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생기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때 생겨남의 의미를 조사해 보자.
만약 결과가 원인 없이 생긴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 어떤 때라도 항상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이와 반대로 그것은 항상 생길 수 없게 된다.
만약 그것이 그 자체로부터 생겨난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해 오고 있어야만 하고 (그 자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다시 생겨난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의미가 없을 것이다.
또한 만약 생겨난 무언가가 그 자체에서 다시 생겨난다면 이 과정은 무한정 반복되게 된다. 만약 결과가 남에게서 생겼다면 원인에 상관없이 생길 수 있고, 이것은 결과가 원인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그 자체와 남을 합한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확인한 후 생겨남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용수 보살께서 <중론>에서 설명 하셨듯이,
“자체에서도 아니고, 남(他)으로부터도 아니며
양자(兩者)에서도 아니고, 원인 없는 것도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혀 생겨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에서 결과가 생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때 결과에 대해 조사해 보자.
만약 결과가 본래부터 존재한다면 원인은 결과를 생겨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과가 본래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원인이 다시 생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원인은 원인이 있는 시간대에 아직 존재하지 않은 무언가를 생겨나게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생겨남이 없는 상태가 본래적 진실이라면 이것을 존재하지 않음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생겨나게 할 수 있는가?
용수보살께서 그의 <공성칠십론(空性七十論)>(순야타 - 삽바티 - 카리카)에서 설명 하셨듯이,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는 생겨남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 하지 않는 것은 생겨남의 대상이 아니다.”
간략히 말해 어떤 것이 원인, 상황 또는 그 밖의 것에 의지할 때 독립적 존재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독립과 다른 것에 의지함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설명 하셨듯이,
“조건으로부터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이 아니다.(본래적으로)
(왜냐하면) 이것은 생겨남의 실제가 없기 때문이다.
조건에 의지해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 공하다고 불린다.
이러한 공성을 아는 자는 수행이 잘된 자이다.”
또한 용수보살께서 <중론>에서 설명하셨듯이,
“상호 의존적이지 않은
어떤 존재도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어떤 존재도 없다.”
성천보살(아리야데와)께서는 또한 <사백론>(카사타타카 사스트라 카리카)에서 설명하시기를,
“의지하여 일어난 무엇이든
독립적일 수 없고,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없으므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존재의 근본 또는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상황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근본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상태이든 상관없이 그 상태로부터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과일 나무가 그것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성으로부터 본래적으로 실재 한다면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늙지도, 시들지도, 잎사귀가 떨어지거나 열매를 맺을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존재의 실재 방식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속임을 당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조차 때로는 바깥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무시이래로 우리는 무지의 영향아래 있어 왔고, 무엇이든 우리 마음에 보여지는 것을 진실로 본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 보여지는 모습이 자성에 있어서 근본적 진실이라는 뜻이 되고, 만약 이것을 조사한다면 우리에게 점점 명확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것을 조사 했을 때 발견 할 수 없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월칭보살(찬드라키르티)께서 <입중론>(마디야미카바타라)에서 설명하셨듯이,
“만약 본래적 존재가 있다면
현상의 소멸은 부정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공성은 소멸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을 조사하면
공한 본성을 가진 존재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간의 속제를
조사할 필요가 없다.
공성의 입장에서 분석하면 자아로부터의 생겨남이나
다른 것으로부터의 생겨남을 찾을 수 없고
이것은 세간적으로조차 찾을 수 없는(같은) 분석이다.
그런데도 당신이 주장하는 생겨남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모든 현상이 본래부터 존재한다면 다음의 허물을 따르게 될 것 이다.
(1) 공성을 체험한 지혜는 모든 현상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원인이 된다.
(2) 속제는 분석적 조사를 견뎌내고 찾을 수 있게 된다.
(3) 절대적 생겨남은 거부될 수 없게 된다.
<2만5천송반야경>(판가빔사티사하스리카 - 프라즈나파라미타)에서 말한 것 같이,
“오, 사리불이여! 여기 보살 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그는 보살을 실제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이에 더해
왜 그럴까? 오, 사리불이여! 보살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공하고,
보살의 이름은 보살의 이름으로부터 공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와 같다.
공성은 형상이 공함이 아니며 또한 공성은 형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형상이 공이며 공이 형상이다.
그리고 ‘알야-마하라트나쿠타-다마파라야야사타사하스리카-그란다’경의 가섭의 장에서,
“공성은 모든 현상을 공하게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현상이 공성이기 때문이다.” 는 등 많은 경전에서 모든 현상의 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을 잘못된 것으로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자성, 즉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진짜 사람과 꿈속의 사람, 형상과 형상의 그림자, 실제와 사진 그들을 찾았을 때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본래 하나인가? 진짜와 진짜가 아니라는 점이 본래 하나인가?
하나라면 찾는 자와 견해 모두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때 바른 견해를 찾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심오한 질문이다. 만약 우리 마음이 심오한 질문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부정적 극단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이런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많은 학파가 생겨났다. 첫 번째 학파는 청변보살(바바비베카)과 그를 따르는 이들에 의해 제창된 자립논증중관학파(스바탄크리카 -마디야미카)의 현명한 방법이다.
이 학파는 논리를 가지고, 결함 없는 의식의 나타남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상은 없다고 거부하지만, 자성을 가지며 그들 자신의 특징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받아들인다.
달리 말해 이름으로 나타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견해이다.
자립논증중관학파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대한 유식학자 세친보살(바수반두)의 유식학파(비즈나나바딘)의 견해가 있다. 이 학파는 모든 외적 현상을 인정하지 않고 의식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현상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일체유부와 경량부학파가 있는데 이들은 모든 현상의 공성을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자아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아를 받아들인다.
비불교도들은 사람의 자아 없음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기때문에 영원하고 독립적 영혼(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현상이 분석을 통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이는 명백히 사실과 일반적 의식에 모순된다.
모든 현상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분명하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것들로부터 해로움, 이득, 행복, 고통 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만약 모든 현상이 우리 자신을 포함해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분명히 존재한다면 그것들을 찾았을 때 왜 찾을 수 없는가?” <이만오천송반야경>(판카빔사티사하스리카-프라즈나-파라미타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같이 설명하셨다.
“ 보살은 단지 이름이다. 반야바라밀다도 단지 이름이다.
색·수·상·행·식은 단지 이름이다. 이와 같이 색은
신기루와 같다. 수·상·행·식 또한 신기루와 같다.
‘신기루’ 또한 단지 이름이다. 이것은 어떤 장소에 존재하지도 않고
어떤 방향에도 존재 하지 않는다.”
이에 더해,
“왜 그런가? 이름이란 개별적 현상에 대해 만든 가명(假名)이다. 이름은 보이는 그대로의 형상 또는 각 현상의 모습에 명칭을 붙인 것이고 그래서 모든 이러한 이름들은 단순히 명칭을 붙이기 위한 것이다.
보살 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 그들은 이름을 실제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 사리불이여! 보살 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 보살이란 자체도 단지 이름이다. 보리(깨달음)라는 것도 단지 이름이다.
반야바라밀의 지혜도 단지 이름이다. 색도 단지 이름이다. 수·상·행·식도 단지 이름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오, 사리불이여! 우리가 ‘나’, ‘나’ 라고 말하지만,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경전과 논서에서 가르치듯이 모든 현상은 단지 이름이며,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다면 대상의 부분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으며, 이것은 현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만으로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해 세속적 인식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면, 석녀(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의 아들 또한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면 세속적 인식의 대상과, 확실한 관습적 인식에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적 실제가 존재할 수 있는데, 본래적 실제는 관습적 인식에 의해 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궁극적 분석과도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이 세 가지를 갖추어야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주관적 투사에 의지함 없이, 그 존재의 자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공성을 언급할 때 논박되어지고 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아, 또는 부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불린다.
이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의 존재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마음의 상태를 무지라고 부른다.
실제로 많은 종류의 무지가 있지만 이러한 무지는 윤회(사바세계)의 뿌리이며, 자아 없음의 지혜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용수보살께서 <공성칠십론>(순야타삽타티 -카라카)에서 설명 하셨듯이,
“원인이나 조건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현상을
진짜라고 믿는 마음(분별심),
그것을 부처님께서 무지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으로부터 12연기가 나온다.”
파해야 할 바이자 무지가 인식하는 자아가 없는 것, 이것만을 무자아, 실제 없음, 공성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모든 현상의 궁극적 성질, 즉 궁극적인 진리인 진제라고 부른다. 그것을 깨닫는 지혜는 공성을 깨닫는 지혜이다.
만약 공성이 궁극적 진리라면 그것이 자성으로 존재한다는 뜻이겠는가? 공성은 모든 현상의 궁극적 존재 방식이기 때문에 만약 현상이 없다면 공성도 존재할 수 없다.
현상에 의지해 현상의 공성이 있고, 현상의 공성에 의지해 현상이 있다. 우리가 찾고자 할 때 현상 또는 현상의 공성을 발견할 수 없다.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살펴보더라도 일반적 인식에 의지해 존재할 뿐이다. 진실된 존재란 없다.
용수보살께서 <중론> 13품에서 설명하셨듯이,
“만약 공하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다면,
공한 무엇도 존재 할 것이다.
그러나 공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공이 존재하겠는가?
승리자(부처님)께서는 모든 잘못된 견해를 없애기 위해
공성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공성이 실제로 있다는 견해를 갖는다면
그런 자는 교화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한 <출세간찬탄경>(로카티타스타바)에서는,
“잘못된 견해를 모두 소멸하기 위해
감로수 같은 공성의 가르침을 설하셨기에,
공성을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그를
부처님께서 매우 비판하셨다.”
그러므로 만약 나무를 예로 들어 나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찾는다면, 나무 자체를 찾을 수 없고, 나무의 실제, 즉 다른 말로 나무의 공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성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찾는다면 공성을 찾을 수 없고, 그 공성의 공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공이 공성의 공성이다.
요약하면 나무는 속제이고, 나무의 궁극적인 실제는 진제이다. 또한 진제(공성)를 대상으로 해서 그것의 공성을 성립시키면, 대상이 되는 공성을 자기 공성의 측면에서 속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공성의 다양한 종류마다 자성에는 차이가 없지만, 근본으로 삼는 대상에 따라 공성을 20가지, 18가지, 16가지, 4가지로 나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유정)의 자아 없음(아공)과 현상의 자아(실제) 없음(법공) 이 둘에 포함된다.
이제 공성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해되어 나타나는지 설명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공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또는 가지지 않고, 텅 빈 것 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경험한다면 이것은 공성의 부정적 극단이며 공성에 대한 명료한 깨달음이 아니다.
또한 만약 누군가가 공성에 대한 이해만으로 이것이 공성이라고 간주한다면 이것 또한 공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아라야 -프라즈나파라미타 - 산카야 - 가타에서 설명하듯이
“비록 보살이 오온이 공한 것을 이해해도
그는 아직 모습을 신봉하며 따라서 생겨남 없는 상태에 대한 믿음이 없다.”
공성은 주로 반박되어야 할 대상을 부정함으로써 깨달아진다.
(1) 대신 다른 어떤 것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부정, 이것은 간접적 부정이라 한다.(非遮)
(2) 아무것도 그것에 남기지 않는 부정, 이것은 직접적 부정이라 한다.(無遮)
공성은 이 둘 중 후자이다. 그러므로 공성의 깨달음이란 반박되어야 할 대상을 단지 완전하게(직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형형색색으로 나타난 현상을 볼 때 실제 나타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이 들게 된다. 그 마음의 대상 자체, 즉 실제 없는 것이 바로 공성이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공성을 깨닫는 것이다. 샨티데바께서 <입보리행론>에서 설명하시듯이,
“만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사해야 할 대상이 없다는 말인데,
어떻게 기반이 없는 비존재가
마음 앞에 남아있을 수 있는가?
어떠한 존재도 비존재도
마음 앞에 남아있지 않을 때
다르게 실재하는 형상이 없기에
대상 없는 완전한 적정에 머무른다.”
만약 공성이 직접적 부정(無遮)이 아니고 간접적 부정(非遮)이라면, 또는 긍정이라면 모든 공성에 대한 깨달음은 여전히 인식과 형상이 될 것이며, 진실된 존재에 대한 집착(아집)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아집에 대한 어떠한 치료제도 될 수 없고 장애를 소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샨티데바께서 <입보리행론>에서 설명하셨듯이,
“그러나 분석의 과정이
또 분석의 대상이 되면,
이 분석도 분석할 수 있으므로
분석은 무한하게 될 것이다.
분석한 대상을 다시 분석하면
분별하는 마음의 존재도 부정된다.
주체와 대상 모두 존재하지 않는 이 상태를
‘자연상태의 열반’이라고 부른다.”
모든 대상,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숙고해 봤을 때 그것들은 실제가 없음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가 이 사실에 익숙해지게 되면 비록 그것들이 고유하게 존재하지 않고, 이런 모든 대상들이 꿈이나 신기루 같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의 결과와 이득이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다.
용수보살께서 <중론>에서 말씀하셨듯이,
“의지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
이것들은 공이라 일컬어진다.
그것은 가명으로 지어진 것이며,
이것이 중관의 도이다”
이런 식으로 공성을 상호 의존적인 연기라는 의미로 이해함으로써 그것들이 서로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속제 안의 바른 인식에 의해 이름만으로 존재함, 그것을 소멸시키거나 이뤄야 할 것을 바르게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만으로 있지 않는 존재(실제)에 대해 집착함으로써 일어나는 탐, 진 등의 모든 잘못된 상태의 마음이 힘을 잃게 되고 모두 서서히 소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공성의 바른 견해에 대해 분명한 경험을 얻으면 통찰력에 의해 어떻게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마음에 나타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어떻게 우리가 무언가를 실재라고 집착하고 그것에 대해 강한 느낌을 갖게 되는지, 어떻게 이러한 집착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탐, 진 또는 다른 번뇌가 일어나는지, 어느 것이 이러한 번뇌의 원인과 근거로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된다. 이러한 것을 얻으면 집착하는 마음이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며, 확실한 토대가 없다는 점에서 잘못되었음을 완전히 확신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의 반대 즉 무아의 존재를 깨닫는 마음이 올바른 지혜이며, 확실한 토대가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법칭보살께서 <석량론(釋量論)>에서 말씀하신,
“알아차림과 그 반대되는 뒤집힌 마음은
그들의 본성 때문에 항상 서로를 파괴한다.
이에 더해
줄어듦과 늘어남 모든 것은
본성에 의해 항상 반대이다.
무아에 익숙해져 아집을 줄여감으로써
번뇌를 완전히 없애게 된다.”
이 두 마음은 지니는 방식이 완전히 반대되므로 하나는 항상 다른 것을 파괴하고 만약 하나의 힘이 강해지면 다른 것은 자연적으로 약해진다. 용수보살께서 <공성찬탄 게송>(다마 다투스토트라)에서 말씀하셨듯이,
“불에 의해 정화되는 ‘금강의 옷’
많은 더러움으로 얼룩진
그것들을 불속에 넣었을 때
더러움은 타버리지만 옷은 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마음의 본성은 빛나는 것이지만
욕망과 같은 더러움으로 얼룩졌을 때
지혜의 불로 욕망은 타버리지만
마음의 빛남은 타지 않는다.”
그리고 미륵보살께서 <보성론>(寶性論)에서 가르치셨듯이,
“햇빛과 같은 부처님의 행이 비추고 있고
진여(眞如)는 차별이 없으며
부처될 종자가 있기 때문에
유정 모두는 항상 불성과 함께한다.”
마음의 궁극적인 자성은 번뇌의 악취에 물들지 않고, 세속적인 자성인 마음의 명료함도 번뇌의 악취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좋거나 나쁜 상태로 발전 할 수 있고, 마음을 다스릴 수도 있다.
나쁜 마음, 즉 나가 실제로 있다고 믿고 지니는 아집을 바탕으로 있는 의식들은 아무리 익숙해지더라도 궁극적으로 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좋은 마음 바탕으로 있는 의식들은 확실한 기초를 가지고 있어서 만약 우리가 그것에 익숙해진다면 무한하게 발전한다. 이러한 이유로 마음을 덮고 있는 불순함이 제거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또한 이러한 불순함이 완전히 제거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때 마음의 본성이 바로 해탈이며, 이 해탈을 얻을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미혹(번뇌장)을 소멸할 수 있다면 소지장인 그 습(習)도 또한 소멸할 수 있다. 미혹과 그 습을 모두 소멸하였을 때 그 마음의 본성 자체를 머무름이 없는 열반(무여열반) 또는 다르마카야(법신)라고 부른다. 이를통해 일반적인 해탈과 일체지의 경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용수보살께서 <중론>에서 말씀하셨듯이,
“의지하여 나타나므로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다.
끊어짐 없고 영원함이 없다.
옴이 없고 감이 없다.
하나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다.
뒤집힌 마음, 대상의 멸함 설하신
최상의 설법자, 원만구족하신
부처님께 절하옵니다.
모든 현상들이 연기법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생겨남 등의 8가지 한계에서 벗어난 공성이 연기의 뜻임을 자재로서 설하셨다. 부처님이 궁극적 행복(해탈과 부처의 경지)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틀리지 않게 가르치신 바른 분임을 알게 될 때,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일시적 행복(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인간, 천신의 몸 지속적으로 받는 것)도 틀리지 않게 보여주셨음을 알게 된다.
법칭보살(다르마키리티)께서 <석량론(釋量論)>(프라마나바티카)에서 설명하셨듯이,
“중요한 의미에 대해 틀림없기에
다른 의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성천보살(아리야데와)께서 <사백론>(카투사타카-사스트라-카리카)에서 말씀하셨듯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묘한
뜻에 의심이 일어나면
공성에 대해 의지하는
이것에만 신뢰를 두어라”
요약하면 궁극적인 행복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는 승리자(부처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논서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신심을 발전시킴으로써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부처님과 부처님을 따르는 인도의 위대한 스승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헌신과 존경을 발전시킬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 잘못 없는 길을 보여주는 영적스승과 부처님께서 과거에 걸어가셨던 같은 길 위에 있는 영적 친구인 승가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헌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하기에 월칭보살(찬드라키르티)께서 말씀하시길,
“거룩한 불법승 삼보는
해탈을 원하는 자의 귀의처이다.”
삼보는 해탈을 원하는 자의 유일한 귀의처라는 확신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보에 귀의함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방법이다. 삼보에 의지함으로써 자신을 위한 해탈이든 일체중생을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시키기 위해 부처를 이루든 이 둘은 끊임없이 더욱더 강하게 자라날 것이다. 출가수행자이든 재가불자든 계를 바탕으로 출리심의 동기와 매우 깊고 심오한 공성의 바른 견해를 갖게 될 때 그 때 자량도(資糧道)에 들어선다. 그런 후 많은 배움과 명상의 방법에 의해 이 견해에 대해 익숙해지면 이 견해는 명상을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 바뀐다. 이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하여 얻는 공성의 개념적 이해이다. 이것을 얻을 때 가행도(加行道)를 얻은 것이다. 점차적으로 공성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가질 때 견도(見道)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귀의의 대상으로서의 실질적인 법보이다. 이러한 명료한 깨달음을 치료제로 하여 고통의 원인인 진정한 장애물, 논리적 이유로 형성된 존재에 대한 아집, 삼악도에 탄생하는 것과 같은 진정한 고통들이 점차적으로 제거된다. 그 다음에 공성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 좀 더 익숙해지면 수도(修道)에 도달하고, 수도를 닦으면서 저절로 일어난 번뇌와 그들의 종자, 그리고 가장 미세한 번뇌까지 소멸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해탈이 성취되었으며, 무학도(無學道)인 소승 아라한의 경지를 얻는 것이다.
또한 순수한 보리심의 마음 동기로부터 일어나는 보시 지계 등 수승한 육바라밀을 닦고, 공성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지혜를 배우고(聞), 사유하고(思), 명상해서(修) 습으로 만듦으로써 더 깊게 들어가 공성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얻는다. 그 때 보살십지(菩薩十地)의 제1지를 성취하며 첫 번째의 무량한 공덕을 쌓는다. 앞서 설명한 것같이 학파의 견해에 의지한 아집의 진정한 멸함을 점차적으로 가져옴으로써 번뇌장이 남아 있는 7지의 경지까지 두 번째의 무량한 공덕을 쌓는다. 최종적으로 번뇌장이 소멸된 보살의 8, 9 10지 세 경지 동안에 소지장(일체지에 대한 마지막 장애)인 아집의 습관을 점차적으로 제거한다. 이 세 경지에서 세 번째 무량한 공덕을 쌓고, 모든 허물을 여의는 멸성제인 법신(다르마카야)을 얻는다. 동시에 보신(삼보가카야)과 화신(니르마나카야)를 얻고, 지혜와 자비, 힘을 완전히 갖춘 부처의 경지를 얻는다.
또한 출리심, 보리심,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 이 세 가지로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고 복덕과 지덕의 토대를 충분히 갖춘 근기가 있는 행운아가 소작∙행∙요가 딴뜨라에 의지하면 부처의 색신을 얻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될 것이며, 사마타와 위빠사나 함께 하는 도를 빨리 얻을 수 있으므로 속히 부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에 더해 무상요가딴뜨라의 수행은 풍(風)과 식(識)을 거친, 미세한, 아주 미세한 세가지로 나누어서 이 가운데 아주 미세한 의식을 닦아 익숙하게 함으로써 매우 강력한 힘을 갖춘 공성을 깨닫는 지혜를 얻게하고, 번뇌장 소지장을 매우 빨리 소멸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제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에 대해 명상하는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이 명상의 목적은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므로,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공덕을 엄청나게 많이 쌓는 것이 수반되어야한다. 예비수행으로 매우 이득이 많고 공덕을 쌓는 데 뛰어난 방법은 절하기, 공양 올리기 등을 포함한 7가지 수행법(칠지공양)이다. 공덕 쌓는 대상으로는 귀의처인 삼보를 대상으로 삼아 공덕 쌓는 것과 자신의 원에 따라 스승 등 특별한 귀의처를 대상으로 삼아 공덕 쌓을 수 있다.
본수행으로 공성에 대한 바른 견해가 자신의 마음 안에서 늘어나기 위해 간절한 기도의 힘이 함께 필요하다. 처음에 인무아(아공)에 대한 명상을 시작할 때 인무아의 바탕인 자아를 대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쉽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이 순간 공성을 명상하는 명상자 자신이 자기 마음속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명상 중에서 기쁨이나 슬픔 등을 다르게 느낄 때, ‘나’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명확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우리가 이러한 ‘나’에 대해 어떻게 집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어 앞서 설명했듯이 이 자아가 어떻게 존재하는 지를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과 이해가 더욱 깊어지게 되면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하는‘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잠시 나의 실제가 없는 공성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집중하는 명상(족곰)을 해야 한다. 집중하고 있는 이 대상을 놓치기 시작할 때 마다 자아가 존재하는 방식을 다시 사유하는 명상(쬐곰)을 해야 한다. 이 둘(집중과 사유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아에 대해 관찰함으로써 공성에 대한 작은 이해가 생길 때, 자아를 기반으로 ‘나’라고 이름 지어진 오온에 대해 관찰해야 한다. 이 때 색·수·상·행 온에 대해 일반적 차원에서의 관찰을 하고, 특히 식온에 대해 깊은 관찰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의식의 세속적인 본성을 깨닫는 것만도 매우 어렵지만 그러나 의식의 세속적 본성인‘의식의 명료함’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의식의 자성에 대해 관찰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의식의 궁극적 본성을 깨달을 수 있고, 이는 다른 것과 비할 바 없는 이득이 있다.
처음에는 약 30분간 명상하고 휴식을 취하며 마음에 나타나는 행복과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기분 좋은, 불쾌한 모든 다양한 현상이 그 자신의 편으로부터 존재하지 않고 의존적이며 신기루라는 분명한 확신을 발전시키려 해야 한다.
이 명상을 새벽, 아침, 저녁, 밤 네 번 해야 한다. 또는 낮에 네 번 밤에 네 번 할 시간이 있다면 여덟 번을 한다. 만약 이렇게 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면 새벽에 한번 저녁에 한번 하는 것이 최소한의 수행이다.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함으로써 우리의 공성에 대한 이해와 체험은 발전할 것이고 걷거나, 앉거나, 눕는 등 우리의 모든 행에서 바른 견해의 힘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공성을 대상으로 삼는 사마타를 얻지 않으면, 공성에 대한 위빠사나가 생길 수 없기 때문에 사마타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다른 경론에서 배워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단지 공성에 대한 지식을 원하는 것만이 아니고 내적 수행 체험을 원하는 것이라면, 앞에서 말한 것들을 토대로 하여 깊은 뜻(공성)에 대해 설한 경전과 논서, 그것들에 대한 티벳의 위대한 스승들이 바르게 설한 해석들을 자기 근기에 맞게 문사(聞思)를 통해서 수행 체험(修)을 해야 한다. 그렇게 체험과 훌륭한 경험 갖춘 위대한 바른 스승의 가르침을 함께 함으로써 공성을 바르게 닦아야 한다.
이 책을 쓴 공덕으로
행복을 원하는 일체중생이
공성을 바르게 보는 눈 얻고
위대한 깨달음 얻게 하소서
이 책은 불법을 구하는 동서양의 초발심자들과 간절하게 배우고자하는 이들, 특히 깊고 미묘한 무아의 견해를 알고 싶지만 위대한 중론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공부할 여유가 없거나, 티벳어 경전을 공부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또한 다른 언어로 더 쉽게 번역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
샤캬 비구 뗀진 갸초(14대 달라이 라마)가 지은 공덕으로
세상에 선행과 덕행 늘어나게 하소서.