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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말한다 !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작성자기억하기|작성시간11.03.22|조회수371 목록 댓글 5

<견해를 묻다>

 

금강경 구절중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뜻을 알고 싶어요 ...

 

 

 

<견해를 말하다>

 

<금강경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은...
경전에서 해당 글자의 뜻은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일으켜라)'>입니다.

 

경전공부를 하신다면 장엄정토분을 읽으셨을테니, 글자 뜻은 이미 아실 겁니다. 장엄정토분의 앞의 내용은 "수행의 성취"라는
것이 이름임을 밝히고 있으며, 장엄정토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론 "부처님의 불국토(열반)" 조차 이름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법무아"이니 '얻을 바'도 없고 '얻은 바'도 없다는 뜻입니다. '얻을 바'나 '얻은 바'가 있다면 취하고 소유했다는 뜻
인데, 취하고 소유했다는 '판단(이름,산냐)'은 "내가 있다는 견해"와 함께 할 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있다는 견해"가 있을 때 "얻을 바 혹은 얻은 바"가 있다는 연기를 설명한 겁니다.
"내가 있다는 견해"는 "산냐(상온,동일시,간주,이름)입니다. "얻을 바 혹은 얻은 바"도 산냐입니다. "이름이 있을 때 이름이 있
다"는 연기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연기에 따라 드러나는 이름은 무상하며 실체가 없어 제법무아이니...수행의 성취
는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까지 더 나아가 "열반"조차...'얻을 바'도 아니고 '얻은 바'도 아니라고 설명한 겁니다.

 

이러한 이치를 밝혔으니 이제 이러한 이치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할 겁니다.
그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응무소주이생기심>입니다. 그러한 이치를 알아 가는 방법인거죠.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는 총론격이며...그것을 구체화한 각론격으로 <색,성,향,미,촉,법>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서술
하고 있습니다. <색,성,향,미,촉,법>은 '여섯가지 감각기관(과 식온)'의 대상으로...행자에게 드러난 일체를 말합니다. 우리는
여섯가지 감각기관 밖에 없기에 <색,성,향,미,촉,법>이 아닌 그 무엇이 드러나지 않거든요.

 

<드러난 일체에 "사로잡히지 말라">에서 "사로잡히지 말라"의 의미가 문제가 됩니다.
"사로잡히지 말라"의 뜻을..."제거"로 해석을 하면 '삼매(지법:사마따)'를 의미하겠지만...
"계속 붙잡으려는 의도를 내지 않음"으로 해석하면 자각(관법:사띠)을 의미하게 됩니다.

대승정종분에서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리라"는 마음을 내어라고 하지만 그 말의 의미 역시 삼매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각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대승정종분에서 열거하는 '일체 중생'은 삼매의 경계들의 이름이기도 하니까요. 이러한 해석의
차이에서 소위 비파싸나(관법)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고 소위 선정(지법)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은...자신만의 수행으로서 상대적으로 지법을 강조하고 있으며, 보살행으로서 상대적으로 관법을 강조하고 있다
고...평가할 수 있습니다. 육조 혜능의 금강경강론에선...상대적으로 관법의 측면을 내세우면서 그러한 보살행이 곧 스스로의
수행임을 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는 육조 혜능의 어록인 육조단경의 태도와 일치합니다. 육조단경에서도 "삼매에
든 사리푸타를 무정"이라고 평가하는 유마경의 내용을 인용하며 서술하고 있거든요.

 

개인적으로 <오늘날한국 선불교의 선풍이 육조 혜능의 견해와 부합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조 혜능의 견해는 대승기신론보다 보살행(관법)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 줍니다. 견해를 세움에 대승의 본지를 잘 살린 분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선불교의 선풍은 그 주류가 대승기신론보다 '자기 수행(지법)'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거든요. 또 육조 혜능께선 '달과 손가락'의 비유에서 '열반경'을 해설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경>의 해설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하는 작업입니다. 저의 입장에선 선불
교가 선불교에 의해서 왜곡되는 현상을 곧잘 보게 됩니다. 저는 <금강경 장엄정토분>의 <응무소주이생기심>은 일차적으로 관
법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을 구체화함에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을 열거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대상이라는 것에서 끝은 아니죠. <대상>은 <마음:식온>과 연기하니까요.

 

위에서 <..."제법무아"이니 '얻을 바'도 없고 '얻은 바'도 없다는 뜻입니다...>라는 이치를 알아 가는 방법이라 했지요?
소위 <관법>은...<연기의 이치>에 따라...<지법(止法)>을 함유합니다. 결국 일차적으로 <관법>으로 해석되지만, 그 <관법>은
<'지법'을 함유한 '관법'>임을 <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화엄교학의 입장에서도 육조 혜능의 금강경강론은 탁월한 저술
입니다. <정>과 <혜>의 연기를 놓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큰 발자취를 남긴 분들은 너무
나 바르기에 흡사 부처님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저의 조건에서 나름 대로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그 분들 이상으로 바르게
드러낼 수 없으니 그럴 수 밖에요. 저는 죽을테지만 수행은 끝이 보이지 않죠.

 

"수행의 성취"에 대해 논하는 장엄정토분의 앞의 내용까지 고려한다면...<응무소주이생기심>은  <경>에서 이미 일차적으로도
<정정진>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속원융>이기에...<응무소주이생기심>은 그 자체가 <제법무아>라는 뜻이기
도 합니다. 소위 <속>이라는 것에서 드러나는 <제법무아>가 바로 <응무소주이생기심>인 겁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면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보다는 <머무는 바 없지만 마음은 있네>라는 뜻입니다.
<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이란 글귀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본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경>의 해당 내용은
<머무는 바 없지만 마음은 드러난다. 그러니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고 해석이 됩니다.
저명한 번역본이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라>고 해석 했을 뿐입니다. <경>을 읽는 작업 역시 산냐를 일으키는 겁니다.
스스로의 조건에서 나름 대로 살펴 알아 가는 것뿐이지...참으로 <경>을 읽는 것만은 아닙니다.

일차적 의미나마 간략히 적어 보았습니다. 님이 원한 것보다 많이 적은 듯 합니다. 저의 욕심이지요. 꿈이구요.
아래 <일미진중함시방>도 그렇고 경전 글귀 하나를 떼어 묻는 경우 참 어렵습니다. 고려할게 너무 많죠...
 
제가 평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때 마침 좋은 기회네요. 본글과 제가 단 꼬리말 내용과도 관련 있으니 그
내용을 적어도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종교란 이름이 들어 가면 참 이상한 환상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곳에
서 처음에 저의 서원은 "불법을 보다 바르게 있음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법을 보다 바르게 있음으로 드러내는 것"의 중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이름하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라 이름한 것은
하나의 "산냐" 입니다. 왜 그것만이 서원인가? 그것만 할 수 있는 수준이고 가장 기본적인 불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 불자인가? 부처님께 굴복했기에 불자입니다. 부처님께 굴복하고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서원으로 선택한 까닭은 뭔가?
별 고매한 그런 거 없어요. 제가 좋아서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나름 대로 수행한답시고 요가 하고 이것 저것 공부하다 결국
부처님께 굴복했습니다. 좀 웃긴 이야기지만, 그때 유쾌한 느낌이 일어났어요. 또한 굴복하고 보니 서원을 세울 필요를 느꼈습
니다. 저는 평소 인과를 곁들여 오온의 관찰을 합니다. 제가 선택한 방법이죠. 본격적으로 오온의 관찰을 시작할 때 느낌을 중
심으로 시작했습니다. 오온 모두 관찰하기엔 너무 벅찼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할 것으로 수온을 선택했어요.

 

<수연애>에서 갈애의 의지처인 수온입니다. 굴복의 경험도 작용했죠. 몸과 입으로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타인의 입장에선
의미가 있겠죠. 그런데 행위의 측면에서 보자면 저에겐 다르지 않아요. 유쾌하지 않은 느낌과 함께 회피하려는 의도가 일어나
면 저의 입장에선 도대체가 억지로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불가능해요. 이러한 사실은 관찰로 명확하게 확증됩니다. 그래서
다시 선택해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만 할 것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말입니
다. 저는 타인이 불쾌해하는 것을 곧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고 타인이 불쾌해 하지 않는 것을 불쾌해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이것 저것 잡다하게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잡다했죠. 기존의 잡다한 산냐 덩어리들이 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산냐가 수온에 영향을 미쳐요. 관찰로 명확하게 확증이 됩니다.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절대가 아닌
겁니다. 그것은 조건에 따라요. 불가능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해 노력해선 안되는 겁니다.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일어나
는 조건을 건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한 조건의 대표적인 것이 산냐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하나도 틀린게 없습니다. 연기합니
다. 그제서야 <계>라 이름할 것을 조금씩 조금씩 챙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냐를 건드리기 시작하니...유쾌한 느낌이 일어나
며 할 수 없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되니 이제 다른 게 중요해졌어요.

 

처음엔 주로 느낌에 따라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행온만 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느낌을 결정하는 주요 의지처인 산냐를 건드
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필요성이 생긴 거예요. 선택은 행온입니다. 무시무종이죠? 무시무종입니다. 저는 선택을 합
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수온에서 상온과 행온까지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직 충분히 잡지 못합니다.

솔직히 "충분히"라는 게 있기나 한지 모르겠어요. 산냐는 수온에만 영향을 미치는게 아닙니다. 식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산냐에 따라 마음을 일으키면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교차하기 시작해요. 소위 선정의 끝..."무심,없음,
법신"등의 이름들... 그런 거는 위와 같은 구체적 앎을 주지 못해요. 그런 거는 솔직히 수행이라 이름할 것도 없어요. 그러한 경
계가 드러나는 것은 제자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한 경계가 드러났을 때 저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선정을 무슨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소위 선정 체험을 신비하게 생각하는데 일상이 신비한 겁니다. 선정 체험을 뭔가 신비한 것으로 포장하는 거
그거 거짓말입니다. 단순한 하나의 사실일 뿐이예요. 산냐를 통한 식온의 간접적 핸들링일 뿐입니다. 제자이지 않으면 배울 수
가 없어요. 스스로가 무엇을 알고 스스로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없죠. 모르는 것이 있기에 아는 것조차 온전하지 않다는 사
실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만을 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이는 없어요.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한
것은 인과에 따라 스스로 안아야 합니다. 제가 오늘 화를 냈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화를 냈으면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화를 낸 것에 대한 과보가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일입니다. <선택>을 함에 인과를 살필 필요성이 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인과를 살핍니다. 그러다 보니 인과를 곁들여 오온을 관찰하게 된 겁니다.

 

일상의 인과는 대단히 복잡미묘합니다. 선정의 경계들처럼 단순무식한게 아니예요. 도대체가 어느 정도라도 의미있게 관찰하
기가 힘듭니다. 저는 중생이며 오직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저의 길을 갈 뿐입니다. 파사현정은 스스로를 불자라 이름하는
그 모든 중생의 의무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 등의 이교도가 아닌 불자에게만 파사현정합니다. 그것이 저의 일입니다. 저의
일을 함에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을 다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쾌한 느낌과 함께 하니까요. 솔직
히 [갑]님의 글은 상식적으론 싸가지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진실된 글입니다. 사실을 정확히 지적한 겁니다. 그런 글은 저에
게 유쾌한 느낌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를 자처하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기에 또한 유쾌합니다. 님
의 글은 불법을 왜곡하지 않아요. 그러니 더더욱 유쾌합니다. 물론 한방님의 두번째 글은 그냥 싸가지가 없는 겁니다. 유쾌하
지 않은 느낌과 함께 합니다. 그 누구도 님의 구미에 맞도록 스스로를 억지로 낮춰 가며 글을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제대로 모르니까요. 종교를 가지고 나름 대로 수행을 한다는 것이 특출
한가? 그런 걸 기대하는 것이 웃긴 거예요. 불자가 된다는 것이 의무하는 부담은 그런게 아닌 겁니다. 존경하는 사람을 찾고
싶다면 그런 사람을 찾으세요. 불자가 활동하는 곳에서 존경할 사람을 찾는 것은 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님이 불자라면 님이
존경할 수 없다고 비난하면 곤란합니다. 불자가 아니라면 채무자를 다시 찾아야 겠죠.

 

작용 없는 작용... 이런 것들 이해하려고 하면 일차적 의미나마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을 내어
수행해야만 일차적 의미나마 알게 됩니다. 솔직히 이해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엄청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차라리 수행하는게
더 쉬워요. 승려들이 정작 자신은 선정에만 매달리거나 농땡이 치면서...신도에겐 이래야 하느니 저래야 하느니 말만 많습니
다. 하심해야 하느니 용서해야 하느니 다투지 말아야 하느니...말만 쏟아 내요. 그러면 선정이나마 제대로 수행하는가? 무색계
선정 초입인 공무변처 정도에 이르면 그때부터 온갖 말을 쏟아 내죠. 영원불멸의 대생명이니 마음의 근본자리니 참본성이니...
엄청나요.아주 부처님 머리 꼭대기에 방석 깔고 앉는 경우 많습니다.

 

하심이란게 그냥 되지 않아요. 억지로 되는게 아니예요. 유쾌한 느낌이 일어 나야 됩니다. 유쾌한 느낌이 일어나는 조건을 형
성해야 됩니다. 이게 인과의 이치입니다. 그 조건을 형성하는 방법이 분명 하나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치의 맛은 하나입니
다. 단순히 "해야 한다"는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무책임하게 그러신게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셨
습니다. 혹시 제 꼬리말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강박관념은 잠시 놓아 두고...저의 경우를 예로 삼아...부처님 가르침
에서 자신에게 맞는 이치를 구하고 부디 그에 따라 마음을 내시길 바랍니다.자신에게 맞는 방편은 자신이 제일 잘 알 수 있습
니다. 여러 불자분들이 다양한 방편을 소개하고 있기에 그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이치가 끝까지 유효
하기만 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의 이치에 따라 수행을 할수록 부처님 가르침을 보다 깊게 알아야 가능합니다.

말이 어렵지 수행을 직접 하면서 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글을 이해하는 것과 좀 다른 어려움이 있을 뿐이예요. 그게 진짜죠.
불법이 보다 바르게 드러날 수록 부처님의 공덕으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파사현정을 하든 토론을 하든 찌지고
볶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다 온전하게 드러나도록 노력합시다. 여기까지만 제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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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Julie | 작성시간 11.03.22 누가 이렇게 긴 견해을....ㅎ

    내일 자세히 읽겠습니다.
  • 작성자Julie | 작성시간 11.03.23 읽는 동안 마음이 산만해서 그런지 윗부분은 다시 읽어야겠는데요.
  • 작성자방문객 | 작성시간 11.03.24 사실상 별개의 두부분으로 되어 있을 거라는...
  • 답댓글 작성자Julie | 작성시간 11.03.24 I know. I need to re-read the first part of the article.


    How come you do not answer me the question, "산냐 자체도 살펴야 한다는 뜻은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인가요? "
  • 작성자방문객 | 작성시간 11.03.24 몬봤었는데요... 오늘 그 말과 관련해 적었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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