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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말한다 !

2. 오직 모를 뿐 (불식)

작성자눈꽃|작성시간13.09.26|조회수326 목록 댓글 0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온전한 하나"를 거칠게 나마 수미일관하게 조망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합니다.

어떤 지식 체계의 원숙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안다면...스스로에 대한 솔직함과 함께 하는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은 배움의 출발점입니다. 앎의 출발점이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이 선명할 때,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아는 것이 선명합니다.

앎의 초기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함께 성립하니까요.

 

이상의 세가지 점에서 알 수 있듯..."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아는 것"은 "진정 아는 것"입니다.

 "솔직함"에서 알 수 있듯...앎과 유리될 수 없는, "앎에 대한 태도"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이미, 암기한 지식이 아닌, 소위 "체화된 앎"을 이야기했습니다.

원래 유학은 "원칙적으로 당위"를 말합니다. "유학의 앎"이란 원칙적으로 당위입니다.

그러니 소위 체화된 앎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 , , , , 유학은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압니다.

불교도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압니다. 원래 앎이란 그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학은,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알고...모르는 것으로만 나아갑니다.

반면 불교는,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알기에...아는 것은 무엇을 아는지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 나아가고, 모르는 것은 무엇을 모르는지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유학에서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언제나 함께 성립합니다. 불가분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전체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독자적이기도 합니다.

즉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합집합도 전체집합인 것만은 아니죠.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만은 아니고, 모르는 것이 참으로 모르는 것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로...본문에 인용된 不識을 한번 살펴 볼까요?

"不識(불식)"을 흔히 "모른다"로 번역합니다. "모른다"로 번역해도 틀리다 할 수 없으니...흔히 쓰이는 말을 굳이 따라가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문 표현을 인용하면 상황이 좀 달라집니다. 한자표현은, "不知(부지)"가 아니라, "不識(불식)"이니까요. "부지(不知)"는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 원래 "부지(不知)"가 "모른다"는 뜻이죠.

 "불식(不識)"은 불교 언명으로는 아주 재밌는 표현입니다. 식(識)은 오온의 식온을 의미하니까요. 결국 불식은 "감지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폼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불식은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불자의 소위 알아차림 수행에서..."오온 중 색온, 수온, 상온, 행온"은 "알아차림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식온"은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대승 경전에서 이르길..."마음(식온)"은 상이 없어, "마음(식온)"으로 "마음(식온)"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식온을 알죠? 상좌불교에서 이르길..."알아차림(기억)"으로 안다. 알아차림은 흔히 대상의 알아차림으로 소개되지만, 대상만 향한 것이 아닙니다.

"알아차림의 대상"과 함께 "대상의 감지"를 알아차림하는 겁니다. 불교에서는...더도 덜도 아닌, 딱 대상 만큼의 "감지(식온)"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연기를 기억하는 일이자, 오온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식온"은 "법" 즉 "불법" 곧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아는 겁니다.

불자를 자처하든 아니든, 불교를 안다는 분들이 곧잘 망각하는 하나의 사실입니다.

["식온" 즉 "불교의 마음"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알 수 있다]는 사실...그러한 사실을 곧잘 망각합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알지 못하고,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 여기저기서 전부 "마음"이란 이름을 거론하니, 글자만으로 곧잘 혼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하지만 불교가 아닌 인도철학에선 식온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식온이 있는 유일한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연유에서..."불자는 곧 법을 본다"고 이름합니다.

 
오늘날 소위 알아차림 수행에서 알 수 있듯, 대상에만 매달린 나머지 식온은 매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실종된 "수행기법"인 경우가 많은 겁니다.

 "법" 즉 "부처님 가르침"이 없는 수행 기법은 불교가 아닙니다. 찰나생, 찰나멸을 백번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대상의 찰나생, 찰나멸만 백번 알아 봐야...불교의 찰나생, 찰나멸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 즉 '법(연기의 가르침)'에 의지하여..."대상과 감지" 즉 "법(연기)"의 "찰나생, 찰나멸"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으면, 본질적으로 산냐 이상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야만...연기를 알아서, 마음은 상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대상"을 감지함에...마음은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라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여, "마음(감지, 식온)"을 "마음의 대상"과 함께 "기억"할 뿐입니다.

 여기서의 "기억"은 무엇인가?

일반적 의미의 기억이라기 보다는...차라리 "마음의 대상"을 감지하기에, "마음의 대상"을 아는 것에 상응하는 기억입니다.

그리하여..."不識(불식)"은 "앎이란 식이 아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가장 순수하다고 이름할 마음" 즉 "가장 순수하다고 이름할 앎"은 "식이 아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가장 순수하다고 이름할 마음" 즉 "가장 순수하다고 이름할 앎"은 "무심(無心)"이거든요. "무심"은 대상과 함께 하지 않으니까요...

 
"不識(불식)"이라는 언명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

분명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만은 아니고, 모르는 것이 참으로 모르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앎이란...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입니다.

지혜는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이예요. 지혜와 어리석음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지혜도 어리석음도 연기에 따라 성립하여 드러나며...지혜도 어리석음도 "不識(불식)"입니다.

 "식(識)"은 아닙니다. 그리고 "식(識)"은 상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단지 모를 뿐"이라고도 말하는 겁니다. 동시에 순수하다고 이름할 지혜는 "식이 아닌 것" 즉 "무심"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 "不識(불식)"일 수 밖에요. 등등등... 한량이 없어요.

 
위에 적은 꼬리말 내용이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일으켜 봤다면...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말장난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지의 현란한 향연일 겁니다.

하지만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보다 크게 바라 볼 수 있을 겁니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겁니다.

위의 꼬리말 내용이 말장난으로 보인다면..."위의 꼬리말 내용이 말장난임을 안다"는 앎이 있습니다.

위의 꼬리말 내용으로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어, 보다 크게 바라 볼 수 있다면...

"위의 꼬리말 내용이 말장난이 아니라 이치를 드러냄을 안다"는 앎이 있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거든요.

 
그리고 정정진은 옳고 그름을 넘어 갑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을 넘어 갑니다.

 [정정진이 옳은 것, 바른 것이니...정정진으로 여의는 것은 그른 것만은 아니다]는 뜻입니다.

설령 그르기만 한 것에서 출발해도, 신심에 따라 정정진하면...더이상 그르기만 하진 않습니다.  

 불교에서..."솔직함" 즉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안다"는 언명은...

"절대적으로 바른 앎"을 기준으로 삼은 것만은 아닙니다. "당위"를 기준으로 내세우는 유학의 "아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안다"는 언명과 뜻이 같지 않은 거죠.

하지만 '불교의 언명'은 '유학의 언명'이 담은 뜻을 "함유"하고는 있습니다.

 
 
[상수멸]은 "판단(상)"과 "느낌(수)"이 멸한 겁니다.

따라서 드러난 법에 있어...뭔가 느낌이 있다면, 상수멸의 체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수멸"이란 법은, 앎은 있으나 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법이 아니라, 앎이라 이름할 그 무엇도 없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순수한 앎"이라 "이름"하는 겁니다.

 "상이 흐려진 상태"라 이름할 법은, "비상비비상처"라고 이름하는 법이지, "상수멸"이라 이름하는 법이 아닙니다.

원래 "안다(知)"는 "감지(識)"를 조건으로 합니다. 감지하지 않으면 알려질 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알려지지 않으면, 도대체가 알 수도 없습니다.

결국 "모른다(不知)"도 "감지(識)"를 조건으로만 성립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애초에 "안다(知)"와 "모른다(不知)"는, "감지(識)"를 조건으로 성립한 "상(산냐)"인 겁니다.

그것은 판단이지..."식"이 아닙니다. "안다(知)"와 함께 "모른다(不知)" 역시 "불식(不識)"인 거예요.

드러나는 일체는 산냐인데...불법을 공부하면, 산냐 그 속으로 들어가거든요.

"안다"와 "모른다"의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실제 말장난에도 능수능란해 집니다.

산냐에 정통할 수록...말장난에 보다 풍부한 어떤 이치를 담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 "불식(不識)"이란 "말장난"도 있는 겁니다.

 모르는 대상에 대한 첫느낌은 불식(不識)이 아니라 식(識)입니다. "불식" 즉 "무심"이 있기에, "식"인 "드러난 법"도 있는 겁니다.

 

질문:

식온과 식온사이를 불식이라 할 수 있을까요? 

즉 (생)멸(생) 에서 (생)과 (생)사이인 없음(멸)을  불식이라 할 수 있을까요?

 

답변

...["식온과 식온 사이" 즉 "감지와 감지 사이"]를 "불식(不識)"이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식온 즉 감지가 "불불식(不不識)"인 것만은 아닙니다.

애초에 행자에게는 그 무엇이든 불식(不識)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가?

"마음(식온:감지)"은 상이 없으니까요...

"마음(식온:감지)"은 상이 없어, "마음(식온:감지)"으로도 "마음(식온:감지)"을 모른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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