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어려울 수 있는데... '실상(實相)'은 단지 그 이름이 '실상(實相)'일 뿐이라, "(부처님의) 위 없는 지혜로 파악한 상태"를 떠나 논할 그 어떤 '실상(實相)'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위의 '법(法)'은 무엇인가? '법(法)'이란, 지혜는 물론 어리석음도 포함한 일체의 드러남이다. '실상(實相)'은 물론 '허상(虛相)'이라도 '법(法)'이다. '실상(實相)'이라는 이름은 물론, '허상(虛相)'이라는 이름이라도, '법(法)'이다.
  결국 '법의 성품(法性)'이라 함은, '법(法)의 실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품이 비어 있는 것(性空)'은, '법(法)의 실체가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비어 있다(空)'는 것은...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니... '없다'등의 뜻일 수도 있고, '무애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위의 내용, 즉 위의 글귀는... "가르침의 근본 뜻(宗本義)" 중의 "가르침의 근본 뜻(宗本義)"이다.
  { [본래 없음]이 [드러남의 실제 모습]이니... [법의 성품]은, [성품이 비어 있는 것]이라 한다. }
 
  緣會 一義耳, 何則?
  (위의 내용은) ['부차적 요인' 즉 '연'과 만났다]는, [한가지 뜻]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一切諸法 緣會而生. 緣會而生 則 未生無有, 緣離則滅. 如其眞有 有則無滅.
  일체의 여러 법은, 부차적 요인과 만났으니 드러난다. [부차적 요인과 만나서 드러난다]는 것은, 곧 [드러나기 전에는 있지 않다]는 것이니... 부차적 요인과 함께 하지 않으면, 곧 스러진다. (하지만) 참으로 있다면, 있음이 스러지는 일은 없다.
 
  승조는...
  "가르침의 근본 뜻(宗本義)" 중의 "가르침의 근본 뜻(宗本義)", 즉 { [본래 없음]이 [드러남의 실제 모습]이니... [법의 성품]은, [성품이 비어 있는 것]이라 한다. }는...
  단지 ['부차적 요인' 즉 '연'과 만났다]는 한가지 뜻을 의미할 뿐이라고 말한다. 즉 [소위 "속제"의 뜻]이라는 의미이다.
 
  소위 진제가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게 아니다. 속제의 뜻이 진제다. 멸성제는 고성제에서 도출된다. 고성제의 뜻이 멸성제이다. 그리고 고성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집성제와 도성제이다. 그래서 화엄은, 사성제는 단지 고성제라고 말한다.
  화엄조차 고성제이다. 한량 없는 어리석음이 한량 없이 펼쳐진 장엄함... 사사무애... 그것이 화엄이다.
 
  중론은, '연기'를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해 나간다. 인연이 바로 속제다. 어떻게 보면... 조론은 [론]이 아니라, 중론의 [소]정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등 연기의 언명에서... '이것'과 '저것'을 각각 '인(因)'과 '연(緣)'이라 이름한다.
  보다 세부적으로 적자면... 연기는 "이것을 조건으로 저것이 있다"등의 언명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언명에서, '이것'에 '인(因)'이라는 이름을, '저것'에 '연(緣)'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인연(因緣)'이라는 연기의 성립에 있어... '인(因)'은, '연(緣)'보다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요인을... '연(緣)'은, '인(因)'보다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요인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인(因)'과 '연(緣)'의 보다 세부적인 분별에도 불구하고, [연기의 평등함] 즉 ['인(因)'과 '연(緣)'의 평등함] 곧 ['인(因)'과 '연(緣)'의 함께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인(因)'이 없으면 '연(緣)'이 없고, '연(緣)'이 없으면 '인(因)'도 없다.
  그러하다면, 굳이 '인(因)'과 '연(緣)'을 세부적으로 분별할 까닭은 뭔가? '인(因)' 즉 수행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因)'과 '연(緣)'은 함께 하므로, '인(因)'은 '연(緣)'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 흡사 소환하는 마법처럼... 그러한 힘이 있기에, '인(因)'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인(因)'은 '연(緣)'을 소환하여 '과보(결과)'를 산출해 낸다. 즉 ['직접적' 원인]은 ['간접적' 원인]과 함께 할 때에만 드러날 수 있으며, [직접적 '원인']은 [간접적 '원인']과 함께 하여 [결과]를 산출한다. 결국 인과에서, 원인 중 수행에 상응할 수 있는 것을 '직접적' 원인이라 이름하여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因)'을 '직접적 원인'이라 하고, '연(緣)'을 '간접적 원인'이라 한다.
 
  또한 그러하다면, '인(因)'과 '연(緣)' 중 하필이면 ['연(緣)'과 만났다 : 緣會]는 표현을 쓴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는 두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인(因)'과 '연(緣)'의 차별을 허물어... '무아의 교리'에 따라, '인연(因緣)'에서의 '인(因)'에도 '연(緣)'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을 수 있다. 둘째... 소위 실상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으므로... '형성(업)'의 측면이 아니라, '조건(연기)'의 측면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판단하건데... 두번째일 가능성이 더 많다. 조건으로서의 측면을 드러내면, 평등함이 강조되기에 이미 무아의 교리는 충족한다. 게다가 소위 실상을 논함에... 아래에 나오는 "마음법의 실상(識法實相)"이라는 표현에 비춰, 승조는 ['인(因)'의 공함]과 ['연(緣)'의 공함] 중 ['인(因)'의 성품이 공함]이라는 측면을 더 강조하려는 듯 하다. 결국 '연(緣)'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감춰진 '인(因)' 즉 '행자 자신(조론을 읽는 이)'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 것이다. 직접적인 요인이 부차적인 요인에 좌우되는 꼴을 생각해 보라. 주인이 종의 말에 좌우되는 일은, 일종의 블랙코미디이다. 대단히 역설적이다. 참으로 무아이지 않은가?
 
  [일체의 여러 법은, 부차적 요인과 만났으니 드러난다 : 一切諸法 緣會而生]은 어렵지 않다.
  일체의 드러남은 연기에 따른다. 연기에 따르지 않으면... 생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불자의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자의 믿음은 관찰로 확신할 수 있다. 더나아가 관찰은, 마음의 일어남을 알게 한다.
 
  [일체의 드러남은 연기에 따른다 : 緣會而生]는 것은, 곧 [드러나기 전에는 있지 않았다 : 未生無有]도 어렵지는 않다. 부차적 요인과 만나야만 비로소 드러난다면, 드러나기 전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未生無有 : 드러나기 전에는 있지 않았다]의 해석을 두고 고민을 좀 하였다. [未生無有]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아직 생하지 않았으니, 아직 드러나지 않았느니...있음이 없다, 있지 않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없음과 있음은... 생하지 않았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해석이 보다 깊은 뜻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지만... [未生有無]가 아니라 [未生無有]라는 점, 연기의 네가지 언명에 있음과 없음이 있다는 점, 전반적으로 있음과 없음에 비중을 두어 서술을 이끌어가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가장 무난한 해석인 전자에 따랐다.
   어쨌든... 채택한 해석에서 주목할 것은... "연기에 따라 드러났기에(생하였기에),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즉 "연기에 따라 드러나지 않았다면, 있음은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를 두고... "연기는, 있음의 성립을 결정한다"고 한다.
 
  [무엇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드러난다면, 무엇과 함께 하여 드러나기 전에는 단지 있지 않았으므로, 그 무엇과 함께 하지 않으면 스러진다. : 緣會而生 則 未生無有, 緣離則滅] 역시 별로 어렵지 않다.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연기에 따라 드러나 있게 되었으니... 연기에 따라 스러진다면, 있을 수 없다. 이를 두고... "연기는, 있음의 해소를 결정한다"고 한다.
 
  "연기는, 있음의 성립을 결정한다"와 "연기는, 있음의 해소를 결정한다"는 두가지 사실에서... 다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있음이란... 그 성립과 해소 모두 연기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있음은 그 자체의 성품으로 성립하고 해소되는게 아니라, 단지 연기에 따른다. 따라서 있음의 '성품(실체)'은 연기다. 있음의 성품은, 있음이 아니다.
  위의 내용에서, 철저히 있음을 떠나지 않음을 살펴야 한다. '있음이 없다'고 하여, 곧바로 '없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비약하지 않는다. [없음은 있음에 대(對)하므로, 있지 않으면 없음이다 : 있음과 없음의 합집합은 전체집합이다]는 ["(불법 즉 연기를 떠나) 별도의 (선입관에 따른)"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판단을 잘 살펴서 경계해야 한다. 판단은 산냐다.
 
  엄밀함으로 보자면... [무엇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드러난다면, 무엇과 함께 하여 드러나기 전에는 단지 있지 않았으므로, 그 무엇과 함께 하지 않으면 스러진다. : 緣會而生 則 未生無有, 緣離則滅]라는 표현은 좋지 않다. 이러한 측면을 살피는 것은, "논의의 평면" 즉 "불법을 드러내는 이의 선택"을 놓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중론은... 논리라는 형식으로, 판단 즉 산냐를 건드리기에... 대단히 엄밀하다. 중론이라면... [함께 하여 드러난다]와 관련하여, ['함께 함'은 함께 함이 아니고, '드러남'은 드러남이 아니다]는 식으로 서술할 것이다. 하지만 승조는 조론을 서술함에, 있음과 없음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듯 하다. 이러한 점은... [참으로 있다면, 스러짐이 없다 : 如其眞有 有則無滅]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드러남(生)'의 부정을 그냥 '스러짐(滅)'으로, '만남(함께 함 : 會)'의 부정을 그냥 '헤어짐(함께 하지 않음 : 離)'로 서술하고 있다.

 
  [드러남의 부정은 스러짐이고, 만남의 부정은 헤어짐이지... 뭐 다른게 있나?]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다른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지 않은 점은 있다...
  '드러남'의 부정이, 곧바로 '스러짐'은 아니다. 단지 '드러나지 않음'이다. '있음'의 부정은, 곧바로 '없음'이 아니다. 단지 '있지 않음'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스러짐'의 부정은 '드러남'이 아니라 '스러지지 않음'이고, '없음'의 부정은 '있음'이 아니라 '없지 않음'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소위 "수행의 실제"와도 관련이 있다. 있음과 없음으로 수행하는 예를 생각해 보자. 있음을 파악할 때는, 있음을 떠나지 않는다. 없음을 파악할 때는, 없음을 떠나지 않는다. 무엇을 파악할 때는, 오직 그 무엇을 떠나지 않는다. 단지 떠나지 않으니, 비약하지 않는다. 비약하지 않으니, 휘둘리기만 하지는 않는다. 휘둘리기만 하지는 않으니, 조건을 파악한다. 조건을 파악하니, 무엇을 안다.
  기쁨이 있을 때, 단지 기쁨이 있음을 안다. 그 기쁨을 다른데 가져다 붙이지 않는다. "기쁨에서 생각하고, 기쁨에 관하여 생각하고, 기쁨이 가져다 주는 것을 생각하고, 기쁨을 나의 것이라고 간주하는 일"등을 하지 않는다. 기쁨이 있을 때, 기쁨을 주시한다. 형성으로 나아가지 않고, 단지 조건을 파악한다. 조건을 파악하니, 기쁨은 단지 있지 않음을 안다. 그리하여 기쁨을 안다.
  없음의 예는 좀 어렵다. 역시 [맞춤불교 2]에서 언급한 바 있는, "냄새 맡기"를... (^-^ ㆀ)
  위와 같은 훈련은 '산냐' 특히 '상태 파악을 알아가는 훈련이다. 산냐를 알아차림하다 보면, 있음과 없음은 산냐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중론과 같이 논리로 접근하여 이해할 수도 있다. 동시에 산냐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방법도 있다. '알아차림'과 '이해'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충분한 신심과 함께 한다면, 도대체 차이는 있지 않다. 왜 그런가? 알아차림이라고 포장해 봐야, 알아차림으로 안 것은 이미 산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법이 평등한 가르침이다.
 
  以此而推...
  이로서 추론하건데...
  故知雖今現有, 有而性常自空.
  비록 지금 드러나 있음을 알지만, 있음은 성품이 한결 같이 스스로 비어 있다.
  性常自空, 故謂之性空.
  성품이 한결 같이 스스로 비어 있으니, [성품이 비어 있는 것]이라 말한다.
  性空故, 故曰法性.
  [성품이 비어 있는 것]이므로, [법의 성품]이라 일컫는 것이다.
  法性如是, 故曰實相.
  [법의 성품]이 이와 같음을, [드러남의 실제 모습]이라 일컫는다.
  實相自無, 非推之使無, 故名本無.
  없음을 가지고 추론한 것이 아니라... [드러남의 실제 모습]은 스스로 없으니, [본래 없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번 문단은... 추론하고 있음을 밝히는 일에서 시작된다. 불법에서의 추론이란, 그냥 판단이 아니다. "불법(의 이치)에 따른 판단" 즉 "정사유"만을... "추론"이라고 이름한다. 정사유가 추론이지, 일상적 논리에 따른 판단은 추론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뭐...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엄별하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다... 투덜투덜 ( ̄~ ̄ 3)
  내용은 별 어려운 점이 없다. 이미 위에서 다룬 내용들이 나온다. 한번 훑어 보자.
 
  우리는 항상 뭔가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우리의 습관이다. 하지만 우리의 습관을 잠시 떠나, 위에서 다룬 "불법의 이치로 판단하건데" 즉 "추론하건데"... [비록 우리는 습관에 따라 있다고 알지만... 있음은, 그 성품이... 있음이 아니라 연기]이다. 그리고 연기가 공이다. 즉 연기에 따르는 것은 비어 있다. 왜 그런가? 연기에 따르는 것은, 단지 [緣會而生 : '부차적 요인' 즉 '연'과 만나서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드러남은 연기에 따르므로, "(드러나) 있음"의 '성품(실체)'은 비어 있으니... 도대체가 "드러나 있음"의 성품은 말할 바가 없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 성품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드러낼 필요가 있으니, [말할 바 없는 드러나 있음의 성품]을 [법성 : 법의 성품 : 연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드러나 있음"을 "법"이라고 이름한 이유는 뭔가? "드러나 있음"을 떠나 수행할 바가 없으니, "드러나 있음"을 떠나 "법"을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드러나 있음"을 "법"이라 이름한 것이다. 철저하게 수행의 관점, 그리하여 철저하게 수행자의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위 부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대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생의 수행에 있어 의지처이도록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 중생이 이해하도록 표현한 것이다. 일체 불법은 방편이기에, 중생의 이익을 위함이다. 중생이 이해할 수 없는 법은 설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비라는 이름도 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굳이 주인을 논하자면, 일체 불법의 주인은 중생이다. 소위 한소식을 떠벌리는 자들의 것이 아니다.
  이상의 과정에서 형성한 "법의 성품"이라는 이름이, "실상(실제 모습)"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따라서 "실상(실제 모습)"이라는 것은, 드러나 있음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은... 없다. 비어 있다. 고정되지 않는다. 논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없음에서 추론을 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있음의 성품'이 있음이 아니라는 점을 논함에, 철저히 있음을 떠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드러나 있음만을 가지고 논했다. 없음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측면을 놓치지 말라고... [없음으로 추론하지 않았음 : 非推之使無]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을 수 없다. 불법은 제대로 공부해야 하고, 제대로 배워야 한다. 대충 대충 설렁 설렁 넘어 가면... 일상에서 불법은 망각한 상태로, 어느덧 불법을 배우기 전의 일상적 습관에만 휘둘리게 될 것이다. 하나를 하면, 그 하나를 떠나지 않아야 하고... 그럴 때에야, 그 하나를 알 수 있다. 오뉴월 메뚜기처럼 산만하게 뛰어다니면, 하나조차 제대로 모른다.
 
  이상으로 첫번째 논점이 일단락 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 本無 實相 法性 性空 : "본래 없음"이 "드러남의 실제 모습"이니, "법의 성품"은 "성품이 비어 있는 것"이라 한다 ]를, [緣會 : '부차적 요인' 즉 '연'과 만남 : 연기]의 이치에 입각한 추론으로, 순서를 뒤집어 '性空(성품이 비어 있음)', '法性(법의 성품, 법의 실체)', '實相(실제 모습)', '本無(본래 없음)'의 순으로 도출해 내고 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 本無 實相 法性 性空 緣會 의 다섯가지 각각의 뜻이 다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렇다고 하여, 논리 전개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무턱대고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 법을 대하는 자세... 법을 대하는 "바른" 자세... 그러한 차이를 살피지 않는 자세로는, 자신의 조건에서나마 유효한 최선의 바른 앎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言不有不無者, 不如有見常見之有, 邪見斷見之無耳.
  '있지 않다' 내지 '없지 않다'는 말은, 혹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말은... '이 세계의 실재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이 세계의 이면에 불변하는 실재가 있다는 견해들이 말하는, 있음' 혹은 '불법을 그릇되게 이해하거나 인과를 부정하는 견해들이 말하는, 없음'과는 같지 않다.
  若以有爲有則以無爲無, 夫不存無以觀法者, 可謂識法實相矣.
  법을 살핌에... 있음으로 있음이 되는 즉시 없음으로 없음이 되며, 없음이라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음은... ... 마음법의 실상이라 말할 수 있다.
  雖觀有而無所取相, 然則法相爲無相之相. 聖人之心, 爲住無所住矣.
  비록 있음을 살피더라도 모습을 취하는 바 없다면, 단지 그러하므로 [법의 모습]은 [모습이 없는 모습]이리라. 성인의 마음도, 머무는 바 없음에 머문다.
 
  위에서는 [ 言 不有不無   者, 不如   有見 常見 之有   邪見 斷見 之無   耳]를 의역하였다.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있음이 아니다' 내지 '없음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있다는 견해 혹은 한결같다는 견해의 있음과 같지 않다. 그릇된 견해 혹은 끊어짐을 말하는 견해의 없음과도 같지 않다. ]
  불유불무(不有不無)라는 불법의 언명은... 유견(有見)과 상견(常見)의 "있음", 혹은 사견(邪見)과 단견(斷見)의 "없음"과는 같지 않다.
 
  있음을 말하는 유견과 상견은 무엇이고, 없음을 말하는 사견과 단견은 무엇인가?
  유견은 유가등 중국 사상을 포함한 것이고, 상견은 소위 참나를 말하는 인도사상이다. 단견은 우연론등 인과를 부정하는 인도사상이다.
  그렇다면 사견 즉 삿된 견해는 뭘까? 불교의 공(空)을 무(無)로 파악하는 그릇된 견해이다. 늦게 잡아도 중국 송대 이후부터는... 거의 일관되게, 도가사상의 무(無)를 태극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주류이다. 그런데 승조가 조론을 서술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혼란하던 시대의 분위기 탓인지는 몰라도, 소위 "허무적인 무(無)"로 파악하는 견해도 강했었다. 따라서 이러한 도가적 이해를 불교의 공(空)에 도입하는 견해도 당연히 있었고,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승조는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불자들의 그릇된 불교 이해였기에, 사견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렇다면... 불유불무(不有不無)라는 불법의 언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승조의 견해가 다음에 나온다.
 
  若   以有爲有   則   以無爲無   夫 不存 無   以觀法者, 可謂   識法實相   矣
  법을 살핌에, 있음으로 있음인 즉시 없음으로 없음이고, 그 없음도 있는게 아니면... '마음이란 법'의 실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의 구절은 해석의 문제가 좀 복잡하게 발생한다. 若이 어디까지 장악하고 있는가의 문제, "以有爲有 則 以無爲無"의 해석 문제, 以觀法者라는게 어디까지를 지칭하는가의 문제, 以觀法者의 者의 해석문제와 관련하여 識法의 識의 해석문제가 있다.
 
  이러한 해석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의 유명한 불법의 언명이 종종 등장한다.
  [ 謂若以有爲有 則以無爲無. 有爲不有 則無無也 : 만약 있음으로 있음이 된다고 말한다면, 없음으로 없음이 될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왜 그런가? 있음으로 있음이 되고, 없음으로 없음이 된다면... 있음이 없음이 될 수 없고, 없음이 있음이 될 수 없으니... 세상은 멈춰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있음이 된다는 것은 있음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러한 즉 없음도 (마찬가지 이치로) 없다. ] 
  그리고 위의 문장을 근거로... "若以有爲有 則以無爲無" 다음에 "有爲不有 則無無也"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해석이 강하게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夫 不存 無(무릇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장과 연결이 잘되지 않을 뿐더러... 해석이라기보다는 창작에 가깝다. [謂若~ 則 ~]의 문장구조는 [만약 ~라고 말한 즉, ~이다]임이 명백한 반면... 조론의 해당 구절의 문장 구조는 [ 若~, 可謂~]로, [만약~라면, ~라고 말할 수 있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에 가까운 해석이 주류라고 할 정도로 강력해지다 보니... 조론의 해당 문장 전체를 임의로 조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有爲不有 則無無也"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해석에서는 보통... 若이 以有爲有까지만 장악하며, 以觀法者는 夫不存無까지만 지칭하고, 以觀法者의 者를 사람으로 해석하기에 識法의 識은 '안다'는 의미로 본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에서는 해당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만약 있음으로 있음이라면, 없음으로 없음이 되므로... 있음은 있음이 아니고, 없음 역시 없다고 해야 한다. 무릇 없음이 있지 않음을 살피는 자는 법의 실상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옆의 해석도 말이 되도록 억지로 다듬은 번역이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나는 글자에 충실하게 해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있음과 없음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있음과 없음을 부정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냥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된다.
  若이 以觀法者까지 장악하며, 以觀法者는 "以有爲有 則 以無爲無 夫不存無夫"까지 지칭하고, 以觀法者의 者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어다. 즉 以觀法者는... "관법이라는 것으로'를 의미하거나... 문장 전체, 즉 "若以有爲有 則以無爲無 夫不存無 以觀法" 전체를 지칭한다. 두가지 중 어느 쪽이든 전체 해석에서는 큰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識法의 識은 '안다'는 동사가 아니라 '마음 즉 식온'이다.
  識法의 識이 식온일 때, 수행일 수 있다. 불법은 대상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마음이 어떠한가?'를 아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상이 없으므로... 대상으로 마음을 알고, 대상의 성품으로 마음의 성품을 안다.
  대상의 성품으로 마음의 성품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연기는 평등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그러므로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그러니 마음이 있을 때, 대상이 있고... 대상이 있을 때, 마음이 있다. 따라서 대상의 성품이 마음의 성품이다. 대상의 성품으로 마음의 성품을, 연기의 이치에 따라 추론하는 것이다. 추론은 불법에서 긍정된다. 물론 여기서의 추론은, "엄격한 의미의 추론" 즉 "불법(의 이치)에 따른 판단" 즉 "정사유"만을 의미한다. 일상적 논리에 따른 추론은, 불법으로 긍정되지 않는다.
  위와 같이 해석할 때, 첫번째 논점에서 다룬 '인(因)'과 '연(緣)' 중 하필이면 ['연(緣)'과 만났다 : 緣會]는 표현을 쓴 까닭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또한 위와 같이 해석할 때, 다음 구절 "雖觀有而無所取相, 然則法相爲無相之相. 聖人之心, 爲住無所住矣"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해당 구절을 보면... "爲"無相之相 그리고 "爲"住無所住라고 하여, 以有"爲"有 則 以無"爲"無와 같은 爲자가 쓰이고 있으며... 觀"有"(있음을 살핀다)는 표현이 있다. [雖觀有而無所取相]는 [비록 "있음"을 살피지만, 상을 취할 바 없다]는 뜻이다. 있음을 살피지만 상을 취할 바 없으므로, [然則 法相爲無相之相 : 그러한 즉, 법상은 '상이 없는 상'이 된다]고 말한다. 게다가 [雖觀有而無所取相]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금강경의 유명한 구절을 변용하여 [聖人之心, 爲住無所住矣 : 성인의 마음도, 머무는 바 없음에 머문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雖觀有而無所取相]의 앞구절은... [있음(이라는 상)을 살피지만, 상을 취하지 않는 것]에 상응한 내용이 나와야 한다.
  따라서 [若   以有爲有   則   以無爲無   夫 不存 無   以觀法者, 可謂   識法實相   矣]는 [만약... 관법에 따라... 있음으로 있음인 즉시 없음으로 없음이 되고... 무릇 없음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것은 ,,, ,,, 마음법의 실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관법에 따라, '이것이 있다'가 무상하여 '이것이 없다'이고, '이것이 없다'도 있지 않음은... 마음법의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분명히... 비록 있음을 살피지만, 상을 취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있음이라는 상'에 머무르지 않아 '없음이라는 상'으로 나아가고, 또 다시 머물지 않아 '없음이라는 상'도 '있지 않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분명 다음 문장과 정확하게 매칭이 됨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두번째 논점이 종결된다. 두번째 논점에서는... '있음'만을 살필 수 있는 행자가, 수행의 실제에서 불유불무(不有不無)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머무는 바 없이 머물어라"는 대답이다.
 
 
 

  三乘等觀性空而得道也. 性空者, 謂諸法實相也. 見法實相, 故云正觀.
  일체 불법은 성품이 비어 있음을 살펴 얻는 지혜이다. 성품이 비어 있음이, 법의 실제 모습이다. 법의 실제 모습을 알면, 바르게 살핀 것이다.
  若其異者, 便爲邪觀. 設二乘不見此理則顚倒也.
  만약 불법이 제각각 다른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릇된 견해를 가진 것이다. 가령 아함부 경전에서는 반야부 경전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是以三乘觀法無異. 但心有大小爲差耳.
  일체 불법에서 법을 살피는 일은 다르지 않다. 단지 서원의 크고 작음이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위의 해석은, 오늘날을 기준으로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의역을 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해당 구절에 충실하게 해석해 보자.
 
  三乘等觀性空而得道也. 性空者, 謂諸法實相也. 見法實相, 故云正觀. : 삼승은 모두, 성품이 비어 있음을 살피는 일을 바른 수행으로 한다. 성품이 비어 있다는 것은, 일체 법의 실제 모습이다. 법의 실제 모습을 알기에, 바르게 살폈다고 한다.
  삼승(三乘)은 보통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일컫는다. 성문승은 사성제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고, 연각승은 스스로 연기의 이치를 알아가는 것이고, 보살승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상좌(소승)와 대승 그리고 금강승을 삼승(三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 이런 사전적인 정의는 별로 알 필요는 없다. 사전적인 정의를 알아 봐야 아는게 아니다. 따라서 '삼승'이라 함은, 그냥 '일체 불법'을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머지 구절은 이미 위에서 다룬 내용으로 이해에 별 어려움이 없다.
 
  若其異者, 便爲邪觀. 設二乘不見此理 則 顚倒也. : 만약 그것이 다른 것이라면, 그릇되게 살핀 것이다. 성문승과 연각승의 이승(二乘)은 이러한 이치를 알 수 없다고 말함은, 곧 바르게 알지 못하고 뒤집어서 아는 것이다.
  是以三乘觀法無異. 但心有大小爲差耳. : 삼승(三乘)이 법을 살피는 일은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단지 마음이 크고 작음이 있어, 차이가 있다.
  위의 두 구절 역시 이해에 별 어려움은 없다. 그냥 오늘날 뜻을 파악하기 좋도록... 이승(二乘)을 아함부 경전과 반야부 경전으로 예시하고... '마음의 크고 작음'을 '서원의 크고 작음'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서원은 특히 대승의 불자에게 대단히 중요한데, 대승의 불자는 신심을 일으킴에 서원을 세운다. 그 누구도 서원을 강요할 수는 없다. 서원은 반드시 불자 스스로의 몫이다.
 
  이상으로 세번째 논점이 종결되었다. 세번째 논점에서는... 일체 불법이 '한 맛'임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대승의 불자는, 상좌부를 배척해서는 안된다. 대승의 불자는, 상좌불교를 얕잡아 보아서도 곤란하다.
  대승의 대장경이 아함경을 포함하고 있는 이유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상좌불교가 허물어지면, 대승도 성립하지 않는다. 대승의 관점에서... 상좌불교와 대승은 연기한다. 불법 자체가 이미 공하다. 불법의 성품은 비어 있다. 불법이 바로 실상이다. 그래서 불법이 불자의 의지처이다.
 
  승조는 불법의 '한 맛'을, 그 무엇이라 이름하든 '성품이 비어 있음'을 살피는 일에서 찾았다.
  나는 어떤가? 나는 '한 맛'을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다. 방편은 성품이 비어 있다. 다만 방편은, "중생을 잊지 않는 부처님의 크나큰 슬픔"과 "부처님의 위 없는 지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성품이 비어 있지만은 않다.
  승조가 틀리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승조의 견해는 타당하다. 그리고 역시 내가 보기에, 나의 견해도 타당하다. 이러한 이치를 잘 살펴야 한다.

 
 
 
  漚和般若者, 大慧之稱也. 諸法實相 謂之般若. 能不形證, 漚和功也. 適化眾生 謂之漚和. 不染塵累, 般若力也.
  '방편반야'는, '큰 지혜'를 칭한다. 법의 실제 모습을 반야라 이름한다. 모습이 아닌 것을 능히 알게 하니, 방편으로서의 공덕이다. 중생을 이롭게 함을 방편이라 이름한다. 중생과 함께 함에 바르기만 하니, 반야로서의 힘이다.
  然則, 般若之門 觀空, 漚和之門 涉有. 涉有 未始迷虛, 故 常處有 而不染. 不厭有 而觀空, 故 觀空 而不證. 是謂 一念之力 權慧具矣.
  방편반야의 반야로서의 측면으로 '비어 있음'을 살피면서, 방편반야의 방편으로서의 측면으로 있음을 넘어 간다. 있음을 넘어감에 있어, 애초에 허망함에 미혹되지 않으니... 있음만이 드러나도 휘둘리지 않는다. 있음을 꺼리지 않고 '비어 있음'을 살피니, 비어 있음을 논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한번의 알아차림에 반야와 방편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이름한다.
  一念之力, 權慧具矣. 好思, 歷然 可解.
  한번의 알아차림에 '방편반야'가 갖추어져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漚和般若에서... 漚和는 방편의 음역이고, 般若는 지혜의 음역이다. 따라서 漚和般若는 방편지혜라는 뜻이다. 다만 반야가 지혜를 의미한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방편반야'라고 표현하였다.
  '방편반야'는 큰 지혜인데, '방편반야'를 방편과 반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방편과 반야는 떨어져 있지 않다. 함께 한다. 그래서 '방편반야'라 이름한 것이다.
 
  반야는, 법의 실제 모습을 이름한다. 그런데 위에서 법의 실제 모습은 본래 없음이었다. 모습이 없는 모습이기에, 설할 수 없다. 그럼에도 모습이 없는 모습을 능히 논할 수 있는 것은, 방편으로서의 공덕이다.
  방편은, 중생에게 유익하도록 부처님께서 제시한 의지처를 이름한 것이다. 중생의 어리석음과 함께 하더라도, 중생의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아 청정한 것은 반야로서의 힘이다.
  따라서 방편이 아니면, 반야는 드러날 수 없으며... 반야가 아니면, 방편일 수 없다. 즉 방편이 아니면, 지혜는 드러나지 않으며... 지혜가 아니면, 방편일 수 없다. 이는, 불법의 대단히 중요한 측면이다.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야는 법의 실제 모습을 이름하므로, 방편반야의 반야로서의 측면으로 비어 있음을 살피고... 방편은 중생의 의지처이므로, 방편반야의 방편으로서의 측면으로 있음을 넘어 간다.
  방편으로서의 측면으로 있음을 넘어 감에, 애초에 허망함에 미혹되지 않는다. 방편은 반야로서의 힘과 함께 하므로,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아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네 중생은 늘 있음만을 볼 수 있지만,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있음을 꺼리지 않고, 비어 있음을 살피니... 비어 있음을 살핌에 (비어 있음을) 논하지 않는다.
  '비어 있음을 논하지 않는다'는 무슨 뜻인가? 간단하다. '모습이 없는 모습을 운운하며 말장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습이 없는 모습'은 법의 '실제 모습'으로 반야인데... 방편반야의 반야로서의 측면으로는 비어 있음을 살필 뿐... 방편반야의 방편으로서의 측면을 떠난 반야는 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방편이 아니면 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을 드러냄은 방편반야의 방편으로서의 측면이니까... 법을 드러냄에,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아서, 헛소리만 하고 있지 말라는 것이지...
 
  위와 같이 알면서, 있음에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한번의 알아차림은, 방편과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權慧의 權은 방편을 의미한다. 알아차림은 드러나 있음의 일이다. 그러니 위에서 적은 이치에 따라, 한번의 알아차림이 함유한 힘은 방편반야를 갖추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네번째 논점이 종결되었다. 네번째 논점에서는... '방편반야'를 수행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방편과 반야는 함께 한다. 수행자에게... 반야는 방편으로서만 드러나며, 방편은 반야이어야 한다. 방편을 떠나 반야를 찾으면, 본래 없음이니 이미 반야를 찾을 수 없고... 반야를 떠나 방편을 찾으면, 이미 방편일 수가 없다.
  생멸을 놓으면, 불생불멸을 알 수 없다. 있음을 놓으면, 있지 않음을 알 수 없다. 이를 알지 못하면, 연기도 알지 못한다.
 
 
 
  泥洹 盡諦 者, 直結盡而已 則 生死永滅. 故 謂盡耳, 無 復別有 一盡處耳.

  열반, 소진됨이란 무엇인가? 단지 속박이 소진되어, 생사가 온전히 스러짐이다. 그래서 '소진했다'고 이름할 뿐, 소진하여 도달할 바는 따로이 있지 않다.
 
  泥洹은 열반의 음역이다. 盡諦는 ['다함(소진됨)'의 '가르침(진리)']이다. 멸성제라고 할 수 있다. 진제와 속제의 이제 중 진제라고 보아도 무난하다.
  속제는 사성제이다. 그런데 사성제 중 하나인 멸성제를 진제라고 보아도 무난한가? 무난하다.
 
  진제와 속제는 빛과 그림자와 같다. 사성제는 고성제, 집성제, 도성제, 멸성제이다. 상좌불교의 사성제는 고성제의 입장에서 파악한 사성제이고, 진제는 멸성제의 입장에서 파악한 사성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속제를 떠나 진제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 고성제를 떠나 멸성제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세속과 열반은 한터럭의 차이도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성제의 입장에서 사성제를 바라보면, 생사가 있다. 하지만 멸성제의 입장에서 사성제를 바라보면, 생사가 있지 않다. 그러니 고성제를 떠나 멸성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멸성제를 떠나 고성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에, 조건지어진 것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열반은 괴로움을 떠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단지 괴로움이 있지 않으면 열반이다. 열반은 윤회를 떠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단지 윤회가 온전히 스러지면, 열반이다. 단지 괴로움 즉 속박이 소진되면, 생사도 온전히 스러진다. 하지만 열반의 입장에서는 '소진했다'고 말할 바 없으므로, '소진했다'고 이름할 뿐이다. 열반은, 법의 실제 모습인 본래 없음일 뿐, 어디 별 세계가 아닌 것이다.
 
  이로써 다섯번째 논점이 끝났다. 다섯번째 논점은, 법의 실제 모습을 떠나 따로이 열반이 있지 않음을 말한다. 일체 법은 부차적 인연과 함께 하여 드러났을 뿐, 실제 모습은 본래 없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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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8.23 분량이 좀 많다는... 역시... 탈오자와 내용 수정이 필요한지, 저녁쯤에 다시 기운차려서 점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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